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선은 언제나 새로운 전설이다
김완선의 모든 시도는 최초로 기록된다. 한국 댄스음악의 선구자, 한류의 개척자, 디바, 아이콘, 영원한 댄싱 퀸. 37년이 흘렀지만 김완선은 여전히 건재하다.
1986년 김완선의 데뷔 무대. ‘오늘밤’이 첫 전파를 탄 다음 날 신문에는 대문짝만하게 그녀의 사진을 담은 기사가 실렸다. “방방 뛴 출현, 비디오 시대를 열었습니다!” KBS 음악 방송에서 그해 ‘6월의 신인’으로 소개된 김완선은 웨딩드레스를 연상시키는 짧은 원피스에 흰 운동화를 신고 그야말로 무대 위를 방방 뛰어다녔다. “그건 랑유 김정아 선생님의 옷이었어요. 화면보다 실제로 보는 게 더 고급스럽고 예뻤죠.” 전 국민의 유일한 오락거리가 텔레비전이었던 시절, 김완선의 등장은 본격적인 컬러 시대의 시작이었고 정신없을 정도로 모든 게 화려하고 과장된 1980년대 특유의 분위기에 정점을 찍었다. 1세대 아이돌이자 1세대 패셔니스타. 댄스음악의 선구자, 한류의 개척자, 디바, 아이콘, 영원한 댄싱 퀸. 37년이 흘렀지만 김완선은 여전히 현역이다. 지난 8월 10일, Mnet <엠카운트다운(‘엠카’)>에서 김완선은 신곡 ‘Last Kiss’를 공개했다. 이 무대에서 그녀는 데뷔할 때처럼 하얀 미니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며 라이브로 노래했다.
“‘엠카’ 무대에 선 55세 여자 댄스 가수를 본 적 있나요? 이건 정말 기록에 남을 만한 일이에요.” 웃음기 섞인 김완선의 목소리는 나른하면서도 맑고 온화하다. 발랄하고 경쾌한 디스코 팝 장르의 ‘Last Kiss’는 tvN <댄스가수 유랑단(‘유랑단’)>의 신곡 프로젝트로 방송 마지막 회에 공개됐다. K-팝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대중에게도 인지도 높은 안무가 최영준과 작곡가 이현승이 참여한 곡이다. “굉장히 귀여워요. 지금까지 제 음악이 비트가 강하고 무거운 느낌이 있었다면 이건 복고적이지만 분위기가 전혀 달라요. 친숙하면서도 따라 부르기 쉬운 편안한 스타일이죠.” 김완선을 비롯 엄정화, 이효리, 보아, 화사 등 당대의 톱스타들이 춤바람 관광버스를 타고 전국을 떠돌며 합동 공연을 펼치는 ‘유랑단’은 제작 단계부터 화제였다. 이 방송은 신곡뿐 아니라 과거 그녀의 히트곡을 복기함으로써 가수로서 김완선을 재조명했다. 여성 아티스트의 연대를 다룬 이 프로그램이 각 세대를 대표하는 여성 솔로 가수의 선두로 김완선을 초대했다면 여기서 김완선이라는 한 시대의 아이콘을 현재 진행형의 스타로 부각시킨 건 그녀 자신이다.
“유랑이 끝났다는 게 이제야 좀 실감이 난다”는 그녀가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로 꼽은 건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가진 첫 번째 공연이다. “서로의 무대를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아무래도 특별하죠. 모두가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그녀가 선택한 첫 곡은 ‘리듬 속의 그 춤을’이었다. 한국 록 음악의 대부 신중현이 작사·작곡한 이 곡은 당시만 해도 생소하던 컴퓨터 음악을 사용했다. 신중현은 김완선의 무대를 직접 본 후 그 느낌을 담고자 386 컴퓨터를 배워 곡을 만들었고, 그의 아들인 시나위 리더 신대철이 기타를 연주했다. 댄스음악이라는 용어도 없던 시절 “율동을 곁들인 무대”와 같은 어색한 표현으로 소개된 데뷔곡 ‘오늘밤’에 얼떨떨한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2집 ‘리듬 속의 그 춤을’에 이르러서야 김완선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적응한다. “댄스 가수로서 입지를 완전히 다질 수 있었던 곡이죠. 첫 곡으로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노래 가사처럼 현대 음률 속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관능적인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그녀에게 대중은 차츰 열광하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 나이와 여성에 대한 편견이 팽배하던 1980년대에 김완선은 그렇게 정면 돌파를 택했다.
“현대 음률 속에서 순간 속에 보이는 너의 새로운 춤에 마음을 뺏긴다오. 아름다운 불빛에 신비한 너의 눈은 잃지 않는 매력에 마음을 뺏긴다오.”
— 리듬 속의 그 춤을(1987)
알려진 것처럼 김완선은 친이모이자 인순이의 매니저였던 故 한백희 씨에게 발탁되어 오늘날 연습생 시스템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전문교육을 받았다. 마포 공덕동의 연습실에는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안무가이자 국내 1세대 스트리트 댄스 팀 ‘스파크’의 리더였던 이성문을 포함해 장안의 춤꾼들이 모여들었다. 김완선은 그들에게 춤을 배우며 중학생이던 1983년부터 리듬터치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가수 데뷔를 준비했다. 그녀는 타고난 엔터테이너이기도 하다. 외증조부는 무용가 최승희의 스승이기도 한 한국 전통 무악의 거장 한성준(1874~1941) 명장. 그리고 88 올림픽 살풀이춤으로 유명한 한영숙이 그녀의 당이모다. 여기에 체계적인 관리와 피나는 노력을 더한 김완선의 성공은 처음부터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첫 방송은 KBS <연예가중계>였어요. 1986년 1월이었죠. 그걸 보고 ‘토토즐’(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연락이 와 두 번인가 야외 녹화방송을 했고요. ”열일곱 살에 일약 스타로 떠오른 김완선은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인기 있는 잡지의 표지 모델은 언제나 김완선이었다. “맞아요. 그런 거 되게 많이 했죠. 오전에는 잡지 사진 촬영을 하고, 끝나면 방송국 가서 방송하고, 밤에는 또 무대에서 노래하고. 쉴 시간이 없었어요.” 방송에서 종종 말해온 것처럼 ‘가장 빛났지만 잊고 싶은 기억’이기도 했다는 그때. 김완선은 온전히 자신의 뜻으로 완성한 2005년 앨범 <Return Seventeen>에서 당시의 마음을 담담하게 노래하기도 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화보 촬영장에 잔뜩 쌓인 옷을 보면서 우리는 즐겁게 그 시절의 패션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스타일리스트라는 말도 없었죠. 해외 브랜드가 수입되기 전이라 동대문 시장에서 옷을 여러 벌 사다 그걸 믹스 매치하는 식이었어요. 그리고 한국 디자이너의 옷을 많이 입었죠.” 김완선의 데뷔 무대의상이었던 랑유는 미스코리아 대회 드레스로 이미 꽤 유명했다. “신장경 선생님 옷도 좋아했어요. 이대 앞에서 처음 의상실을 열 때 같이 작업했는데 저한테 잘 맞았어요. 미니멀한 스타일에 아주 예뻤죠. ‘팩스뮤지카'(1987)에서도 그분의 옷을 입었어요.” 팩스뮤지카는 동아시아 뮤지션들이 음악을 통해 화합을 도모하던 1980~1990년대 가장 큰 국제 문화 행사였다. 오프닝 무대에 오른 김완선은 슬리브리스 드레스에 흰색 스타킹, 운동화를 매치하고, 리본이 달린 레이스 장갑과 꽃 장식 헤어밴드를 착용했다. 현란한 춤을 추다 헤어밴드를 벗어 던지는 퍼포먼스는 지금 봐도 멋지다. 커다란 리본으로 묶은 부스스한 파마머리는 김완선의 트레이드마크. “원래 곱슬머리인데 춤을 출 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게 싫어 항상 머리를 묶었어요. 화장도 거의 제가 했죠. 진한 화장이 유행할 때라 미용실에서 해주는 건 저와는 별로 안 어울리더라고요.”
김완선의 헤어스타일, 그녀가 착용한 옷과 액세서리는 금세 유행이 됐다. 반면 그녀의 음악적 성취는 종종 이로 인해 폄하되어왔다. 오디오형 가수, 비디오형 가수라는 말이 있던 당시의 풍토에서 김완선의 트렌디한 패션과 세련된 퍼포먼스는 기존 가수의 그것과 달랐고, 음악성과 외적 스타일은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편협한 판단이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히려 김완선의 음악은 시대를 앞서갔다. 이를 증명하는 건 시간이다. ‘유랑단’에서 그녀가 부른 곡 대부분은 지금의 한국 대중음악사를 논할 때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앞서 언급한 ‘리듬 속의 그 춤을’을 작사·작곡한 신중현, 1집의 전곡을 만든 산울림의 김창훈, 김완선을 통해 랩을 비롯해 여러 파격적인 시도를 행한 이장희 등 참여 뮤지션들의 이름만 봐도 무게가 느껴진다. ‘기분 좋은 날’ ‘이젠 잊기로 해요’가 수록된 4집 앨범에서는 백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손무현이 기타, 윤상이 베이스를 맡았다. 특히 손무현이 작곡과 프로듀싱을 맡은 5집은 ‘나만의 것’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가장무도회’가 연이어 히트하며 여자 솔로 가수 최초의 밀리언셀러 앨범으로 기록됐다. 이 앨범은 LP뿐 아니라 국내 최초로 CD로도 발매되었다.
“정말 질릴 만큼 듣고 노래한 곡들인데도 이번에 편곡해서 다시 들으니 너무 좋은 거예요. 특히 ‘나만의 것’은 와…! 진짜 좋은 노래라는 걸 다시금 알게 됐죠.” 김완선은 ‘당신을 위한 노래’를 주제로 한 공연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초청했다. “우리 엄마는 지금도 제가 높은 음 부르는 걸 잘 못 봐요. 혹시 음이 틀릴까 봐. 불안해서… 하하. 그래서 듣기에 좀 편한 곡을 해야겠다 싶었죠. ‘나만의 것’은 제가 처음으로 음악 방송에서 1등을 한 곡이기도 하고요. 그 전에는 한 번도 1등을 못했어요. 사람들이 저를 가수로 인정해준 곡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아무리 잘 만든 곡이라도 이를 명곡으로 완성하는 건 가수의 몫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김완선이 얼마나 매력적인 음색을 지닌 가수인지 새삼 느끼게 한다. 우렁찬 발성이나 간드러진 창법만 최고의 가창력으로 인정받던 과거와는 다르다. “옛날에는 기교가 많아야 좀 가수 같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그때 전 10대였고, 바이브레이션 같은 걸 극도로 싫어했죠. 요즘은 또 아무 기교 없이 부르는 걸 선호한다더군요. 그래서 ‘난 40년을 앞서갔다’고 농담 삼아 얘기하죠.” 그녀의 투명한 목소리와 쓸쓸한 감성은 잿빛 도시의 네온사인처럼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사진가 구본창이 앨범 재킷을 촬영한 6집 <애수>는 또 어떤가. ‘유랑단’의 선곡에서는 아쉽게 빠졌지만 김완선이 처음으로 작사에 참여한 이 앨범은 몽환적인 분위기의 음악과 사진 모두 기념비적 작품이다.
유랑이 계속되는 동안 전성기 그녀의 노래만큼 화제가 된 건 김완선이 부른 보아의 ‘Only One’이었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 전혀 기대를 안 했거든요. 컨디션도 안 좋았고 신발이 불편해서 계속 신경이 쓰였어요. 연습할 때는 백배 더 잘했는데 속상했죠. 반응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너무 좋아서 감사한 마음이에요. 제가 보아 노래 중 제일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고요.” 열세 살에 데뷔한 보아와 김완선은 공통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10대 때부터 춤으로 인정받았고 어린 나이에 데뷔한 탓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을 대신했다. “처음 텔레비전에서 보아를 봤을 때 깜짝 놀랐어요. 너무 어려서. 실제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인데 성격까지 둘이 너무 비슷한 거예요. ‘결이 같다’고 할까? 이렇게 안고 있으면 쌍둥이 자매 같은 느낌을 받아요.” 데뷔 직후 해외에 진출한 과정도 비슷하다. ‘아시아의 별’ 보아가 한류의 포문을 열었다면 김완선은 그보다 한참 앞서 일본과 대만, 홍콩 시장에 진출하며 한국 가수들이 국제 무대로 나아가는 초석을 마련했다. 당대의 홍콩 스타 알란 탐과 듀엣곡을 발표하기도 했고, 중국어 앨범을 내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94년 방영된 SBS <스타 다큐멘터리>는 1회 방송에서 당시 홍콩에 체류 중이던 김완선의 홍콩 생활을 조명했다. 게스트는 김완선의 팬이었던 고소영과 신인 그룹 룰라. 김완선의 모든 시도가 최초의 기록이다.
‘유랑단’의 활동이 끝난 요즘 김완선은 단독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예전엔 서른 살만 넘어도 댄스 가수로서는 끝이라고 했는데, 오래 버티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 20~30대 팬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그녀의 노래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녀의 무대 영상 댓글에는 요즘 한글보다 영어가 더 많다. “세상이 뒤바뀐 거죠. 저도 신기해요.” 김완선은 긴 여정을 함께한 멤버들에게 그 공을 돌린다. “엄정화, 이효리, 보아, 화사, 이분들의 덕을 제가 제일 많이 본 것 같아요. 덕분에 팬이 늘었어요.” 그녀는 겸손하게 말했지만 댄스 가수의 활동 연한이 지금과 같이 늘고 그 활동 범위가 한국을 넘어 전세계로 확장된 건 분명 그녀가 밟아온 무수한 ‘처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낯선 그 길을 홀로 걷는 일은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유랑단’ 멤버들이 짧은 만남에도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건 비슷한 경험과 고민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자세히 얘기하지 않아도 그 마음이 어땠을지 아니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재미있고 즐거웠죠. 연습할 때도 나 혼자만 하는 게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힘들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서로에서 좋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더 발전할 수 있었던 거고요. 저한테는 큰 전환점이 되었어요.” 김완선은 추억의 스타로 박제되는 대신 그 추억을 현재화했다. 댄스 가수 김완선은 ‘살아 있다’. 살아 움직인다는 건 계속 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녀는 20년 넘게 함께해온 댄스 팀과 호흡을 맞추며 꾸준히 신곡을 발표하고, 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보그>의 화보 촬영 중간에 김태호 PD는 김완선을 응원하기 위해 과일과 샐러드를 잔뜩 보내왔다. 그녀가 소탈하고 심플한 본연의 캐릭터를 가감 없이 드러내준 덕분에 방송은 더욱 진솔해졌다. 김완선의 솔직함은 화끈하고 직설적인 게 아니라 쿨하고 유머러스하다. 심심할 때면 그녀 역시 본인의 영상을 한 번씩 다시 보며 깔깔대고 웃는다. “이번에 보니 대학 축제는 에너지가 완전히 다르더군요. 공연이 끝나도 힘이 나요. 어릴 때는 잘 못 느끼고 살았는데 오히려 요즘 에너지를 더 많이 느껴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다 그런 에너지가 있구나.’ 그걸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요.” 무대 위에서 일방적으로 기운을 쏟아내던 과거와 달리 이제 그녀는 부드럽게 세상과 교감한다. ‘유랑단’이 결성된 계기가 된 웹예능 <서울체크인>에서 그녀는 기꺼이 댄스 가수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경기도 용인의 집에는 고양이 여섯 마리도 함께 살고 있다. 유기되거나 학대당하거나 몸이 아픈 고양이들을 그녀는 수년째 정성으로 돌본다. 방송에서 이효리는 김완선의 집에서 그녀가 그린 프리다 칼로의 초상화를 보며 거기에 적힌 문구와 같은 생각인지 물었다. “이 죽음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I hopethe exit is joyful, and I hope never to return).” 김완선의 뮤즈인 프리다 칼로는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지만 누구보다 생의 의지로 가득했다. 김완선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당연하다’고 답했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 즐겁게 산다.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즐기기 위해. 김완선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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