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이 부르고 김남길, 김준한, 박유나가 응답했다
감독으로 변신한 정우성과 그의 초대에 화답한 김남길, 김준한, 박유나. 서로 다른 의도와 목적으로 모인 네 사람이 일으키는 묘한 호흡.
정우성의 웃음론
모든 스태프가 하루 종일 태풍 경로를 민감하게 주시하던 화보 촬영일, 정우성은 스튜디오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치열한 라운드 인터뷰를 소화하고 조금 지친 기색으로 등장한 그는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물으며 웃었다. “영화가 좀 이상하죠?” 영화 <보호자>는 정우성의 30번째 필모그래피이자 감독 정우성의 첫 번째 장편영화다. 그는 좋은 타이밍이 맞물리며 메가폰을 잡게 됐다고 했다. “카리스마 있고 강한 이미지를 탈피해 따뜻하고 진실한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평을 받으며 제55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대상과 제40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해준 영화 <증인>(2019) 이후 선한 캐릭터를 연기했으니 이번에는 역동성이 큰 액션 영화를 해야겠다고 가늠하던 참이었다. “필요에 의해 받아 든 각본이었는데 엉겁결에 연출까지 맡게 됐죠(원래 감독을 맡기로 되어 있었던 신인 연출자가 직무를 고사하면서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가만 보면 제작자의 큰 그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군요.”
촬영 전날 언론 시사회에서 영화를 감상한 나는 반응을 궁금해하는 신인 감독에게 “평 범한 액션 영화는 아닌 것 같다. 묘한 소설을 읽는 것 같기도 했다”고 답했다. 액션 영화를 표방하지만 난데없이 마주한 희극적인 장면들이 떠올라서다. 정우성은 <보호자>에서 10년 만에 출소해 딸의 존재를 알게 된 뒤 평범하게 살고자 분투하는 주인공 ‘수혁’을 연기한다. 배우로서 그는 감독 정우성의 의도를 누구보다 충실히 이행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배우로 출연만 했다면 액션의 주체가 되려고 했을 거예요. 그러나 감독으로서 들었던 생각은 이 영화가 전형적인 액션만 앞세운 영화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거였어요. 자연스럽게 수혁의 딜레마를 더 파고들게 됐죠.”
딜레마와 아이러니. 삶이 그런 것들로 가득하다고 여기는 정우성은 엇갈리는 욕망을 가 진 사람들 틈에서 평범한 삶이 가장 위험한 꿈이 되는 아이러니에 집중했다. <보호자>는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희극이 보이기도 하는 영화다. “이야기는 아무도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요. 열등감에 시달려 2인조 킬러 ‘우진(김남길)’과 ‘진아(박유나)’에게 수혁을 죽여달라고 의뢰하는 조직의 2인자 ‘성준(김준한)’을 보세요. 마지막에는 다들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해요. 그런 아이러니가 재미있죠. 인생이 그런 순간의 연속이잖아요.”
단조로운 스토리를 제멋대로 비트는 것은 캐릭터들이다. 전형적이지 않은 호흡을 지닌 김남길과 김준한, 박유나는 그런 점에서 이상적인 배우들이었다. 김준한은 평소 인상 깊게 보던 배우다. “일본인 판사를 연기한 <박열>(2017)도 참 재미있게 봤고, 함께 출연 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2020)에서 정말 악독한 남편으로 변신한 모습도 인상 깊게 봤어요. 정말 고민이 많은 친구예요. 그런데 그게 건강해 보였어요.” 오디션을 통해 합류한 배우 박유나는 그에게 진아 그 자체로 보였다. “실제로 말투가 그렇게 무뚝뚝해요. 본인은 굉장히 상냥하게 얘기한다고 생각할 텐데 타고나길 무관심하죠. 우진이를 살갑게 대하는 건지 아닌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그 퉁명스러움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천진난만함과 잔혹함이 공존하는 우진은 설득력 있게 표현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수혁과 가장 가까이에서 대립하는 인물로서 믿음이 가는 배우를 물색한 끝에 김남길을 낙점했다. “도전에 대한 걱정도 있었을 텐데 저를 믿고 함께해줘서 고마웠죠. ‘우성 정 앞에서 내가 늘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거지?’ 하더니 촬영장에 나타났어요(웃음).”
자신을 믿어준 배우들과 함께 교류한 현장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제가 워낙 현장을 즐기는 사람이라 상대도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있거든요. 장난도 많이 쳐요.” 정우성은 현장을 사랑한다. 메이킹 영상 속에서 그는 항상 한결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 웃음을 짓 거나 유발하거나. 주인공이 되어 극을 이끌고, 누군가는 우러러보는 선배의 입장에 자주 놓이면서 자연스럽게 현장 분위기를 결정짓는 중추적 역할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연기를 하든, 밥을 먹든, 대기를 하든, 스태프들이 다 보고 있잖아요. 주인공이 현장을 즐기는 모습이 스태프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은 거죠. 그렇다고 그걸 의식해서 무리하진 않아요. 그냥 현장을 놀이터라고 생각하는 거죠.” 우연한 기회에 모델이 되고, 첫 영화 <구미호>(1994)에서부터 주인공으로 활약하며 화려하게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눈앞에 펼쳐진 모든 순간이 정우성에게는 한결같이 소중했다.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운이 좋아서 주인공이 됐어요. 얼마나 고마운 현장이에요.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제 역할에 충실히 임하는 현장을 보고 있으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함께 만들어가는 일의 희열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감독으로서 명확한 지침을 건네는 상황에서도 귀는 활짝 열어두었다. 김남길과 김준한, 박유나는 <보호자>를 촬영하며 정우성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어땠니?’라고 증언했다. 소통에 대한 그의 지론은 명쾌하다. “배우들의 의견을 묻는 일은 중요해요. 내가 ‘오케이’ 사인을 내린 방금 전 연기가 그 배우에겐 편했는지 혹은 불편했는지 들어야죠. 만약 어딘가 개운치 않다면 그 연기가 그 배우가 지닌 연기론과 충돌했기 때문인지 궁금하고요. 그런 심리적 부담감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계속 촬영이 이어졌을 때 그 캐릭터가 과연 생동감이 넘칠 수 있을까, 항상 되물어요. 감독과 배우가 규정한 캐릭터가 다를 수 있어요. 그걸 극복하고 모든 상황이 자연스러워지려면 서로 잘 파악해야 해요. 그런 소통을 통해 새롭게 획득되는 순간들이 연출의 묘미인 것 같습니다.”
정우성의 열의는 영화 자체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영화는 그에게 꿈이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제도권 바깥에서 성장한 그는 영화를 보며 세상을 배웠고, 꿈을 키웠다. “다른 집보다 늦게 집에 TV가 생겼는데 <토요 명화>와 <주말의 명화>를 정말 좋아했어요. 문제는 어린아이한테 밤 9시는 굉장히 늦은 시간이라는 건데… 졸음을 기를 쓰고 참아가면서 기다렸는데 시작 직전에 자꾸 까무룩 잠들어버리는 거예요. 다음 날 깜짝 놀라서 깨면 너무 억울한 거야. 그만큼 그 시간이 소중했어요.” 정우성은 그 소년의 마음을 여전히 품고 있다. “그때 봤던 <내 이름은 튜니티>(1979)는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있는 영화예요. 장르가 스파게티 웨스턴이거든요. 서부극, 히어로물이죠. 한 악당이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마을에 홀연히 등장한 외로운 총잡이가 악당을 물리치고 떠나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실은 이 영화가 코미디였거든요? 튜니티라는 캐릭터가 되게 우스웠죠.” 그는 영화 <보호자> 이전에 일찍이 단편영화 <킬러 앞에 노인>(2014)이라는 우스꽝스러운 킬러 이야기를 연출한 적 있다. “킬러가 죽여야 할 대상이 다 죽어가는 노인이라는 설정이었어요. 멋있는 코트를 빼입은 킬러가 노인을 뒤따르는데 노인이 너무 늦게 걸어가는 거예요. 웃기지 않나요?” 그의 첫 연출은 그로부터도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대 초, god의 뮤직비디오를 무려 네 편이나 연출한 것이다. “당시 제 매니저가 god도 기획했는데 제가 촬영에 관심이 있는 것 같으니까 제안을 한 거죠. 8mm짜리 소니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영상도 찍고, 그걸 직접 편집해서 만든 영상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고 그랬어요. ‘그대 날 떠난 후로’ 뮤직비디오는 어디에서 상도 준다고 했는데 사정상 시상식에 참석 못한다고 하니까 상을 안 주더라고요. 그러고 난 후에 뮤직비디오 세 편을 더 찍은 거예요.”
정우성의 삶은 곧 영화다. 반항적인 눈빛으로 사람들을 매혹하던 청춘스타였을 때부터 스투시와 아워레가시의 콜라보레이션 셔츠를 헐렁하게 걸치고 팔을 걷어붙인 채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한 번도 영화를 놓은 적이 없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제외하고는 최근에 나온 영화는 다 봤다는 정우성은 평소 어떻게 휴식을 즐기냐는 질문에 처음으로 머뭇거렸다. “어떤 캐릭터에 푹 빠져 지내면서 쌓인 피로를 다음에 만나는 캐릭터에 골몰하며 치유받곤 했어요. 쉬는 날 오랜만에 친구들과 나가서 저녁 한 끼 제대로 먹으려고 해도 도대체 어느 식당을 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최근 몇 년 동안 너무 쉼 없이 달려오다 보니 요즘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긴 해서 지금 촬영 중인 드라마가 끝나면 한 3박 4일 정도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생각 중이에요. 일주일은 영 긴 것 같고…”
정우성은 꾸준하고 성실하게 작품으로 대중의 곁을 지켰다. 틈틈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따뜻하고 진중한 성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 정우성을 빛나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정우성의 명성은 내 것이 아니다”라며 딱 잘라 말하는 그는 스스로를 잘 내려놓는 편이기도 하다. 절친 이정재와 함께 만든 <헌트>(2022) 홍보 활동의 일환으로 온갖 예능을 스스럼없이 누볐을 때 그는 기꺼이 사람들의 웃음을 샀다. <보호자> 개봉을 앞두고 최근 <SNL>에 출연해 보여준 뜨거운 열심은 ‘아예 제대로 코미디 한번 찍어달라’는 댓글의 공감 수를 들끓게 했다. “웃음은 중요하죠. 쓸데없이 중요해요. 요즘 세상이 많이 경직돼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웃음기가 너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어설픈 위트가 나오면 썰렁해지는 분위기도 문제죠. 실없는 농담이 얼마나 소중한데요. ‘빵빵’ 터뜨리는 사람들만 웃길 자격을 얻는다면 그것도 되게 웃긴 상황이지 않나요? 어, 이 이야기도 한번 영화로 만들어볼 수 있겠는데.” <보호자>가 과연 손익분기점을 넘길 것인가로 남몰래 속앓이를 하고 있다면서도 그는 이미 <보호자> 너머를 그리고 있었다. “연출은 언젠가는 할 거라고 여기던 일이에요. 겁 없이 도전하는 게 사람들이 말하는 ‘정우성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이 영화가 정우성스럽다고들 하니까요.” –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김남길의 비틀기
김남길의 웃음소리를 여기에 또박또박 옮겨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만 정감 있고 천진한 그에 대해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흐흐흐’와 ‘하하하’의 중간쯤 되는 그 소리가 그지없이 달착지근하며 유쾌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오늘 촬영은 즐겁지 않았어요. 우성이 형 옆에 서서 찍는 게 얼마나 부담인데, 흐흐.” 물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촬영장 어디선가 웃음이 빵빵 터지면 김남길이 그곳에 있었다. 듣던 대로였다. 검색창에 그의 이름과 분위기 메이커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동료 배우들의 증언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영화 <보호자>에서 킬러와 폭탄 전문가로 파트너를 이룬 박유나와의 투 샷은 김남길의 표현대로 ‘로켓단’의 실사 버전 같았다. <포켓몬스터>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악당 말이다. 개인적으로 꼽는 <보그> 화보 촬영 하이라이트 장면의 주인공도 김남길이었다. 슬리브리스 톱에 스커트를 매치하고 두툼한 플랫폼의 힐을 신은 채 런웨이에서 행진하듯 카메라 앞으로 또박또박 걸어 나왔을 때, 김남길은 블랙홀처럼 그곳의 모든 시선을 흡수했다
“촬영하면서 오늘 입은 옷이 이번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감하고 시크한 옷을 입었지만 헤어스타일은 장난스러워 보이는 게 우진과 꽤 닮았어요.” <보호자>에서 김남길의 얼굴이 주되게 길어 나르는 표정은 천진함과 잔혹함이다. 그가 맡은 우진은 ‘킬러는 이렇다’는 뻔한 편견에 편입되지 않은 반가운 캐릭터다. 일 처리는 프로페셔널하지만 아이 같은 엉뚱함과 정신없는 말투가 툭툭 튀어나오는 그는 냉혹한 세계의 핏빛 생존 게임에서 뜻밖의 기층을 만들어낸다. “우진은 어릴 때의 기억에 머무르고 성장을 하지 못해 사회적 결핍을 갖고 있는 인물이에요. 극 중 자신이 키우는 동물에 애정을 보이는데요. 그가 트라우마 안에서 오랫동안 위로를 받고 소통해온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지 않았을까, 거기서부터 다르게 접근한 것 같아요.”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로 김남길과 친분을 다진 국내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교수는 영화를 본 뒤 그에게 우진에 대해 이렇게 딱 잘라 말했다. “새로운 스타일인데 참 골때린다.”
영화 속을 제멋대로 활보하는 우진은 매 순간 온몸으로 김남길이 좋은 배우임을 증명한다. 난데없이 개 소리를 내는가 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아이처럼 칭얼거린다. 나비를 쫓는 고양이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우진의 본능적인 텐션은 자칫 유치하거나 이상하다는 감응을 부추길 수 있지만 다행히 김남길의 행동과 말투에서 잘 조절된 강약이 느껴졌다. “저는 스스로 납득이 되어야 자연스러운 연기가 가능해요. 그러기 위해서 제 안의 어떤 익숙한 부분을 가지고 캐릭터를 확장해나가는 편이죠. 우진의 경우는 평소 우성이 형한테 하는 저의 애티튜드를 가져와서 투영했어요. 그렇지만 완성된 모습만 보면 ‘딱 나네’라고 느껴지는 부분은 거의 없어요. 하이 톤의 목소리 정도만 비슷하지,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캐릭터니까요.” 그의 연기론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누구나 쉽게 이행하지는 못할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런 측면에서 김남길은 자신의 경쟁력을 이번
에도 입증해냈다. 내가 보기엔 새로운 캐릭터를 개척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알려진 대로 김남길은 정우성과 이정재의 첫 장편 연출작에 연달아 출연했다. 이정재의 <헌트>는 혼자서도 영화 한 편을 통째로 이끌어가는 배우들이 특별 출연해 개봉 당시 화제가 됐는데 김남길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가까이서 배우들의 직무 영역 확장을 지켜본 그에게 연출 도전 가능성에 대해 묻는 건 형식적 질문이 결코 아니다. 김남길이 공공 예술 캠페인 활동을 벌이고 창작가들을 후원하는 등 선한 영향력을 나누는 비영리단체 ‘길스토리’의 대표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선두에 서서 뭔가를 만들고 세상과 그걸 나누는 창작자로서 다져온 본능과 감각이 <보호자>, <헌트>의 자장 안에서 자극받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다. “예전에 브랜드 필름의 일환으로 우성이 형과 함께 단편영화를 연출한 적이 있어요. 그때 연출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럼에도 배우가 연출, 제작을 하는 건 긍정적이라고 봐요. 다른 입장이 되어보면 영화, 드라마를 만드는 일에 전보다 더 큰 책임감을 가질 수 있으니까. 길스토리 활동은 이것과는 좀 달라요. 오랫동안 배우 일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제 작품과 캐릭터를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존재하기 때문인데요. 그렇게 받은 사랑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게 있어요. 길스토리는 여기에 제가 몸담은 문화 예술과 좋은 일을 하고 싶은 관심사를 접목한 거죠.”
짐작건대 만약 김남길의 연출 도전 소식이 들려온다면 인간 군상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아닐까. 사람이라는 단어를 어떤 결심인 양 진중하게 대하는 그의 태도 앞에서 얻은 예감이다. “다양한 사람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어떤 장르와 역할이든 웬만하면 그런 부분을 좀 표현하려고 해요. 특별한 계기가 있기보다는, 사회적 존재인 우리의 먹고사는 것과 직결되는 이슈잖아요. 언젠가부터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떻게 해야 그들과 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지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됐어요. 보편적 이야기라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거예요.” 타인의 삶을 체득하기에 앞서 공감하는 능력이 배우의 본질이라면 김남길은 그 경지에 이미 가 있다. 사람보다 김남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없다. 그가 ‘천직’이라 받아들이기까지 배우 일의 괴로움, 힘듦을 단단히 견딜 수 있었던 버팀목도, 배우로서 사는 즐거움도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다’는 관찰 결과로 귀결된다. 그 비결을 궁금해하자 그가 너스레를 떨며 얘기했다. “돌이켜보면 좋은 사람만 만난 건 아니었어요. 사람으로 인한 상처도 많이 받았죠. 그럼에도 사람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저부터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니까 좋은 사람이 주변에 모이기 시작했죠.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언제나 모범 답안 같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시야와 생각이 점점 넓어지고 깊어졌죠.” 누군가를 만나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일이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는 걸 그를 통해 실감한다.
이날 김남길은 <보호자> 속 캐릭터의 분위기와 태도와 표정을 카메라 앞에서 다시 훨훨 끄집어냈다. 촬영이 다 끝나고 인터뷰를 위해 메이크업을 싹 지운 얼굴로 마주한 김남길은 헐겁고 태평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작품마다 새 사람인 척 안면을 바꾼다는 점에서 배우만큼 무섭도록 창조적인 얼굴이 또 있을까. 문득 셀프 포트레이트를 찍는다면 그가 순수하게 어떤 얼굴을 남기고 싶은지 궁금했다. “그렇게 남긴 제 모습에는 어떤 소망, 바람도 같이 담긴다고 여기거든요. 지금도 충분히, 굉장히 행복하긴 한데 좀 더 활짝 웃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마 박장대소하는 모습으로 찍지 않을까요? 하하.” 말은 그렇게 하지만 김남길은 작은 것에도 곧잘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그는 집밥을 먹던 중에 문득 따뜻한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게 행복한 일임을 느꼈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어찌나 야무지게 밥알을 음미하며 먹었는지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이제 나이 드니까 쌀밥이 맛있니?”라고 하셨단다. 드라마나 영화로는 알 수 없는 김남길의 사람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오랫동안 알아온 것 같은 얼굴의 김남길은 사실 이렇게 산다. – 김영재, 프리랜스 에디터
김준한의 절대적 시간
밴드 드러머가 10년도 더 지난 후 눈빛 하나로도 서슬 퍼런 감정을 만들어내는 배우가 되었다는 건 그야말로 영화 같은 이야기다. 2005년 밴드 ‘이지(izi)’의 멤버로 데뷔해 ‘응급실’이라는 히트곡을 터뜨리고 일본 활동도 섭렵한 김준한은 지금 정우성에 관해 이야기 중이다. 영화 <보호자>의 감독과 주연배우라는 각별한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이 함께 출연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 나온다. “그 안에서 선배님과 붙는 장면은 없었지만 좋게 봐주셨는지 뒤풀이에서 제 연락처를 물어보셨어요. 정우성이 내 연락처를? 왜? 주변에 한참 자랑했던 기억이 나요.” 이런 자랑거리라면 지금 그에게 수북할 것이다. 김준한은 정우성의 연출 데뷔작 <보호자>의 주연배우로 발탁됐고 영화가 초청된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 그와 동행했다. 방금 전까지는 스태프 무리에 둘러싸인 채 <비트>(1997)를 봤던 순간부터 오랫동안 동경해온 정우성과 나란히 화보를 촬영했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관객에게 흔히 만날 수 없는 장르로 다가올 듯한 <보호자>는 김준한에게 새로운 연기 경험을 덧대어준 작품이다. 그가 연기한 성준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는 극적인 쾌감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다. 깊은 내성으로 뭉친 듯한 주인공 수혁이 묵직하게 숨죽이는 쪽이라면 성준은 그 반대의 지점에 있다. 10년 만에 출소한 수혁이 눈앞에 나타나면서 조직 2인자인 그는 파국을 예고하는 방아쇠를 당기고야 만다. 이를 빌미 삼아 김준한은 매섭게 기화하는 드라이아이스처럼 이글거리는 감정의 오름세를 분출한다. “성준은 치달을수록 엉망이 되어가요. 그간 2인자로서 참아왔고, 인간으로서 지켰던 절제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동물처럼 원초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죠. 자기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하고요. 배우가 그런 지점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거든요. 쾌감 넘치는 경험이었어요.” <보호자>에는 조직 보스 몰래 수혁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들통난 성준이 피범벅이 된 얼굴로 격하게 울분을 토해내는 장면이 있다. 이건 기타 독주를 들이붓는 헤비메탈에 비유할 수 있겠는데, 김준한이 어떤 장르와 역할에서도 자신을 그 안에 녹여낼 수 있음을 알리는 포효다.
폭력과 배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를 찍으면서 그가 얻은 즐거움은 더 있다. 사람을 얻었다는 것. 영화 홍보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그는 정우성에게 감독님이라는 호칭을 주로 썼지만, 화보 촬영장에서 목격한 이들의 투 샷은 예의를 갖추되 그보다는 친밀함이 더 익숙한 사이처럼 보였다. 의자에 앉아 자신의 촬영 순서를 기다리는 정우성 옆에 김준한이 스스럼없이 자리를 깔고 뭔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딱 그러했다. “선배님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영화를 찍는 동안 합이 잘 맞았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정우성 선배님과 작품을 같이한다는 설렘과 선배님의 연출 데뷔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부담이 공존했어요. 그런 상태로 촬영에 들어갔는데 제 마음을 잘 알아주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걸러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하셨죠. 같이 고민했고, 아이디어도 많이 주고받았어요. 선배님은 정말 뇌가 두 개인 것 같았죠.” 그의 이 말에 경험 넘치는 코치가 기본기를 잘 갖춘 선수를 붙잡고 원 포인트 레슨을 하는 장면이 오버랩됐다. 짐작해보면 이런 밀도 높은 현장은 김준한의 운동장이 한층 넓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 안에서 메달 색깔과는 별개로 자신이 보유한 최고 기록을 경신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이유로 제 손을 떠나면 서둘러 빠져나오고 싶은 작품도 있고, 나중에 다시 봤을 때 왠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지는 작품도 있어요. <보호자>는 3년 전에 촬영했지만 진하게 남아 있어요. 연기적으로 강렬한 체험을 했고 찍으면서 많은 공부가 돼서 그런가 봐요. 말하고 보니 제가 연기한 성준이 아직 제 일부처럼 느껴져요. 썩 좋은 인물도 아닌데 말이죠(웃음).”
김준한은 “좀 더 열일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고 말했지만 조금씩 다른 캐릭터 와 장르를 경험했던 다양한 작품이 그의 존재감을 뒷받침한다. 드라마 <안나>에서 송곳 같은 날카로움을 지닌 야망의 남자를 연기한 그는 앞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지고지순한 짝사랑남으로 두루 호감을 얻었다. 이에 앞서서는 드라마 <봄밤>에서 자존심 때문에 헤어진 연인에게 질척이는 남자의 얼굴을 내비쳤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위안부 할머니들의 변론을 맡은 재일 교포 변호사를 연기한 영화 <허스토리>(2018)에서 인상적인 몇몇 장면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전에는 많은 사람이 김준한을 발견한 <박열>에서 박열을 심문하는 예심판사 다테마스 역을 맡아 눈도장을 찍으며 가능성과 직결됐다. 이 무렵 30대 중반이었던 그가 연기의 길에 그보다 일찍 들어섰다면 어땠을까? “음, 오히려 연기를 늦게 시작한 걸 행운이라 생각해요. 같은 소속사의 연극배우 형을 좇아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한 게 스물여덟 살 때인데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음악과 연기에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음악을 했던 시간이 지금 삶의 비교군이 된다는 점에서 그것 또한 굉장히 값지다고 생각해요.”
작품과 공존하며 시간의 두께를 더해온 김준한은 스스로를 ‘연바’라고 소개했다. 풀어 쓰자면, 연기밖에 모르는 바보. “<안나>의 이주영 감독님이 맨날 연기 얘기만 한다고 저를 그렇게 불러요. 아는 동생들도 연기 말고는 제가 허당이래요. 부정하지는 않아요. 연기를 빼면 저란 사람은 텅 비어 있을 것 같거든요.” 그를 난생처음 마주한 1시간 남짓의 인터뷰에서 김준한의 모든 것을 파악하긴 힘들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연바’가 맞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모여 종종 연기 연습을 하는데 진짜 재미있어요. 그게 아니면 한잔 기울이면서 연기에 관한 수다를 늘어놓는 것도 좋죠” “선배님들의 생활은 단순 명료한 것 같아요. 연기, 영화, 드라마 이 세 가지 안에만 머물면서 특별히 많은 걸 하지 않으세요” “연기를 할수록 정제되고 정형화되는 게 생기는데요. 상호 모순적이지만, 굳어가는 것을 잘 주물러서 순수한 상태로 되돌아가 연기를 하면 어떤 모습이 나올지 궁금해요” “요즘 육체적 연기에 관심이 생겼어요. 정우성 선배님이 ‘액션은 감정의 몸부림이다’라고 한 말이 크게 와닿았죠. 액션만 뜻하는 게 아니에요. 몸을 좀 더 자연스럽게 쓰는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한번 빠져든 세계가 어느새 얼마나 깊고 풍성해졌는지를, 연기만 있다면 어느 멀티버스에서도 외롭지 않을 것 같다고 고백한 김준한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평범한 어제를 들려주듯 얘기하는 그의 표정을 보면 일상 곳곳에 문신처럼 각인된 연기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운 것 같지는 않다. 부질없는 질투나 열등감 없이 자기 완성을 향해 시간을 들여 연마하고 재련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평범한 삶을, 그는 충분히 만끽하고 있다. “자기 인생에 ‘평범함’이라는 수식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본인뿐인 것 같아요. 저마다 상정하는 평범함의 모양이 다르잖아요. 행복도 마찬가지고요. 저에게 평범함은 일을 꾸준히 하는 거예요. 계속 일하면서 좋아하는 이들과 무언가 나누며 살고 싶어요. 그 일은 연기인 거고요. 아직 많이 어렵지만 의미 있다는 마음으로 재밌게 해보자, 스스로 그렇게 파이팅을 외쳐요.” – 김영재, 프리랜스 에디터
박유나의 차가운 열정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넘게 나는 선배 정우성은 박유나가 무심해서 좋다고 했다. 3년 전 <보호자> 첫 촬영을 하고 영화가 개봉할 때가 되어 오랜만에 다시 마주했을 때, 박유나는 정우성에게 “그땐 제가 좀 그랬죠. 이젠 많이 유연해졌습니다”라고 말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정우성은 이를 인정했다.) 눈길 가는 얼굴이었던 박유나가 낯설고 차가운 세계를 8년 동안이나 씩씩하게 헤쳐 나갈 수 있었던 비결은 단순하고 단단한 성정이 미친 영향이 크다. “고민을 잘 안 해요. 그냥 부딪쳐요.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해도 상황이 바뀌거나 제가 그 순간 조금 다른 행동을 하면 고민한 의미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의견도 어느 정도 걸러 듣는 편이에요. 거기에 맞추려 노력하다 보면 스트레스만 받고 제 매력은 되레 사라지는 것 같더라고요.” 차기작을 위해 민트색 뱅 헤어를 유지 중인 그가 특유의 저음으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박유나는 인터뷰 내내 거침없이 답변을 이어갔다. 어찌나 응답이 명쾌하고 재빠른지 할당된 인터뷰 시간의 절반이 지났을 때 이미 준비한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은 상태였다.
배우 박유나의 첫 커리어는 드라마 <발칙하게 고고>(2015)다. 어린 시절 예술가를 꿈꾸던 엄마의 적극적인 권유로 모델을 준비하다가 특기가 필요할 것 같아 춤을 배웠고, 그러다 무용을 전공한 한림연예예고 재학 시절, 아이돌이 되기 위해 2년간 연습생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거머쥔 기회였다. “춤을 출 줄 아니까 한번 해보라는 거예요. 치어리딩 하는 고등학생 역할이었거든요. 그땐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어색한 현장에서 멍때리고 있으면 아역 출신이었던 (강)민아가 와서 이것저것 많이 알려줬죠.” 추운 겨울, 밤샘 촬영을 하고 촬영장 근처 사우나에서 샤워만 하고 다시 촬영장으로 가는 비현실적인 나날이 이어졌지만 은근히 재미있었다. “그러다 드라마 <더 패키지>를 만나 연기에 본격적으로 재미를 붙였어요.” 첫 파트너이자 고마운 연기 스승인 류승수 배우를 비롯해 소중한 멘토를 많이 만난 <더 패키지>는 박유나가 가장 고마운 필모그래피로 꼽는 작품이다. “촬영 초반에 두 달 정도 파리 로케이션 촬영을 했어요. 그 후 한국으로 넘어와서 연기를 하는데 전창근 감독님이 그새 연기가 많이 늘었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 뭔가 확 와닿았어요.”
확고하게 갈 길을 정한 그 앞에 성장판을 자극하는 무대가 연달아 찾아왔다. 위대한 선 배들과 호흡을 주고받은 <SKY 캐슬>과 <호텔 델루나>는 특히 배움이 컸던 현장이다. “다들 절 많이 이끌어주셨어요. 꼭 뭔가를 알려주시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 배우는 것이 정말 많았죠.” 결과도 좋았다. 대범하게 부모를 속인 가짜 하버드생 ‘차세리’를 연기하며 얻은 호감과 신뢰감을 <호텔 델루나>에서 안정적인 일인이역 연기를 보여주며 단단히 붙잡았다. “<SKY 캐슬>에서 부녀 관계로 만난 김병철 선배님과 현관문 앞에서 막 싸우던 장면을 촬영했을 때가 아직도 기억나요. 촬영 직전까지 눈물이 정말 안 날 것 같았는데 막상 연기를 시작하니까 바로 눈물이 나더라고요. 제 부모님이었던 김병철, 윤세아 선배님이 주신 에너지를 고스란히 받은 거죠.”
자랑하고 싶은 또 다른 선배들을 얻은 영화 <보호자>는 박유나에게 첫 영화였다. (이후 촬영한 <화이트데이: 부서진 결계>(2021)와 <롱디>(2023)가 먼저 개봉하며 결국 <보호자>는 그의 세 번째 필모그래피가 됐다.) 박유나는 오디션을 거쳐 영화에 합류했다. “하필 라식 수술을 앞두고 있어서 안경을 쓰고 다닐 때였는데 오디션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그냥 편한 마음으로 갔다 오자는 생각으로 제작진을 만나러 갔는데 (정우성) 감독님이 계시더라고요. 사실 앞이 잘 안 보였는데 오히려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당당하게 임했거든요.” 사람들이 추앙하는 박유나의 매력은 걸 크러시다.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의 츤데레 과 대표, <너와 나의 경찰수업>의 악바리 ‘과탑’ 등 박유나의 강점을 대번에 알아본 제작진은 그를 적재적소에 기용하며 밉지 않은 당돌한 이미지를 선사해주었다. 대중은 심지어 ‘흑화’한 박유나에게도 반색했다. <여신강림>에서 교묘하게 주인공을 견제하는 인물을 연기할 때 오히려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진다며 반긴 것처럼. <보호자>의 진아가 뽐내는 걸 크러시는 다소 하드코어하다. 사제 폭탄 전문가인 진아는 파트너 우진을 제외한 모두에게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본에서 읽히는 진아는 굉장히 담백한 사람이었어요. 우진이 하이 톤이라서 그에 맞춰 대사 톤을 고민했는데 감독님이 ‘그냥 너답게 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뒤로 좀 편해졌어요. 말도 툭툭 내뱉고, 평상시 하던 행동도 하고, 실제 제 모습을 녹여서 진아를 만들어갔죠.” 2인조 킬러로 마주한 김남길과의 호흡은 가장 기대한 사건 중 하나였다. “김남길 선배님과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누가 마다하겠어요. 사실 낯을 좀 가리는 편인데 먼저 말도 많이 걸었어요. 남길 오빠는 다정하면서도 장난기가 넘쳐서 사람을 정말 편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죠. 덕분에 현장 분위기가 아주 좋았어요.” 영화 후반부에 잠깐 호흡을 맞춘 김준한 배우 역시 남다른 친화력으로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 영화로 얻은 건 인연이에요. 좋은 선배님과 스태프들을 만난 것만으로 수확이 대단하죠. 그래서 촬영 소감을 묻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 영화를 ‘선물 같다’고 표현한 거예요.”
그 역시 마음과 열의를 더했다.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장면을 위해 오토바이 면허도 땄다. “알고 보니 남자들도 열 명 중 일곱 명은 떨어지는 시험이래요. 전 한 번에 붙었거든요(웃음). 확실히 몸은 좀 잘 쓰는 것 같습니다.” 박유나는 현장에서 질문이 많다. 혼자 독방에 갇히는 것보다 경험 많은 이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해 결국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함을 아는 그는 똑똑하고 슬기롭다. 그런 점에서 미세한 신호를 감지하고 ‘솔직한 마음’을 묻는 감독 정우성은 최적의 멘토였다. “감독님은 정말 자상하세요. 뭔가 긴가민가해서 잠시만 머뭇거려도 금세 알아차리시고는 ‘진아야, 어땠어? 괜찮았어?’라고 물어보시죠.” 헤어 컬러부터 스모키 메이크업, 네일 아트, 타투 스티커까지 진아의 모든 면면을 세심하게 설계한 정우성 감독을 믿고 박유나는 새로운 외양을 제 옷을 입은 듯 매끄럽게 소화해냈다. “다음에는 정말 진지하게 스릴러를 찍어보고 싶어요. 형사도 꼭 현장에서 발로 뛰는 역할이어야 합니다(웃음).” 가장 인상 깊게 본 정우성의 필모그래피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을, 최근 재미있게 본 콘텐츠로 로맨스와 스릴러를 넘나드는 넷플릭스 시리즈 <너의 모든 것>을 꼽은 박유나는 이런 목표를 꿈꿀 수 있는 배우의 삶을 행복하게 여긴다. “연기를 통해 온갖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즐거워요. 음반도 내고(박유나는 싱어송라이터 역할로 등장한 영화 <롱디>의 OST를 직접 불렀다), 오토바이 면허도 따면서요. 긴장되기보다 설레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아요. 나이 드는 것도 기대돼요. 그에 맞는 새로운 삶이 주어질 테니까요.”
박유나는 낯선 삶을 살아보는 것이 즐겁다. 낯선 배경을 지닌 캐릭터와 일정 기간 한 몸이 되어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탐험하는 일이 행복하다. <보그> 화보 촬영 일, 박유나는 강렬한 프라다의 새빨간 레더 재킷과 스커트 셋업을 입고 카리스마 있는 패션모델로 변신했다. “어떤 기회가 주어질 때 결국 내 거니까 찾아온 거겠지, 라는 생각을 해요.” 모든 것이 좋은 징조다. 한결같이 차분한 얼굴에서 긴장되는 기색은 결코 찾을 수 없다. 긴장감에 미친 듯이 심장이 널뛸 때가 분명 있지만 티가 안 나는 것을 자신의 강점으로 꼽은 박유나는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모든 답변의 끄트머리마다 튀어나오는 ‘재밌다’는 말이 강력한 단서다. “원래 정말 ‘집순이’거든요. 게임 좋아하고, 방에서도 침대 밖으로는 잘 안 나가죠. 그런데 연기를 시작하고 나서 아주 부지런해졌어요. 한 번도 현장에 지각한 적이 없죠. 스케줄 하러 나갈 시간 되면 절로 눈이 떠져요. 현장 가는 게 설레고, 연기가 그저 재미있어요.” –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VK)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포토그래퍼
- 안주영
- 컨트리뷰팅 패션 에디터
- 이종현
- 스타일리스트
- 김혜정(정우성), 정길원(김남길), 장지연(김준한), 박희경(박유나)
- 헤어
- 임해경(정우성), 김태현(김남길), 엄정미(김준한), 이한별(박유나)
- 메이크업
- 배경란(정우성), 김하나(김남길), 전달래(김준한), 오윤희(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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