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인 고독을 마주하는 전시 #최욱경
1년 중 한국 미술계가 가장 뜨거운 시기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몸과 마음이 참 번다합니다. 9월 첫째 주를 장악할 2개의 아트 페어, 프리즈와 키아프에 전 세계 미술 관계자와 애호가가 몰려든다고 하죠. 향후 일주일 안에 서울에서 열리는 미술 관련 행사만도 1백여 개가 넘을 거라는 소문이 들립니다. 진위야 어떻든, 미술 애호가로서 약간의 피로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미술계의 혹자는 모두가 미술을 목놓아 외치는 이 시기를 피해, 아예 늦은 휴가를 결정했다더군요. 멀리 갈 수 없다면, 부산 나들이는 어떨까요.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10월 22일까지 열리는 최욱경 개인전 <낯설은 얼굴들처럼> 전시가 눈에 띄네요. 물론 미술 주간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야 없겠지만, 수십 년 전 붓과 펜을 들고 오롯이 분투했던 최욱경의 고독이, 예술에 대한 그 진심이 오히려 지금의 저에게는 더 간절하다고나 할까요.
최욱경(1940~1985)은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추상 작가입니다. 역동적인 형태와 대담한 붓질,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작업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죠. 아무래도 이제까지 서울에서 시간을 두고 열린 전시들은 이렇게 ‘최욱경’ 하면 어렵지 않게 떠올릴 만한 작업 세계를 선보이고 존재감을 알리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번 전시가 남다른 건 작가의 좀 더 사적이고 내밀하며 감성적인 면모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1963년 미국 유학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추상 문법을 구축해나가던 시기, 즉 새롭고도 낯선 세상을 온몸으로 겪으며 돋아났을 개인 혹은 작가로서의 숱한 고민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쏟아내던 1960년대 작품 중에서도 특히 흑백 드로잉과 인체 크로키를 골라 소개합니다.
문학적인 전시 제목은 1972년에 출간된 작가의 동명 시집 제목에서 차용한 겁니다. 최욱경은 시와 그림이 다르지 않다는 ‘시화일률’을 추구한 대표적인 현대미술가 중 한 명입니다. 시 역시 미술만큼이나 작가에게 매우 중요한 표현 매체였고, 실제로 최욱경은 훌륭한 시인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2021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앨리스의 고양이>라는 회고전을 열고, 최욱경의 작업 세계에서 미술과 문학이 연계된 지점을 짚어내고자 시도한 바 있습니다. 길지 않았던 인생을 관통하며, 작가는 새로운 생각과 사유, 감성과 고백을 그림과 시, 그리고 예술에 담았습니다. 이번 <낯설은 얼굴들처럼> 전시에서는 시집에 실린 삽화 16점 중 ‘Study 1’, ‘Study 2’, ‘experiment A’, ‘I loved you once’ 등 6점의 원화를 직접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낡고 해져버린 시집의 거친 종이에 흐릿하게 인쇄된 삽화가 수십 년 후 본래의 생생한 모습과 에너지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1960년대 당시는 아마 미국이란 곳이 지금보다 몇 곱절 더 멀게 느껴졌을 거예요. 그 머나먼 땅에서 최욱경은 외국인 작가로, 여성 작가로 활동하며 작가로서의 고민과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 혼란 등 뜨거운 감정을 모두 작품에 쏟아 넣습니다. 문제의식은 얼마나 많았으며, 또 얼마나 분노했을까요. 여성 작가로서 분투해야 했던 그녀에게 이 모든 작업 자체가 곧 해방구 아니었을까요. 25여 년간의 작업 중 특히 1960년대 작품이 가장 날 서 있고, 치열하고, 다이내믹한 이유이기도 하죠. 미술과 시에 각인된 작가의 감성과 고민은 당시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에 있던 미국 추상표현주의에 직접 영향받은 기법과 자연스레 융화되었고, 부단한 노력을 통해 최욱경만의 고유한 작업 영역으로 구축됩니다. 다만 회화가 한 편의 완결된 이야기라면, 드로잉은 그 사이사이를 채우는 생생한 단상인 셈이죠. 작가의 시는 물론이고 드로잉 한편에 적힌 짧은 메모, ‘때가 되면 해가 뜨려나? 과연 때가 오긴 하는 건가?’ 같은 문구가 그녀의 심정을 짐작하게 합니다.
작가가 작고한 지 4년 만인 1989년에 다시 출간된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 표지는 최욱경 본인의 자화상 작업이지만, 초판 시집의 표지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작가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 사진을 콜라주한 가운데 최욱경 본인 사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파에 섞인 작가의 앳된 얼굴이 참 묘하군요. 슬퍼 보이는 한편 당당합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본 자의 부드러움 사이로 절대 세상에 지지 않겠다는 의지도 엿보입니다. 시를 쓸 때, 드로잉을 그릴 때,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낼 때 작가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작품을 더욱 지긋이 바라보게 됩니다. 낯선 얼굴들 사이 최욱경의 얼굴이, 모두가 예술혼을 불태우는 부산스러운 작금의 풍경보다 훨씬 친근하게 다가오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네, 이번에 저는 내로라하는 미술 파티 대신 최욱경의 시적 고백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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