동시대 대중문화예술을 이야기하다 #4
이제 동시대 대중문화예술의 출발은 아시아다. 한국, 일본, 대만, 홍콩, 태국,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의 쿨 키즈!
FAHIMAH THALIB
파히마 탈립(Fahimah Thalib)은 <보그 싱가포르>의 얼굴이다. 팬데믹 시기, 대형 쇼핑몰 뒷골목에서 캐스팅된 탈립은 구찌 의상을 입고 촬영한 <보그 싱가포르> 론칭 비디오를 시작으로 지면 커버와 패션 필름에도 얼굴을 비쳤다. “믿기지 않는 기회였어요. 특히 주인공으로 등장한 론칭 비디오 영상이 꽤 이슈가 됐는데 저 같은 마이너리티가 <보그> 같은 글로벌한 브랜드를 대표한다는 것이 굉장히 전위적으로 보였던 것 같아요.”
탈립은 자신을 마이너리티라고 일컫는다. 근사한 화보에 언제나 히잡을 쓰고 등장하는 탈립은 예멘 출신의 아랍 가정에서 네 아이 중 셋째로 태어나 싱가포르에서 성장했다. “어릴 땐 아랍이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어요. 친구들이 인종과 문화를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도 몰랐죠. 부모님에게서 가족의 역사와 계보에 대해 들으며 서서히 그 문화와 영향을 받아들이게 됐어요. 무슬림은 제 정체성입니다.” 그녀는 최근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Rumi)가 지은 시의 한 구절에 크게 감명받았다. “‘있는 그대로 보여라. 혹은 보이는 그대로의 사람이 되거나(Either seem as you are, or be as you seem)’라는 말이에요.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는 사람, 어떤 순간에도 스스로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탈립이 가족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독특한 정체성만이 아니다. 온갖 직물과 이국적인 카펫으로 넘쳐나는 싱가포르의 아랍 스트리트에서 직물 가게를 운영한 할아버지와 특출한 재봉사 어머니로부터 타고난 패션 감각을 물려받았다. 이번 화보에서 자신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의상을 입어달라는 <보그>의 주문에 그녀는 바틱(Batik) 팬츠를 골랐다. “바틱은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전통 직물이에요. 원래 할머니 것인데 엄마가 저를 위해 멋진 바지로 리폼했죠.”
때로 지나치게 성적 대상화되기도 하는 패션계에서 히잡 모델로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모델로서 매력이 다채롭지 않을 수 있다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점점 더 많은 패션 브랜드가 모델의 진정성과 고유한 가치관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그들은 이제 특정 이미지를 위해 누군가에게 의미 없는 두건을 씌우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정체성을 위해 히잡 모델을 초대하길 원해요. 멋진 변화죠!”
탈립의 또 다른 직업은 언어 치료사다.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후 멜버른에서언어 치료학 석사과정을 이수한 그녀는 벌써 9년째 여러 병원과 클리닉에서 환자를 만난다. 뇌졸중 환자가 사랑하는 가족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극심한 섭식 장애를 겪은 환자들이 목소리를 되찾고, 좋아하던 음식을 맛볼 수 있도록 도우면서. “때론 모델로, 때론 언어 치료사로, 제가 좋아하는 일을 다 할 수 있으니 정말 행운이에요.” 탈립은 자신의 가장 큰 매력으로 ‘유머 감각’을 꼽았다. 지금처럼 다양한 사람들과 즐겁게 소통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탈립은 좋아하는 일을 오래오래 계속하고 싶다.
HANNAH WOO
성북동에 있는 우한나의 작업실 입구엔 그녀의 최신작 ‘Milk and Honey’가 검게 드리워져 있다. 한 쌍의 천이 늘어진 모습은 날개를 펼친 박쥐 혹은 젖가슴 형태 같기도 하다. 그 뒤로 보이는 실내 풍경은 그의 바쁜 일상을 어렵지 않게 짐작게 했다. 잘리고 구겨진 채 쌓인 패브릭 더미, 벽에 다닥다닥 붙은 드로잉 앞으로 흩어진 나무 조각과 점토, 알루미늄 막대는 방금 전까지 그녀가 몸담은 시간의 순수한 흔적이었다. “프리즈 서울 개막이 성큼 다가왔는데 ‘Milk and Honey’를 앞으로 아홉 점 더 만들어야 해요. 열심히 하는데도 여전히 할 일이 쌓여 있군요.”
우한나는 2023년 ‘프리즈 서울’의 제1회 아티스트 어워드 수상자다. 특전으로 주어진 개인전을 준비하느라 스스로를 조금 더 채근하고 있다. 세계적인 예술 애호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예술 잔치에서 선보일 개인전을 우한나는 ‘위대한 무도회(Great Ballroom)’라는 주제로 꾸미려 한다. 천장에서 길게 늘어뜨린 패브릭 설치 작품 ‘Milk and Honey’를 메인으로 크고 작은 가슴의 향연을 준비 중이다. 그중에는 가로 폭이 6m에 달하는 거대한 피스도 있다.
우한나는 패브릭, 솜 같은 부드러운 재료로 신체를 형상화한 작품을 꾸준히 선보여왔다. 장기 모양을 본뜬 가방 오브제 ‘Bag with You’가 대표적인 예다. 건강검진으로 우연히 오른쪽 신장이 수축해 사그라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예술로나마 외부에서 장기를 달아주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아가 가방을 관람객이 착용할 수 있게 하고, 거기에 자궁과 신장 오브제를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하며 개인적 위기는 예술로 무사히 승화됐다. 활짝 펼쳐진 난초 형태의 ‘Bleeding’은 여성으로 태어난 자신의 신체를 상징하는 작품. “서른 넘어 결혼했는데, 주변에서 노산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더군요. 생산의 개념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죠.” 그녀의 자전적 경험에서 탄생한 작품은 주로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공통으로 존재하는 장기를 형상화한다. 두 주체가 지닌 장기간의 위계를 허물어뜨리는 우한나의 표현 방식이 ‘에코 페미니즘’으로 해석되는 이유다.
새로운 살과 피부, 가죽을 창조해온 그녀는 최근 ‘뼈대’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다. 재료도 패브릭이 아니라 나뭇가지에 점토를 붙이고 이를 알루미늄으로 캐스트해서 창조한 단단한 물질을 활용한다. 이 물질은 나무가 되거나 생명체의 뼈나 이빨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천을 꿰매는 바늘’이 된다. “비로소 천과 바늘을 모두 갖추었으니 강이든, 바다든, 산이든 뭐든 창조할 수 있게 됐죠. 가끔 제가 바늘을 주 무기로 엄청난 에너지를 다루는 능력을 지닌 여신 같다는 상상을 하기도 해요.” 이 모든 서사가 새롭게 탄생할 생태계의 기틀을 이룬다. 그 결과는 ‘프리즈 서울’의 포커스 아시아 섹션에서 공개될 것이다.
주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녀는 주변으로부터 야생동물 같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작업할 때는 반드시 신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하루 1시간씩 강북의 오래된 골목을 거니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신의 생태계인 서울 곳곳에서 그녀는 영감을 듬뿍 흡수한다. “서울은 재미있으면서 징그러운 도시예요. 밀집된 도시의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가 예술가들을 괴롭히지만 결국 작업으로 이끌거든요. 작업으로 발산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자극이죠.”
TAM CHUDAREE DEBHAKAM
타이 푸드의 위상을 드높인 주인공. 땀 추다레 뎁하깜(Tam Chudaree Debhakam)은 2023 미슐랭 1스타, 2023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에 선정된 레스토랑 반 테파(Baan Tepa)의 오너 셰프다. 1992년생인 그녀는 2023 베스트 셰프 어워즈 100인으로도 선정되며 태국에서 가장 뜨거운 셰프로 거듭났다. <보그> 촬영을 위해 땀이 드넓은 레스토랑 한가운데서 포즈를 취하자 인상적인 포스가 뿜어나왔다.
땀은 음식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가정에서 자랐다. 가족 식사 시간은 언제나 할머니가 만든 요리에 대한 감탄으로 시작됐으며, 가족이 다 함께 요리 수업을 들은 적도 있다. “물론 이때만 해도 요리는 그저 나쁘지 않은 취미 정도였죠. 그러다 엄마 친구분의 레스토랑에서 정식으로 일을 경험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때부터 요리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엄청난 압박감 속에서 빠르고 정교하게 음식을 만드는 일에 꽤 소질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희열이었죠!”
이후 땀은 실력을 갈고닦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방콕에서 푸드 사이언스를 전공하고 뉴욕의 미국요리학교(ICC)를 졸업한 뒤 전 세계를 돌며 현대적인 태국 요리를 연마했다. 동시에 농장과 지역 식재료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지속 가능한 제철 재료를 활용해 전통 태국 음식의 풍미에 산뜻한 변주를 가미하는 지금의 스타일이 탄생한 경위다. “창의적인 채소 요리로 유명한 셰프 댄 바버(Dan Barber)와 뉴욕의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 블루 힐 앳 스톤 반스(Blue Hill at Stone Barns)에서 지속 가능한 농업과 건강한 재배 방식의 중요성을 배웠어요.” 그 후 고향으로 돌아온 땀은 2017년 <탑 셰프 태국> 시즌 1에서 우승을 거둔 자신감으로 반 테파를 열었다. “지금 반 테파가 있는 곳은 원래 할머니와 우리 가족이 함께 살던 집이었어요. 2019년에 이곳을 12명이 앉을 수 있는 원 테이블 레스토랑으로 만들었죠. 대공사를 거쳐 2020년 11월, 드디어 지금의 모습으로 오픈하게 됐고요.
반 테파의 시그니처 메뉴는 태국 남부에서 공수한 징거미새우로 만든 요리와 오징어 먹물을 넣은 짧은 누들이다. “로컬 허브와 해산물은 특히 좋아하는 식재료예요. 재료는 곧 요리라고 생각합니다. 지역 농부와 어부에게 최고의 식재료를 공급받고, 정원에서 직접 수확하며, 재료의 모든 부분을 활용해 요리 과정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를 최소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반 테파 역시 진정성과 지속 가능성을 철학으로 삼고 있어요. 어느덧 50명에 이른 직원들과 함께 타이 퀴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풍성한 미식 경험을 선사하려고 노력하죠.”
땀은 최근 반 테파 팀원들과 함께 ‘Baan Tepa on Tour’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태국 전역을 여행하며 발굴한 식재료로 만찬을 꾸리고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다. “얼마 전 호주에서 신선한 트러플과 랍스터로 요리하며 문득 이 프로젝트를 전 세계로 확대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세계 곳곳에서 제 요리를 선보이는 게 꿈이거든요. 그렇게 태국 음식을 알리고, 태국과 태국인이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요.”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포토그래퍼
- Jaya Khidir(Fahimah Thalib), 김형상(우한나), Nucha Jaitip(Tam Chudaree Debhakam)
- 글
- 원영인(우한나), Camille Park(Tam Chudaree Debhakam)
- 헤어
- 심혁(우한나)
- 메이크업
- Forqeepsake(Fahimah Thalib), 심혁(우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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