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대중문화예술을 이야기하다 #5
이제 동시대 대중문화예술의 출발은 아시아다. 한국, 일본, 대만, 홍콩, 태국,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의 쿨 키즈!
MARTIKA RAMIREZ ESCOBAR
1992년생 마티카 라미레즈 에스코바르(Martika Ramirez Escobar)는 영화감독이다. 독특한 상상력과 사랑스러운 유머를 머금은 크고 작은 영화로 입소문이 나더니 최근 첫 장편 연출작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2022)로 선댄스 영화제와 토론토 국제 영화제, 시체스 국제 영화제 등 굵직한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필리핀 영화의 위상까지 훌쩍 높였다. 그녀의 인스타그램 계정(@martika.escobar)을 방문하면 온갖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환한 미소를 띤 에스코바르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는 드레스 차림으로 악당들을 물리치는 할머니가 주인공인 유쾌한 액션 히어로물이다. 일곱 살 때부터 비디오 카메라로 가족과 반려동물, 장난감을 촬영해 영상을 만든 에스코바르는 1970~1980년대 필리핀 액션 영화계 베테랑들이 이끈 워크숍에 참여하며 이 영화를 구상했다. “그저 영화가 너무 좋아서 프로덕션 디자인부터 음악, 편집, 연기 등 영화와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았어요. 그러다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를 제작하며 비로소 이 일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게 됐죠. 나를 둘러싼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열성적인 스태프들과 함께 애쓴 8년 남짓은 정말 마법 같은 시간이었어요.”
아그네스 바르다를 존경하는 에스코바르는 특히 할머니들에게 관심이 많다. 마초주의 영화로 가득한 필리핀 영화계에 여성의 부드러운 시선으로 폭력에 맞서는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가 탄생한 비결이다.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누구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제 할머니인 헤디 라미레즈(Hedy Ramirez)를 꼽겠어요. 올해 76세인 할머니는 여전히 저를 위해 손수 드레스를 만들거나 이것저것 재활용해서 근사한 인형 집을 만드세요. 천에 염색도 직접 하시죠. 하지만 할머니는 타인의 인정을 받거나 갤러리에 자기 작품을 파는 것엔 전혀 관심이 없어요.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만들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죠. 저도 그런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요.”
그녀는 평소 ‘만약에’라는 상상을 즐긴다. “꿈을 이루기 위한 모든 과정은 충분히 의미 있고 아름답잖아요. 그 결과가 상상한 것과는 많이 다를지라도 그걸 추구하는 과정에서 겪는 내면의 변화와 깨달음은 값지죠.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은 녹록지 않지만 그런 믿음이 있기에 다시 출발선에 설 수 있는 것 같아요.”
에스코바르는 이번 <보그> 촬영을 집에서 진행했다. 그녀의 방은 악기와 알록달록한 소품, 추억이 묻은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일평생 마닐라 도심에서만 살아온 ‘시티 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그녀는 방 안 곳곳에 필리핀의 바다 사진도 붙여두었다. 가장 좋아하는 바다는 코론(Coron)과 팔라완(Palawan). 현재 구상 중인 영화 <Daughters of the Sea(가제)>도 바다와 관련이 깊다. “새 영화에서는 세 가지의 필리핀 바다 설화를 다룰 거예요. 요즘 들어 다양한 형태의 종이 지도와 바다, 시간의 현존성에 관심이 많이 가거든요.”
JOYCE HO
“저는 반응하는 사람이에요. 그러기 위해 일상적인 상황과 풍경을 자세히 관찰하죠. 사회에 대한 저만의 해석이 제가 속한 세대의 시선을 대표하기도 한다는 책임감도 갖고 있어요.”
날카로운 눈동자, 예리한 호기심을 지닌 조이스 호(Joyce Ho)는 대만 예술계에서 가장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는 아티스트다. 손재주가 남달랐던 그녀는 미국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한동안 디자이너로 활약했다. “하지만 저는 더 자유롭고 정직하고 순수하게 예술을 하고 싶더라고요. 대상과 표현법의 제약을 모두 벗어던지고 오직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만 집중해서요.” 조각, 설치미술, 사운드, 영상,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를 기웃거리며 자신만의 표현법을 갈고닦은 조이스는 2010년 마이애미와 타이베이에서 첫 개인전을 선보인 후 꾸준히 무대를 넓혔다. 그리고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아시아 소사이어티 트리엔날레, 프리즈 서울, 아트 바젤 등 새로운 땅에 당도하는 그녀의 작품은 매번 관객의 궁금증을 부추기며 환영받았다.
조이스는 설치 작품 ‘A Day’(2015)와 대만 TKG+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Counting>을 통해 공개한 영상 작품 ‘Vera×Diary’(2022)를 자신의 세계관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중요한 작품으로 꼽는다. “해체된 동작과 일상의 단편적인 조각으로 우리와 현실 사이의 낯선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일이 재미있어요.” 여섯 개의 노란 문이 월요일을 제외하고 하루에 하나씩 열리도록 디자인한 ‘A Day’는 시간과 공간, 일상의 관습적인 관계에 의문을 던지는 작품. 식탁, 피아노, 싱크대, 침대, 서랍장 아래에 자신의 몸을 ‘수납’하는 퍼포먼스를 편집해 만든 영상물 ‘Vera×Diary’ 역시 일상적 공간에 비일상적 몸짓을 가미해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만든 예다.
무언가를 기억하고 기록하려 무의식적으로 스티커를 붙이는 행위에서 착안해 절제된 동작으로 스티커를 부착하는 모델을 앞세운 작품 ‘Dots’(2021)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 도시인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동작의 위험성을 꼬집었다.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개인은 끝없이 소외되기 때문이다. “사회 속의 개인은 타인과 맞닿을 수밖에 없잖아요. 소비하고 판매하는 행위, 서비스를 주고받는 행위는 전부 타인과의 소통 행위죠. 하지만 그럴 때 포착되는 일상적인 동작이 어쩐지 기묘하게 느껴졌어요.” 자신이 관찰한 바를 정제된 배경에 풀어놓으며 그녀는 일상에 고요한 파동을 일으킨다.
조이스는 넷플릭스와 스포티파이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마음 맞는 사람들과 직접 만나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쪽을 선호한다. “라이 치 셩(Lai Chih Sheng), 첸 칭 유안(Chen Ching-Yuan) 등 대만의 현대 예술가들과 시시때때로 예술 이야기를 나눠요. 서로의 작품에 대한 비평도 서슴지 않죠. 정직하고 순수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환경에 둘러싸이는 건 예술가에게 아주 중요해요. 좋은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리스너가 되어야 한다고 믿어요.”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는 산책을 택한다. “살고 있는 신이(Xinyi) 지구가 다소 번화한 동네라 여유가 있을 땐 평화로운 분위기가 흐르는 진과스(Jinguashi)에 가요. 루이팡(Ruifang) 지구에 있는 오래된 마을로 경치가 무척 아름답거든요. 세상을 거닐며 관찰하는 일은 가장 소중한 동력입니다.”
SITA SUNAR
시타 수나르(Sita Sunar)는 여섯 달 동안의 네팔 카트만두 여행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보그>와 연락이 닿았다. “달콤한 마무리면서 탐구되기를 기다리는 미지의 세계로 걸어갈 때였죠. 한마디로 완벽한 타이밍이었어요.” 시타 수나르는 요가 인스트럭터로 인도, 가나, 우즈베키스탄 등의 지역 장인과 물품을 만드는 자지 빈티지(Zazi Vintage)와 함께해왔다. 올가을에는 이번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히말라야 생태계에 기반한 수공예품을 선보이는 새로운 플랫폼을 준비 중이다. “평소에도 숨은 지역의 문화, 생태계, 장인 정신에서 영감을 받죠.” 최근 그녀는 고향에서 ‘파로 디바인 페미닌(Paro Divine Feminine)’ 워크숍을 열었다. 지역 구성원의 공동체 형성과 교류가 목적인 행사였다.
시타 수나르는 네팔의 성스러운 산 아래에서 태어나 인도 고아(Goa)의 ‘치유하는 물’을 마시며 자랐다. 드넓은 바다, 광활한 숲, 존재의 느림을 보고 자란 유년 시절 덕분에 시타는 ‘평생 불같은 에너지’를 좇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시타의 어머니는 히말라야의 무속 혈통이고, 아버지는 힌두교 신자다. 하지만 딸이 자신만의 정신성을 탐험하도록 허락했다. 그녀는 인도의 신비로운 요가, 명상에 이끌렸다. 매일 심신에 규칙을 부여하려 요가를 한다. “요가는 젠더, 카스트, 피부색 등 사회 규범을 초월하죠. 제 좌우명도 어떤 차별에도 구속되지 않는 것, 본질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시타의 고향에선 달의 주기에 따라 성스러운 기념일을 표시한 달력이 있다. 지금도 그녀는 달의 주기에 따라 움직인다. “초승달에서 보름달까지 달의 단계에 따라 바다의 밀물 썰물이 바뀌는 것처럼 인간도 그 영향을 받아요. 달에 맞춰 감정과 에너지가 민감해지죠. 일명 ‘달 호흡’을 실천하면서 내면의 우주를 견고히 하고 휴식할 수 있어요. 달의 에너지를 활용해 창조적인 일도 해낼 수 있고요.”
시타에게 심신이 무너진 현대인이 치유를 위해 무엇을 할지 물었다. “단절에서 벗어나 연결하세요. 인간은 공동체에 속해야 합니다. 그것이 두렵다면 우선 자연과 손잡으세요. 제가 달을 보는 것처럼요.”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포토그래퍼
- Joseph Pascual(Martika Ramirez Escobar), Hedy Chang(Joyce Ho)
- 헤어
- LJ Angeles(Martika Ramirez Escobar)
- 메이크업
- Patrick Gonzales(Martika Ramirez Escobar), Fiona Li(Joyce 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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