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향, 시적인 향, 책의 향
책장 사이사이, 그 페이지와 페이지 틈에 밴 가을의 향, 시적인 향.
지하실에서는 오래된 페인트, 금속 냄새가 풍겼다. 풀, 신문지, 바닐라, 바닷바람을 스친 듯한 땀 냄새도 배어 있었다. 탁자에 놓인 ‘책, 한 권당 1,000원’이라고 적힌 팻말에 전리품을 찾아볼까 싶어 지하실로 발길을 옮겼다. 내 나이 열 살이었고, 여름을 나기 위해 매사추세츠의 케이프코드(Cape Cod)에 머무는 중이었다. 몇 번을 조른 끝에 용돈을 가불 받아 스무 권의 책을 골랐다.
나는 몇 달에 걸쳐 그 많은 책을 모조리 읽었다. 그중에는 로알드 달(Roald Dahl)의 낡은 전집과 <비밀의 화원(The Secret Garden)> 그림책도 있었다. 그 책을 펼칠 때면 보물을 찾으러 다시 그 지하실에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때부터 새 책보다 는 오래된 중고 서적을 더 좋아했다. 책 곳곳에 적힌, 이전 주인들이 남긴 낯선 이들을 위한 메모 때문이었지만, 책이 풍기는 냄새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독서가 ‘시간 여행’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중고 서적이 이야기를 새로운 여행의 입구로 바꿔놓았다.
과학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웜홀을 낱낱이 파헤치지 않았지만, 낡은 책에 담긴 경험을 매우 매력적으로 만드는 향을 분리하고 분석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지속 가능한 유산 연구소(Institute for Sustainable Heritage)의 강사, 세실리아 벰비브레(Cecilia Bembibre)는 유서 깊은 향을 보존하는 전문가이며, 주로 향의 특정 구성 요소를 분해하는 데 시간을 투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디지털 시대에 오래된 책은 그녀의 연구 대상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종이가 ‘한정판 향수’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학물질이 지속적으로 나오는 걸 발견했어요.” 세실리아가 설명했다. 바닐라 향이 나는 바닐린, ‘빵 또는 거의 쿠키에 가까운’ 향의 푸르푸랄(Furfural), 식초 향을 발산하는 산과 갓 자른 풀을 떠오르게 하는 헥센올(Hexenol) 같은 물질이 바로 그것이다. 그 외에도 마지팬(Marzipan, 아몬드와 설탕을 혼합한 달콤한 과자)도 있으며, 곰팡이 냄새를 좋은 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화합물도 존재한다.
세실리아는 케이프코드의 지하실 냄새를 구현한 향의 영감의 원천, 유구한 도서관과 성당에서 공기 샘플을 채취해 조사했다. 2011년 독일 출판사 슈타이들과 <월페이퍼> 매거진, 칼 라거펠트와 조향사 게자 쇤(Geza Schön)이 협업해 단발성으로 특별히 제작한 향수 ‘페이퍼 패션(Paper Passion)’을 공개했다. “저는 종이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라거펠트가 말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쇤은 17번의 시도 끝에 슈타이들 괴팅겐(Göttingen) 본사의 냄새를 베이스로 한 향을 조화롭게 만들어냈다고 한다. 2017년 바이레도는 소비자의 폭발적인 요청에 따라 부드러운 벨벳 피치와 톡 쏘는 자두, 작약과 모란의 우아한 조합과 파촐리, 가죽, 바닐라 향이 어우러진 ‘비블리오티크 (Bibliothèque)’ 캔들을 향수로도 출시했다. 오래된 가죽 커버의 고서와 골동품 테이블, 안락의자 등에 둘러싸인 듯 지적이고 고상한 서재 분위기를 간직한 이 향수는 브랜드의 스테디셀러 중 하나다.
메종 마르지엘라는 ASMR을 유도하는 ‘레플리카 위스퍼스 인 더 라이브러리(Replica Whispers in the Library)’를 출시했다. 조도 낮은 도서관, 나무 책상을 향한 예찬이었다. 미국 향수 브랜드, 코모디티 프래그런스(Commodity Fragrances)는 보관된 책뿐 아니라 종이 자체를 좋아하는 순수주의자를 위한 향수를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지난봄 한국의 역사와 유산을 모티브로 하는 뉴욕의 향수 브랜드 엘로리아(Elorea)는 잊힌 순우리말로부터 영감을 얻은 ‘포가튼 워즈(Forgotten Words)’라는 향수 라인을 론칭했다. 그런가 하면 딥티크는 ‘로 파피에(L’Eau Papier)’라는 향수를 발표했다. 나름의 방식을 통해 후각적으로 해석한 이 향수는 ‘흰 종이에 잉크가 스며드는’ 순간을 찬양하고 화이트 머스크를 담고 있으며, 깊이 있는 향을 위해 시리얼과 잉크 어코드와 참깨 추출물까지 함유한다. 저명한 조향사 파브리스 펠레그린(Fabrice Pellegrin)은 향을 개발할 때 ‘아름다운 흰 종이가 제공하는 감성과 감정’까지 불러일으켰다. “종이의 질감, 벨벳을 떠올리는 감촉과 흰색, 잉크와의 만남을 해석할 방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가 내게 털어놓았다. 종이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다. 글말을 환기하는 향은 이미 전해진 이야기뿐 아니라 앞으로 나올 이야기에 대한 가능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세실리아 벰비브레의 임무는 향을 추측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는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이 이런 냄새에 끌리는 현상을 그다지 놀라워하지 않는다. “독서는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습관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일하던 런던의 한 도서관에서 내게 말했다. “종종 그것은 유쾌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단 한 번, 잠깐 맡은 냄새가 다른 세상의 모든 것을 상기시키죠.” 그녀는 향이 정서적인 면을 지녔음을 강조했다. 즉 향기란 일련의 화학 성분이자 고향을 향한 그리움과 몇몇 기억에 대한 표현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그것을 입증해왔다. 얼마 전 그녀는 조향사로 일하는 친구와 함께 세인트폴 대성당의 희귀 도서실을 찾아 실험을 단행했다. 세실리아는 자료를 수집해 과학기술로 그 공간의 화학적 성질을 샘플링했고, 조향사는 냄새를 맡는 동시에 자신만의 주관적인 해석을 담아 향을 구상했다. 이 두 가지 향을 병에 담은 뒤, 30명에게 오래된 책 냄새를 가장 많이 연상시키는 것을 선택하게 하는 표본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50 대 50. 세실리아는 향의 캔들과 향수를 살폈고, 기본 노트를 분석하곤 했다. 그러나 실험을 통해 그녀의 마음이 바뀌었다. “어쩌면 우리가 찾는 것은 글귀가 아니라 ‘느낌’일지도 모릅니다.”
역사학자 로이 포터(Roy Porter) 박사는 알랭 코르뱅(Alain Corbin)의 역사적 향기에 대한 대가다운 해설서, <반칙과 향기(The Foul and the Fragrant)>를 위한 서문에서 “역사의 향기가 없어지고 있다”고 한탄했다. 그는 우리가 과거의 냄새, 즉 그것의 지독한 악취와 우아한 향, 부패한 냄새와 쾌락적 내음 등과 더 이상 접촉하지 않게 됐을 때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의식 혹은 감각을 잃어가게 된다며 안달했다. 나는 새로 맡은 프로젝트의 자료를 조사하면서 지난 몇 달 동안 도서관에서 지냈다. 그 고요한 순간, 나는 송진과 소금에 휩싸인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바스러진 책과 구겨진 페이지에 파묻힌 듯했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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