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호와 나눈 시간에 관한 대화
샤토 정원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 평범함을 못 견디는 성격이 만들어내는 불균질한 리듬. 정경호가 지나온 시간은 다음을 기약한다.
배우는 자신이 맡은 배역의 숫자만큼 다른 인물이 되는 직업이다. 관객은 실제 배우와 극 중 인물이 다르다는 전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둘을 혼돈한다. 이 혼돈은 배우에게 특정 이미지를 덧입히고 배우는 그 이미지를 뛰어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배역으로 대중 앞에 선다. 대중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각인된 정경호는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톱스타 최윤이었다. 이후로도 연예인 역할만 다섯 번을 맡았고, 최근 6~7년 동안 예민하고, 성질 더럽고, 안 먹고, 까칠한 인물을 연기했다. (그 스스로 정점을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에이즈 환자 역 프라이어 월터로 꼽았다.) 위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에게는 예민하고 까칠한 이미지가 생겼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신기할 정도로 그에게 어떤 제약도 가하지 못했다. 까칠해도 속내는 깊은 ‘츤데레’가 됐고, 허약함은 어쩐지 지켜주고 싶은 ‘병약미’가 됐다. 그러니까 정경호는 자신의 배역을 타당한 인물로 창조해냈으며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 매력을 캐릭터의 맨 앞에 세웠다. 세상에는 ‘믿고 보는 배우’ 같은 거창한 타이틀도 있지만 정경호란 이름은 언젠가부터 선명한 흥미로움을 보장한다. 익숙하고도 늘 새로워서 종종 잊게 되지만 올해는 그가 데뷔한 지 20주년이다.
정경호는 런던에서 <보그>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 <일타 스캔들> 후 다짐대로 근력 운동을 하고 인터뷰 장소로 들어오는 참이었다. 그레이 반팔 티셔츠에 쇼츠를 입어 구름 위라도 뛰어오를 듯 가벼운 모습이었다. 20주년이라는 숫자를 앞에 두고 처음 카메라 앞에 섰던 순간을 묻자 정경호는 ‘생생하다’는 표현으로 답변을 시작했다. “<일타 스캔들> 촬영에서 기억 안 나는 부분은 있어도 처음 카메라 앞에 섰을 때 모습은 기억나요. 공채 탤런트가 돼서 <알게 될 거야>라는 드라마에 들어갔을 때죠. <낭랑 18세>에서는 단역으로 나왔는데 한지혜 씨한테 발 차기로 맞은 장면이 진짜 생생합니다(웃음).” 그때의 정경호와 지금의 정경호는 같은 사람이기도,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카메라 앞에 서는 자세는 많이 바뀌었죠. 멋모르고 나 잘난 맛에 했다면 지금은 유연해졌고 책임감 있게 하려 하죠. 조금 더 좋은 작품을 위해서, 조금 더 내가 맡은 인물에 다가서기 위해서요. 그때에 비해 얼굴도 많이 바뀐 거 같군요(웃음).”
드라마 30편, 영화 15편. 최근 크랭크업한 영화 <보스(가제)>와 특별 출연까지 합친 정경호의 출연작 숫자다. 단순하게 계산해도 1년에 두어 편씩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다. 인생 그래프에 변곡점이 존재하듯 그의 필모그래피에도 터닝 포인트가 된 지점이 존재한다. “일단 데뷔했을 때, <미안하다, 사랑한다> 드라마 했을 때 좌표를 찍어야죠. 그다음에는 군대에서 한 번, 제대 후 <무정도시> <롤러코스터>도 중요한 지점이에요. 그리고 역시 신원호 감독님, 이정효 감독님을 만났을 때가 인생의 포인트예요.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 제 모든 좌표가 찍히는 것 같아요. 아, 그러다가 꿈에 그리던 전도연 선배님, 유제원 감독님, 양희승 작가님이랑 <일타 스캔들>이란 좋은 드라마도 했고요.” ‘작품이 끝나면 사람이 남더라’는 소회를 밝혀온 그를 늘 나아가게 하는 존재는 사람이다. “이우정 작가님, 신원호 감독님을 비롯한 ‘슬기로운’ 팀 사람들은 너무 선해요. 선한 영향력이 있어서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고 연기할 수 있는 힘이 너무나도 많이 생겨요. 그리고 연기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됐어요. 내려놓았다기보다는 나 혼자 잘하려고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거든요. 감독님 연출력, 음악, 영상, 카메라 하나하나가 어우러져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슬기로운’ 시리즈를 통해서 배웠어요.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위해서 제 몫을 해내고 있었으니까요.” 신원호 감독과 이우정 작가의 선한 영향력은 미지의 배우 발굴에도 발휘되었지만 정경호에게는 정서적으로 작용했다. “‘슬기로운’ 시리즈에는 악역이 없어요. 그래도 드라마가 재밌고 잘 흘러가요. 착한 사람들 얘기를 착하게 만드는데 그 안에 제가 있는 게 되게 좋았어요. 지금도 미도와 파라솔을 만나면 수다를 15시간씩 떨어요(웃음).” 다르지만 선한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더 닮아버린 지점들. 과거 과잉된 감정과 악역이 필수였던 드라마판에 슬기롭게 등장한 선한 사람들은 착한 얘기도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물론 착한 사람이 오히려 판타지로 여겨지는 시대임을 깨닫게 했지만 분명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이야기였다.
정경호의 필모그래피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한번 호흡을 맞춘 사람들과 계속 내놓는 작품이다. 이정효 감독과는 <무정도시> <라이프 온 마스> 두 편을 함께했다. “이정효 감독님하고는 밤새운 기억밖에 없어요(웃음). <라이프 온 마스> 때 며칠 밤을 새웠는지 세봤는데요. 정확하게 35일이었어요. ‘형,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될까?’ 하며 보냈던 시간이 모두 즐거운 추억이죠.” 정경호는 곰곰이 돌이켜보더니 이정효, 신원호, 유제원 감독에게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스타일이 약간 비슷해요. 배우들을 그냥 풀어놓으시거든요. 현장에서 큰 디렉션을 하는 게 아니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스타일인데 그런 부분이 저랑 잘 맞았어요.” 그의 커리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사나이는 배우 박성웅이다. <라이프 온 마스> <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 <대무가>까지 내리 세 작품 포스터에 둘은 얼굴을 맞대고 있다. “너무 신기하고 웃겨요. 3년 넘게 같은 사람이랑 옷만 갈아입고 연기를 한 거잖아요. 너무 고마운 형이고 사랑하는 형이고 존경하는 선배예요. <라이프 온 마스>를 같이하다가 ‘<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 대본에 악마가 있는데 형밖에 안 떠오른다?’ 했더니 ‘그래, 하자’ 했고, <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 찍는 중 성웅이 형이 <대무가> 대본을 보다가 ‘악역이 한 명 있는데 되게 까리해야 해’ 하길래 ‘내가 할게!’ 이렇게 됐고요(웃음).”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지만 은근히 조화를 이루는 두 콤비는 정체된 시리즈물에서 신선한 관계성을 이뤘다.
작품마다 사람을 따라간 듯 보이지만 정경호의 방향성에는 독창적인 스토리가 있다. 무당들의 프리스타일 굿판 대결을 선보인 <대무가>, 뷰티 왕국을 꿈꾸는 압구정동 이야기를 풀어낸 <압꾸정> 등 줄거리 한 줄만 들어도 호기심이 일어난다. 얼마 전 크랭크업을 마친 영화 <보스>도 마찬가지다. 건달 조직의 ‘보스’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세 남자의 코믹 소동극이라니. 정경호가 맡은 인물은 조직 창립자의 외손자지만 보스가 되기보다는 탱고를 추고 싶어 한다. 물론 그의 선택에는 배우 조우진, 박지환이 작용했고 “셋이 아주 신나게 놀다가 잘 마무리했다”는 소감을 들려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정경호는 남다른 이야기에 동하는 듯 보인다. “장르물에 좀 더 혹하긴 해요. 일상적이고 편안한 연기가 더 어렵거든요. 1980년대에 떨어진다든지, 미래로 가면 살을 붙이기 쉬운데 현재가 더 어려워요. 슬픈 얘기보다 재밌는 얘기가 더 어렵고요.”
배우의 자아 성찰과 무관하게 정경호의 일상 연기는 그를 대표하는 특징이 됐다. SNS에는 “이런 연기는 정경호가 참 잘한다”는 게시물이 올라오곤 하는데, 대체로 헐렁한 연기, 한 듯 안 한 듯한 연기, ‘뻘하게’ 웃기는 연기다. 분명 코미디 장르가 아닌데 순간순간 웃음이 터지는 지점이다. 항상 기쁘거나 무조건 슬프지 않은 게 현실이고 그런 현실이 반영된 대본을 특히 정경호란 배우가 달리 해석하는 게 아닐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들려줬다. “장점이자 단점인데, 평범한 걸 못 견디겠어요. 물론 신에 대한 전달은 확실히 해야 하는데 뭐랄까 가만히 못 있겠어요. 함께했던 감독님들도 다 비슷해요. ‘그냥 이렇게만 가면 안 되겠죠? 더 해볼까요?’ 하면 되게 신나 하세요. 그러다 보니 기쁜데 슬프다든지, 슬픈데 더 슬프다든지 그런 장면이 나와요.“ 흥미롭게도 정경호는 몸만으로도 전에 없던 순간을 만들어낸다. <일타 스캔들>에서 펄럭펄럭 종이 인형처럼 날아가고 주저앉는 장면은 정경호만의 유머 리듬이 발현된 결과일 것이다. 최근 작품으로 ‘병약미 남주’라는 수식어가 생겼지만 장르물에 진심이었던 만큼 꾸준히 액션 연기도 선보여왔다. 하지만 ‘몸을 쓰는 일’은 자신 있는 분야가 아니다. “형들이 이 정도면 잘하는 편이라고 하지만 자신 있진 않아요. <무정도시> 때 허리 디스크가 두 번 터지기도 했고요. 근데 맞거나 뒹굴거나 떨어지는 건 자신 있는 편이에요(웃음).” 성격이 액션에도 드러난다고 덧붙였다. “성격이 공격적이기보단 방어적이죠. 나만 상처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래서 픽픽 쓰러지는 건 잘해요(웃음).” <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 스타 작곡가이자 <슬기로운 의사생활> 베이시스트로 분했지만 자신의 몸에 음악이 흐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순간도 있었다. “이번에 영화 <보스>에서 탱고를 추면서 또 한 번 느꼈어요. 내 몸에는 춤, 음악이 없구나. 그래서 뮤지컬은 절대 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확신해요. 하지만 미도와 파라솔 덕분에 저작권료도 들어옵니다(웃음).” 몸에 춤과 음악이 흐르지 않아도 베이스를 연주하고 노래를 했듯 배우의 세계는 새로운 배역을 만날 때마다 확장된다. “제가 언제 수학 문제를 칠판에 써보고, 의사나 건달로 살아보겠어요. 이런 지점은 작품을 하기 전에 기대감을 줘요. 시작할 때 원동력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배우면 얼마나 또 재밌을까?’ 같은 설렘이죠. 새로운 걸 배우는 재미이자 인물 만들어가는 재미고요. 그런 과정에서 나만의 인물 작전을 꾸려나가요.”
배우와 인터뷰를 하다 보면 현장 분위기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비슷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리 고민하고 저리 시도해보며 전에 없던 것들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상상이 간다. 사람과 현장을 말하는 정경호에게 그 재미란 ‘집에 가고 싶지 않은 느낌’이다. “끝나고도 술 한잔 먹고 더 얘기하고 싶은 사람들. 끝나고도 계속 만나고 싶은 사람들. 그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어요.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겠죠. 저도 당연히 그래요. 근데 <보스>도, <일타 스캔들>도 집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가 등장하는 작품 속 세계가 자연스럽고 단단하다면 작품 밖 현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대하는 정경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지점은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꼭 한 편씩 본다는 영화다. “어제도 극장 가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고 왔어요. 집에서 와인이나 소주, 맥주와 영화 한 편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에요. 누군가는 연기에 영향받는 게 싫어서 안 본다고 하던데 저는 정말 다 찾아봐요. ‘아, 어떻게 저렇게 했지?’ ‘와, 잘한다’ 아니면 ‘왜 저러는 거야?’ 하면서 즐기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좋은 에너지를 받아요. 영화 보는 걸 너무 좋아했고 아버지도 늘 틀어놓으셨으니까요. 그리고 또 빠져 있는 게 여행 프로그램. <다시 갈 지도>와 <톡파원 25시>는 꼭 챙겨 봐요.” 순수한 애정과 몰입의 대상이 영화와 드라마인 배우는 그래서 20주년을 맞이한 지금도 20년 후를 상상해봐도 ‘계속할 것 같다’는 소회를 담백하게 내놓는다.
배우이되 스타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정경호의 SNS 아이디는 아이러니하게도 ‘정스타’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스타 되라고 지어준 별명이다. 정말 스타 되기에 골몰했다면 사용하지 않았을 아이디. 스타의 정의를 묻는 질문에 “스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해요. 사랑받은 만큼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답하는 정경호에게 마지막으로 데뷔 20주년을 맞아 ‘정경호 영화제’를 연다고 가정하고 개막작과 폐막작을 꼽아달라 청했다. “개막작은 <미안하다, 사랑한다>여야죠. 폐막작은 최근작인 <보스>? 아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좋을 거 같아요. 시즌 1·2가 있으니까 다 볼 때까지 집에 안 가는 걸로(웃음).” 집에 가기 싫다는 사인으로 작품에 애정을 드러내는 배우를 재차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어떤 결말을 맞이해도 부활하는 주인공처럼 정경호의 작품 세계는 20년 후에도, 40년 후에도 ‘To Be Continued’로 이어질 것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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