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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의 정우성부터 2023년의 정우성까지

2023.08.11

1996년의 정우성부터 2023년의 정우성까지

신작 <보호자>의 감독이자 주인공으로 돌아온 정우성. 방황하는 청춘의 아이콘은 어떻게 만인이 사랑하는 원숙한 미중년으로 진화했나. 그의 필모그래피를 사진으로 돌아본다.

본 투 킬, 1996

정우성은 데뷔할 때부터 주연이었다. 그의 조각 같은 외모와 큰 키는 홍콩 누아르와 할리우드 장르물을 모방하기 시작한 한국 영화계에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궁핍한 한국 근현대사의 여운이 느껴지지 않는 비범한 얼굴, 그러나 과도한 자의식 없이 차분한 태도와 눈빛. 그는 시대의 요구와 맞아떨어지는 새로운 유형의 피사체였다. 하지만 정우성의 초기작은 큰 호평을 받지 못했다. 데뷔작 <구미호>(1994)에서는 톱스타 고소영의 상대역이었지만 주연들의 연기가 아쉽다는 평을 얻었다.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1995)에서는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숙한 스타일링으로 미모마저 빛을 발하지 못했다. 미니 시리즈 <1.5>(1996)에서는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둔 재미 교포를 연기했는데 아직 서툰 연기에 영어 대사까지 더해져서 불안한 장면이 많았다.

영화 <본 투 킬>은 참패에 가까운 흥행을 거뒀지만 정우성 활용법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할리우드 스타일 액션을 해보겠다며 촬영에 공을 들였지만 정우성이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심은하를 기차에 태워 보내며 배웅하는 장면이 하이라이트로 꼽힐 만큼 멜로의 비중이 컸다. 정우성은 이 영화를 위해 오토바이를 처음 배웠다. 긴 팔다리로 화면을 가르는 그의 모습은 이후 많은 영화에 영감을 준다.

비트, 1997

<영웅본색>(1987) 이후 10년 만에 ‘남자 영화’의 이상을 갈아치운 희대의 걸작. 가난하고 순수한 아웃사이더, 그를 나쁜 길로 빠뜨리는 친구들, 그가 동경해마지않는 반짝이는 소녀, 그들에게 닥친 비극… 흔한 신파 같지만 홍콩 누아르 아류가 흔히 빠지던 과도한 멋 부림의 늪을 피해 새로운 지점에 안착한 영화다. 유오성의 건조한 카리스마, 임창정의 위트, X세대 하위문화에 대한 감각적 묘사, 정우성과 고소영의 화학작용으로 숱한 명장면이 탄생했다. 특히 정우성이 빠르게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두 팔을 펼쳐 바람을 맞는 장면은 한국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남았다.

태양은 없다, 1999

당대 최고 미남으로 꼽히던 정우성과 이정재가 ‘Love Potion No. 9’에 맞춰 껄렁대며 거리를 활보하는 예고편이 큰 화제를 모았다. 정우성은 펀치 드렁크로 복싱을 그만둔 조금은 허술한 청년, 이정재는 얍삽하고 허황된 기회주의자 캐릭터였다. 이들은 흥신소 심부름꾼으로 간간이 나쁜 짓도 하면서 도시 밑바닥을 떠돌지만 영화는 이들을 통해 청춘의 희망과 역동성을 제시한다.

유령, 1999

비밀리에 출항한 핵잠수함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정우성은 일본에 핵미사일을 쏘려는 부함장 최민수에 맞서 아시아의 평화를 지키려 한다. 봉준호, 장준환 감독이 각본에 참여했다. <크림슨 타이드>(1995)의 아류라거나 과도한 국수주의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한국의 지정학적 상황을 잘 녹여내서 흥미진진하다. 정우성은 휴머니즘을 간직한 약간 외골수인 군인으로 등장해 호전적이고 광기에 찬 최민수와 훌륭한 대비를 이룬다.

무사, 2001

<비트>, <태양은 없다>에 이어 김성수 감독과 함께한 작업. 한국 무협 영화의 신기원이 될 뻔했으나 개봉 나흘 후 뉴욕에서 9·11 테러가 터지는 바람에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아직도 이 영화를 능가하는 한국 무협이 없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간첩 누명을 쓰고 사막에 고립된 고려 무사들이 원의 기병들에게 납치된 명나라 공주를 발견한다. 무사들은 명분을 챙기고 고향에 돌아가려 공주를 구출하고 기병들과 싸움을 벌인다. 광활한 사막을 배경으로 긴 머리 휘날리며 칼을 휘두르는 정우성의 모습이 아름답다.

똥개, 2003

정우성이 획기적으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작품. ‘똥개’라 불릴 만큼 허름하고 낙천적인 시골 청년이 제 딴에 큰 사건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다. 곽경택 감독 특유의 안정된 연출과 유머 감각, 현대적 향토성이 빛을 발한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스타 같던 정우성이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계기가 되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2004

최근 정우성이 <SNL 코리아>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를 응용한 장면이 많았다. 그만큼 정우성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다. 작품을 못 본 세대도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 “나한테 잘해주지 마요. 난 다 까먹을 텐데” 같은 대사를 밈으로 알고 있을 정도다. ‘남성용 멜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작품으로, 조기 치매에 걸린 여자와 그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남자 얘기다. 정우성의 따뜻하고 건실한 이미지를 잘 활용한 영화다.

아수라, 2016

김성수 감독과의 네 번째 작품. 점점 폭력 수위가 높아지던 한국 영화계에 종결자처럼 등장해 최초로 영화 팬덤을 만들어낸 희대의 걸작이다. 경찰, 검찰, 조폭, 정치인 등 한국형 누아르의 단골 악당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몽땅 도륙해버리는 결말이 충격과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더 킹, 2017

정우성은 <감시자들>(2013)에서 처음 악역을 맡았지만 캐리커처 같은 역할이라 깊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더 킹>의 정치 검사 한강식은 그에게서 진정한 악당의 얼굴을 끌어내준 첫 배역이다. 그의 매끈한 외모는 흔한 부패 엘리트의 위험을 소름 끼치도록 부각하는 장치가 되었다. 작은 표정 변화로 조소와 비열함을 오가는 정우성의 원숙한 연기는 젊은 검사 역을 맡은 조인성의 거친 에너지와 적절한 균형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정장을 입고 위스키 마시는 모습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없다는 점에서 정우성의 중년을 환영하게 만들어준 작품이다.

강철비, 2017

북한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북한 1호가 남한으로 긴급히 내려오면서 펼쳐지는 첩보 액션 블록버스터다. 정우성은 <똥개>의 밀양 사투리에 이어 이번에는 평양 사투리를 실감 나게 구사한다. 정우성에게는 연민을 자극하는 순수함과 소박함이 있는데, 그것이 절박한 북한 군인 캐릭터에 잘 녹아들었다.

증인, 2019

정우성에게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남우 주연상, 청룡영화상 남우 주연상, 백상예술대상 영화 대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신념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려던 민변 출신 변호사가 살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인을 만나면서 변화하는 내용이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2014)의 이한 감독,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문지원 작가가 만든 감동 휴먼 드라마다. 난민 구호 활동이나 세월호 다큐 <그날, 바다>(2018) 내레이션 작업 등으로 생긴 ‘소신 있는 배우’ 이미지가 극 중 캐릭터를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어준다.

헌트, 2022

이정재는 자신의 감독 데뷔작을 통해 오랜 절친 정우성에게 멋진 선물을 안겨주었다.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을 소재로 안기부 요원들의 스파이 색출 작전을 긴박하게 그려냈다. 정우성의 캐릭터는 속을 알 수 없지만 신념이 느껴지는 인물로, 그동안 장르 영화에서 보여준 정우성의 연기를 집대성해놓은 듯하다. 이정재는 이 작품으로 청룡영화상 신인 감독상을 받았다.

보호자, 2023

정우성의 감독 데뷔작으로, 2020년 완성해 외국 영화제들에서 먼저 선보인 작품이다. 조직 보스 대신 10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주인공이 평범하게 살기로 결심하자 조직이 응징에 나선다는 내용이다. <존 윅>, <테이큰>처럼 은퇴한 암살자와 맹목적 폭력광의 대결을 그린 액션물이다. 자동차 추격전과 다양한 살인 도구가 등장한다. 국내 개봉일은 8월 15일이다.

사진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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