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짝지근해: 7510’ 배우 이상의 역할을 하는 유해진과 김희선
어떤 영화에서 배우는 연기자 이상의 역할을 갖는다. 배우가 보여주는 캐릭터만이 아니라, 그 배우가 이전에 연기한 또 다른 캐릭터, 그 배우의 인생이 함께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언맨> 시리즈의 토니 스타크는 그를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과거 약물중독에 빠진 역사 때문에 더 강렬한 캐릭터가 되었다. 정우성은 과거 <비트>에서 연기한 민 덕분에 드라마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와 영화 <아수라>의 관객에게 “그때의 민이 살아서 중년이 되었다면 어땠을까?”란 상상력을 발동시켰다. 영화 <달짝지근해: 7510(달짝지근해)>의 연출자와 제작자도 비슷한 의도로 유해진을 캐스팅했을 것이다. ‘X아치’처럼 보이는 외모와 연기로 주목받은 단역 배우가 수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는 스타로 성장한 역사는 <달짝지근해>에서 또 다른 상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달짝지근해>에서 유해진이 연기한 차치호는 어딘가 모자란 사람이다. 성격상 그런 게 아니고, 어떤 사건을 통해 평범하게 성장하지 못한 남자다. 제과 회사의 연구원인 그는 하루 대부분의 식사를 과자로만 하고, 그래서 몸이 성치 않은데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눈치도 없다. 그리고 외모는 유해진이다. 이런 남성 캐릭터가 사랑을 찾게 된다는 설정은 사실 새롭지 않다. 수많은 멜로 영화, 로맨틱 코미디가 비슷한 판타지를 제공했다. 멀리 돌아보자면 1991년 일본에서 크게 흥행한 후, 한국에서 영화와 드라마로도 리메이크된 <101번째 프러포즈>가 있고, 영화 <노팅 힐>을 벤치마킹한 황정민-김아중 주연의 드라마 <그저 바라보다가>도 있었다. 모두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저런 여자가 왜 저런 남자를 좋아해? 이때 남성 캐릭터는 우직함과 순수함으로 사랑의 장애물을 돌파한다. <달짝지근해>도 언뜻 그런 이야기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연기자 이상의 역할을 갖는 또 다른 배우가 있다. 물론 김희선이다.
김희선이 연기하는 캐릭터 이일영은 긍정적인 사고로 가득한 여자다. 어린 시절 남자를 잘못 만나 아이를 혼자 키우게 된 미혼모이고 대출금까지 쌓인 실업자인데, 빚을 독촉하던 대출업체에 취직하는 묘수를 부릴 정도로 적극적이다. 김희선의 과거를 지켜보던 관객이라면 극 중 이일영에게서 그녀가 과거 연기한 드라마 <토마토>의 이한이가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달짝지근해>는 비슷해 보이는 영화와 질문은 비슷해도 다른 답을 내놓은 영화다. ‘저런 여자가 왜 저런 남자를 좋아해?’라는 질문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답은 그녀가 원래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일영은 남자가 우직함과 순수함으로 어필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그를 알아보고 직진한다. 남자를 먼저 집으로 초대하고, 먼저 밥을 같이 먹자고 하고, 과감한 스킨십도 먼저 시도한다. 판타지로 따지면 한 번 더 나아간 판타지다.
<달짝지근해>는 멜로 영화인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던 사람이 사랑을 통해 존재감을 되찾는 성장 영화다. 유해진의 역사는 영화 밖과 안에서 작동한다. <주유소 습격사건>을 시작으로 <왕의 남자>의 광대를 거쳐 <타짜>의 도박꾼을 지나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로 친근감을 쌓고, <럭키>를 통해 흥행 배우로 등극한 유해진의 과거는 <달짝지근해>의 차치호가 사랑을 완성하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그런 유해진이 이제는 로맨틱 코미디의 남자 주인공을 연기한다는 낯설지만 놀라운 사실도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오른다. 그런가 하면 데뷔와 동시에 세상의 사랑을 받은 김희선의 역사는 이일영을 통해 또다시 재생산된다. 앞서 이야기한 드라마 <토마토>의 이한이는 자신을 향한 온갖 핍박을 밝은 에너지로 돌파한 캐릭터였다. 김희선은 이한이뿐 아니라 여러 드라마와 CF를 통해 언제나 자기주장이 강하고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보여주었다. 그런 김희선이 이제 남자에게 먼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여성을 연기한다고 할 때, 그 효과는 더욱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달짝지근해>는 한국 영화에서는 거의 본 적 없는 40대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유해진과 김희선이 약 30년 후 또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잭 니콜슨과 다이안 키튼이 출연한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같은 영화라면 더 좋을 것이다. 한국에서 노년의 사랑을 다룬 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영화는 얽힌 가족 문제와 지병 등의 장애물을 극복하는 이야기였다. 그게 현실적이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아예 그런 현실의 그림자를 지워버리는 판타지도 필요하지 않을까?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은 임신할 우려가 없어서 폐경을 축복으로 여기는 노년의 로맨스였다. 30년 후, 유해진과 김희선이 함께 또는 각각 다른 배우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된다면 30년 동안 쌓인 그들의 역사가 겹쳐 더 큰 감흥을 일으킬 것이다. 또 그런 영화를 기획할 수 있는 시대라면 그 자체로도 좋은 미래일 것이다.
- 포토
- 영화 '달짝지근해: 7510'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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