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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의 여자 친구들

2023.08.19

극동의 여자 친구들

기진맥진의 여름날. 몸이 제일 먼저 반응한다. 습기를 한껏 머금은 듯 축축 처지는 몸 여기저기에 피로의 기색이 역력하다. 참을성을 갖고 긴 호흡으로 뭔가에 집중하기가 좀처럼 어려운 날씨. 가볍게, 부담스럽지 않게, 무리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작은 움직임을 시도한다. 해가 넘어간 뒤를 틈타 천천히 동네 산책을 하고 돌아와 짧은 소설을 읽는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판형에 금세 읽을 수 있을 만큼의 딱 알맞은 분량. 박솔뫼의 <극동의 여자 친구들>(위즈덤하우스, 2023)로 밤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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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내용에 앞서 소설이 끝난 뒤 짧게 붙인 ‘작가의 말’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본 것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가의 말은 어떤 과정으로 <극동의 여자 친구들>을 쓰게 됐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소설의 전사다. 을지로 일대 중부시장이 책의 주요한 무대가 된 이유를 알 수 있기도 하다. 2019년 작가는 단편 <수영하는 사람>을 쓰기 위해 동대문 근처의 비즈니스호텔에 묵었고, 글을 쓰다 지치면 주변을 걷기 시작했고, 걷는 게 좋아서 멈추지 못하고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고, 중부시장을 발견해 함흥냉면과 도넛을 맛있게 먹었고, 그곳의 오래된 건물을 지나치면서 이상한 호기심과 설렘을 느끼게 되었고, 그 후로도 종종 을지로 주변을 찾아 걸었고, 많이 갈 때는 일주일에 서너 번도 갔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극동의 여자 친구들>은 그때, 그곳에서, 걸으면서 ‘본 것들’로부터 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본 것들’을 다르게 생각하면서 시작된 이야기이고 그것은 일종의 낯선 ‘얼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때의 얼굴들이란 거리와 시장에서 스치고 지나간 낯선 이들의 얼굴들이기도 하지만, 작가 자신을 포함해 작가가 안다고 생각했던 얼굴들의 다르고 새로운 출현이다.

박솔뫼 ‘극동의 여자 친구들'(위즈덤하우스, 2023)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홀로 천천히 을지로 인근을 걸을 때 중부시장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뒤를 돌아볼 때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내 얼굴은 당신이 알던 얼굴과 다른 얼굴일 텐데요. 혹은 그때 우연히 나를 지나간 사람들은 나를 내가 파악하고 있고 내가 규정하고 있는 나와는 아주 다른 사람인 것처럼 묘사할지도 모른다. 그런 얼굴들과 모습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여러 표정과 아무렇지 않게 다른 게 있었다고 건네는 여러 장면이 종종 나를 움켜쥐는 것 같다. 손쉽고 그럴싸한 결론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장면들을 마주치면 뭔가 쓰고 싶어지는 것 같은데 중부시장 인근을 걸으며 그런 순간들을 자주 마주했다. 내게 다가오는 얼굴들과 그렇다면 동시에 나 역시 거리로 계절로 다가가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길과 사람의 표정들 순간들. 그렇게 다가오고 스쳐가고 뒤돌아보는 흐름과 공기.”(55~57쪽)

<극동의 여자 친구들>의 강주도 그렇게 만나게 된 얼굴 중 하나다. 2월 말의 어느 날, 강주는 간밤에 새로 시작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다음 날 오전 움직임 연구회 중부지구의 움직임 워크숍에 참여한다. 그곳을 알게 된 건 지난해 8월 말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건어물을 파는 중부시장 입구에서 친구 성민을 만났고,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작고 눈에 띄지 않는 디자인의 간판 ‘움직임 연구회 중부지구’. 한번 본 이후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그 이름이 2월의 끝자락 강주를 이끈다. 소설의 작가가 중부시장을 맴돌며 봤을 낯선 간판들과 얼굴들 속에 아마도 움직임 연구회 중부지부를 발견한 강주의 얼굴도 있었으리라. 강주는 그곳에서 연구회 회원 보훈과 움직임을 함께 해본다. 보훈이 강주의 등 뒤로 다가와 자신의 팔과 강주의 팔을 맞대고 서서히 움직인다. 평소에 그렇게 움직인 적이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다. “무척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어서 다른 사람의 몸이면서 다른 사람의 몸 같지 않았다.”(29쪽) 그 순간의 그 움직임은 낯설지만 자연스럽게 느껴져 집중한다. 그리고 강주는 이렇게 말한다. “움직임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그때까지 스스로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제가 이 주제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나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해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25~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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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이 아니더라도 강주는 계속 움직인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분주하게 손발을 놀리고, 시장을 걷고, 근처 벤치에 누워 주변의 진동을 느끼고, 일하며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자기소개를 하며 움직여 나간다. 그러다 한순간, 소설은 강주를 나라고 부르기로 한다. “하루 종일 강주는 제가 저는 아 그러니까 저는 제가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다니다 보니 몸에서 어느새 나는 나는 하고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로 자기 자신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내가 나는 나를이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해야지. 그게 자기소개를 지나치게 많이 한 주에 강주가 아니 내가 내린 결론이다.”(39~40쪽) 낯선 얼굴의 강주가, 강주의 움직임이 홀연히 내가, 나의 움직임이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소설은 또다시 화자를 바꾼다. <극동의 여자 친구들>의 목소리는 여럿이고, <극동의 여자 친구들>은 그 목소리의 전환과 이동처럼 계속 움직인다. 소설 전체가 어딘가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기보다는 자처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유동하는 듯하달까. 그 감각이 한껏 낯설고 묘하게 스릴 있다. 잘 안다고 생각한 얼굴이 돌연 낯설게 다가올 때처럼, 혹은 내게도 이런 얼굴이 있었나 스스로가 놀랄 때처럼. 짧지만, 좀처럼 잊히지 않는 소설이 어느새 내 곁에 성큼 다가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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