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난 정유미
영화 <잠>에서 잠들다 깨어난 정유미. 그녀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꿈을 데려올 수 있다.
“누가 들어왔어.” 수진의 마음에 불안이 찾아든 건, 잠들어 있던 남편 현수가 이상한 말을 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수진은 수면 중 기이한 행동을 하고도 깨어나서는 기억조차 못하는 남편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남편에게 찾아온 이상 증세와 그로 인해 이 가족이 직면한 악몽 같은 상황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돌파해나가려 한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된 유재선 감독의 데뷔작 <잠>(2023)이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부부의 평화로운 일상과 안온해야 할 수면 시간이 하루아침에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돌변하는 흥미로운 전개의 영화다. 배우 정유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치열하게 분투하는 수진으로 돌아왔다. 어느 때보다도 간결하고 짜임새 있는 작업에 이끌렸다는 정유미를 만나 <잠>으로 빠져든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칸에서의 첫 상영 때 <잠>을 처음 봤다고 들었어요. 기대와 긴장이 공존했을 것 같은데요.
<부산행>(2016) 이후 두 번째 칸 방문이었어요. 이번에도 시차 때문에 애를 먹었죠. 혹시라도 영화를 보다가 잠들까 봐 걱정이 앞섰는데 전혀. <잠>은 워낙 사운드가 중요한 영화라 잠들 새가 없더라고요. 시나리오가 정말 깔끔했는데 그것 그대로 영화가 된 것 같았어요. 예상치 못한 의외의 지점에서 관객의 반응이 나오는 것도 신기했고요.
영화 작업과 개봉은 <82년생 김지영>(2019) 이후 오랜만이에요.
국내 관객에게 <잠>으로 인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커요. 코로나 등을 지나고 보니 점점 더 영화 한 편 한 편 개봉하는 게 소중하게 다가오더라고요. 무엇보다 <잠>이 프리 프로덕션 때부터 별 탈 없이 여기까지 와서 정말 감사해요.
깔끔한 시나리오의 매력과 더불어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더 듣고 싶어요.
특정 장르나 캐릭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영화 전체를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정말 군더더기 없는 시나리오였고요, 무엇보다 재미있었어요. 출연진이 많거나 장소가 확확 바뀌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만큼 콤팩트하게, 짧은 호흡으로, 집중도를 높여 작업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어요. 감독님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눠보니 느낌이 오더라고요. ‘이런 분이 만드는 영화는 어떨까?’ 궁금해졌죠.
첫 만남 때 유재선 감독님이 어떤 이야기를 했길래요?
정작 저는 괜찮았는데, 주변에서는 얼마간 우려가 있었어요. <잠>의 수진과 <82년생 김지영>의 지영이 혹여 비슷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내용상으로는 전혀 다른 영화인데 얼핏 보면 남편과 아이가 있는 여성 캐릭터라는 점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여기에 대해 감독님께 여쭤보니 정확히 설명해주시더라고요. 지영은 어려움을 제 안으로 삭이고 누르고 참는 편이라면, 수진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인물이라고요. 덧붙이는 말 없이 깔끔한 그 설명이 좋았어요. 제가 알아야 할 것들을 중심으로 설명해주는 점도요.
수진은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는 없다’는 가훈을 신념처럼 여깁니다.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와 집념마저 엿보여요. 수진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고 만들어나간 과정이 궁금해요.
촬영일 아침마다 감독님께서 그날 찍을 컷을 하나씩 설명했어요. 그걸 잘 듣고 최대한 감독님 말씀에 응답하고, 잘 수행하고 싶었죠. ‘수진은 이럴 거야’라며 내가 먼저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감독님의 디렉션에 기대고 그에 맞춰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최근 몇 년간 이런 방식으로 작업하는데 이러한 접근이 주는 편안함이 있어요.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과 태도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인데요.
당분간은 이런 방식으로 일해보고 싶어요. 감독님이 직접 시나리오를 쓴 만큼 다른 누구보다 인물에 관한 많은 그림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작품을 결정할 때까지는 신중하게 고민하는 편이지만, 함께하기로 한 이후에는 감독을 전적으로 믿어요. <보건교사 안은영>(2020) 때도 이경미 감독님이 원작의 각색 작업에 많은 부분 참여한 만큼 감독이 그리는 대로 최대한 해보고 싶었어요. 저는 감독님들의 ‘오케이’가 제일 좋아요(웃음).
평온하던 수진의 감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의심과 경계로 불안해지고 두려움에 휩싸이며 급기야 극 후반에는 격정으로 치닫고 매섭게 휘몰아치기까지 해요.
집중해서 연기하는 것과 별개로 연기할 때 ‘수진을 이렇게 보이게 해야지’라고 여기며 하지는 않았어요. 촬영 현장 분위기 덕을 크게 봤어요. 영화가 전개될수록 세트장 분위기가 바뀌는데 운 좋게도 순서대로 촬영할 수 있었죠. 그러면 연기할 때 도움을 많이 받아요. 미술, 조명 등 미장센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면도 분명 있고요. 의상도 일상복처럼 보이지만, 디테일이 살아 있어요. 그런 옷을 입으면 기분도 좋고, 거슬리는 것 하나 없어 연기하기 훨씬 편해져요. <보건교사 안은영> 때도 그런 부분에서 굉장히 큰 도움을 받았어요. 그래서인지 프리 프로덕션 때 이런 점을 여러 번 살피게 되더라고요.
수진은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가보는 인물이에요.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까지 움직이게 하는 걸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 아이도 있잖아요. 그런데 남편이 아프다? 같이 해결해야죠. 일단 끝까지 가보고, 끝장을 보고! (웃음)
부부의 이야기가 중심이라 현수 역의 이선균 배우와의 호흡이 굉장히 중요했을 텐데요.
‘호흡이 좋다’는 말이 의식되지 않을 만큼 진짜 좋았어요. 워낙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쉬지 않고 해온 배우잖아요. 게다가 작품마다 정말 그 인물인 것처럼 보여요.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 <첩첩산중>(2009), <옥희의 영화>(2010), <우리 선희>(2013)로 이미 같이 작업해본 적은 있지만, 모두 분량이 많지 않았거든요. ‘우리 언젠가는 길게 꼭 작업해보자’고 말해왔는데 그게 <잠>이 된 거죠. 이선균이라는 배우에게 믿음이 상당히 커요. 호흡, 눈빛, 시선만으로도 공간을 채우는 그의 연기는 보고 있으면 그저 신기하고 대단해요.
‘연기를 잘한다’는 것에 스스로의 고민과 욕심이 느껴지는 답이기도 한데요.
연기할 때 정말 고민을 많이 해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고 여기는데 막상 제 연기를 보면 아쉬움이 남아요. 후회와는 다른 거예요. 제가 슬로우 스타터이기도 하고요.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 감독 김종관), 장편 <사랑니>(2005, 감독 정지우)로 데뷔한 후, 누구보다 꾸준히 자신만의 속도로 대체 불가한 작업을 이어오는 걸요.
돌이켜보면, 그 작품들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만나 그야말로 배우로서 데뷔할 수 있었고, <사랑니> 덕분에 배우로서 내가 가져가고 싶은 게 뭔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죠. <사랑니> 이후 <가족의 탄생>(2006, 감독 김태용)으로 이어지는 행보를 좋게 봐주신 영화 관계자들이 있었고, 또 그런 선택을 눈여겨본 분들이 있어 드라마 <케세라세라>(2007), <로맨스가 필요해>(2012)를 하게 됐고요. 제 안의 편견을 깨부수는 과정이었어요.
예능 프로그램 출연 역시 고정된 틀을 깨고 좀 더 편안하고 자유롭게 활동하려는 시도로 읽혔어요.
<윤식당> 팀과의 인연도 어느덧 6년이 넘었더라고요. 그 팀을 만나 정말 감사하죠.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프로그램에 들어갔다기보다는 스태프와 출연진 사이에 시간이 딱 맞을 때 시작되는 식이었어요. 저 역시 스케줄에 문제만 없다면, 할 수만 있다면, 재밌게 더 참여하고 싶어요. <정식당>이요? 그런 욕심, 전혀 없어요. 서준이가 사장이 된다고 해도 저는 그 밑에 있는 게 좋아요. 서진 오빠가 농담처럼 말했어요. ‘너는 평생 등기 이사’라고요(웃음). 정지혜 영화 평론가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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