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고 만지고 감각하는, 이토록 가까운 미술
오랫동안 패션 매거진의 피처 에디터로 일했고, 현재 미술 전문 에디터로 활동하는 안동선 작가의 첫 책 <내 곁에 미술>은 “관자놀이 부근에서 미묘하게 움직이고 있는 나의 페이버릿 재킷들”로 시작된다. 파리의 작은 호텔 방에 놓인 누드형 옷장과 일체화된 작은 책상에 노트북을 편 채 마감을 해보려 애쓰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좋아하는 옷과 출장길에 마주한 미술 작품, 간이용 마감 책상이 있는 풍경에서 쓰였다. 이야기는 “옷과 나를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 예술가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으로 옮겨간다.
손상을 복구하는 데 사용하는 바늘의 함의에 매료된 루이즈 부르주아는 패브릭 작품으로 정서적인 회복을 꾀했고, 저자는 가장 좋아하는 루이즈 부르주아의 패브릭 작품으로 ‘망각에 부치는 노래(Ode à l’Oubli)'(2004)를 꼽는다. 좋거나 싫거나 아픈 기억을 하나하나 해체하고 정성스럽게 꿰매 새로운 창조물로 재탄생시키는 예술가의 작업 과정이 에디터의 일인 ‘편집’과도 닮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 책에서 살아 숨 쉬는 현대미술가의 작품을 도구로 자신의 취향과 기억과 경험을 한데 이어 붙인다. 미술이 지루하거나 관조적이거나 추상적인 담론이 아니라, 삶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문에서도 이 책이 읽는 이에게 어떤 식으로든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털어놓는 그는 아끼는 옷을 곁에 두고 맛있는 음식을 발견하며 좋아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태도로 미술을 대한다.
그래서인지 <내 곁에 미술>을 다 읽고 나서 가장 선명하게 남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촉각적인 감각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미술 작품의 표면에는 감상자의 지문이 진하게 남아 있다. 백자처럼 반질반질한 질감을 가진 인간 형상을 담은 최지원 작가의 회화 작품을 보며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 느낄 ‘손끝의 감각’을 상상하고, 알렉스 카츠의 꽃에 둘러싸여 작품의 활기차고 산뜻한 기운을 온몸으로 흡수하려 애쓰며, 소장한 국보 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의 레플리카 작품을 책상 옆에 올려두고 수시로 만져보면서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촉각적으로 향유하는 식이다. “좋은 그림을 볼 때면 감각이 동한다. 그 감각의 실체를 경험해보고 싶어서 화실에 다닌 적도 있다. 붓끝에서 전해오는 그릭 요거트 같은 유화의 꾸덕꾸덕한 느낌과 수채화 물감을 머금은 붓이 종이 위를 스무드하게 스치면서 남기는 투명한 물기 등 회화 도구의 촉각적인 물성을 경험한 후로는 그림 보는 일이 공감각적인 매혹으로 다가왔다.”
현장이나 사람, 창작물을 접하고 나서 자기 안에 남은 경험을 외부 세계에 전하는 에디터로서의 본인을 일종의 매개체이자 매개자로 생각한다는 저자는 “이 경험은 우선적으로 오프라인에서의 경험에 한한다”고 강조한다. 온라인 매체를 통해 작품을 수집하고, 심지어 디지털 전시를 보는 것도 가능한 시대지만 “실제 세계에서의 경험은 대체 불가능한 촉각적 기억을 남기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미친 팽이’라고 표현하고, 지인들이 “그래서 지금은 어디야?”라는 말로 안부를 물어올 만큼 분주하게 국내외 미술 현장을 누비는 이유다. 따라서 이 책에는 이우환의 작품이 설치된 토스카나의 와이너리부터 베니스 비엔날레와 카셀 도쿠멘타, 아트 바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를 잇는 그랜드 아트 투어 현장,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을 보러 간 테이트 모던 등에서 마주친 특별한 장면이 리드미컬하게 펼쳐진다. 저자는 예술가가 특정 장소를 위해 만든 작품을 뜻하는 ‘장소 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을 특히 좋아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 용어는 현대미술에서 다소 난해하고 복잡한 함의가 있지만 나는 단순하게 작품을 온몸으로 만나는 생생한 체험이 좋다. ‘장거리 연애’를 하는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오로지 그 작품을 생각하며 떠나고 여운을 곱씹으며 돌아오는 미술 여행에는 집중된 기쁨이 있다.”
상상 속에서라도 시공간을 마음대로 이동하는 것이 최고의 럭셔리라고 믿는 작가는 미술이야말로 지금 여기를 탈주해 온 시대와 장소를 유랑하게 해주는 입구와도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어찌 됐든 세상은 온몸으로 관통해야 제맛이라고 여기는 경험주의자에게 가장 유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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