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서울에 온 화이트 큐브

2023.09.05

서울에 온 화이트 큐브

비로소 드러낸 존재감. 화이트 큐브 서울이 도산공원에 착륙했다. 순수한 호기심과 또렷한 소신을 겸비한 양진희 디렉터가 이곳의 수장이다.

1993년 런던 세인트 제임스 지역에 문을 연 갤러리 화이트 큐브가 홍콩, 파리, 뉴욕, 웨스트팜비치에 이어 드디어 서울에 당도했습니다. 서울 지점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부터 오고 갔나요?

지난해 ‘프리즈 서울’ 이후 화이트 큐브 CEO 제이 조플링이 한국 시장을 한층 관심 있게 들여다보기 시작했어요. 한국 관객의 심미안이 대단하다는 걸 확인했거든요. 아트 페어라는 플랫폼을 넘어 한국에서 직접 한국 시장에 맞는 작가를 심도 있게 큐레이션하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꺼내셨죠. 다가오는 10월에 화이트 큐브 뉴욕 매디슨 애비뉴 지점도 개관하는 만큼 적절한 시기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예술에 대한 관심이 가장 뜨거운 ‘프리즈 서울’ 기간에 맞춰 오프닝을 하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화이트 큐브만의 군더더기 없는 새하얀 외관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화이트 큐브 서울은 노란 자개 벽으로 둘러싸인 호림아트센터 1층에 자리 잡았어요.

‘프리즈 런던’이 리젠트 파크에서 열리듯이 도산공원에 갤러리를 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와 페로탕 도산파크, 송은아트센터 등 주변에 좋은 문화 공간이 많기에 함께 어깨를 맞댈 때의 시너지도 기대됐고요. 한국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조플링의 적극적인 서포트에 힘입어 최종적으로 호림아트센터에 문을 열게 되었죠.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 흥미로운 현대미술을 경험하고, 호림미술관에서 한국의 고미술을 감상하면 훨씬 풍부한 전시 경험이 가능해질 거라 믿어요.

화이트 큐브에 한국 담당으로 합류한 지 5년 만에 화이트 큐브 서울의 디렉터가 됐습니다. 새로운 타이틀이 어떻게 느껴지나요?

부담을 느껴요. 좋은 공간이 탄생했으니 많은 관심 가져주시면 좋겠습니다. ‘화이트 큐브에서 이런 전시를 하네. 한번 보러 갈까?’ 정도의 기대가 생기도록 만드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예요. 이제까지는 주로 컬렉터들과 교류했다면 앞으로는 미술을 좋아하는 대중과 직접 만날 수 있으니 설레기도 합니다. 지난해 ‘프리즈 서울’에서 화이트 큐브를 대표하는 작가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을 보고 “교과서에서만 보던 그림이다”라며 신기해하던 학생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요. 컬렉터부터 미술 학도까지 더 다양한 관객층에 작품을 소개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가장 기대됩니다.

2023 ‘프리즈 서울’에 참여함과 동시에 화이트 큐브 서울 개관전 <영혼의 형상>을 선보입니다. 두 전시는 어떤 점에서 구별되나요?

화이트 큐브를 대표하는 두 아티스트, 트레이시 에민과 마르게리트 위모 말고는 라인업이 겹치지 않아요. ‘프리즈 서울’에서 소개하는 작가는 국가와 세대 등을 더 다양하게 구성했어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도 지난해보다 많이 포함했고요. 화이트 큐브의 글로벌 아티스틱 디렉터 수잔 메이가 기획한 개관전에서는 1980년생 동양화가 이진주를 포함해 총 7인의 작가를 소개해요. 마르게리트 위모는 개관전에 꼭 포함시키고 싶었던 이름인데 정말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작업을 하니 어디서든 꼭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길 추천합니다. ‘프리즈 서울’에서는 위모의 회화 한 점, 개관전에서는 설치 작품 한 점을 공개해요.

화이트 큐브는 데미안 허스트를 비롯해 yBa(1980년대 말 이후 등장한 젊은 영국 미술가들)를 발굴하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죠. 내부적으로 여전히 실험적 예술을 편애하나요?

작품이 훌륭하고 기본이 탄탄하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데미안 허스트와 함께 청년기를 보낸 조플링 대표는 작가의 스토리텔링과 창의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요.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작업을 하는 작가들과 교류가 많죠. 화이트 큐브 버몬지에서 실험적인 데다가 규모도 엄청난 작품을 볼 때마다 ‘이런 작품이 과연 판매가 될까?’ 생각하곤 하는데 유럽에서는 크게 상관이 없더라고요. 화이트 큐브를 통해 많은 선입견이 깨졌죠. 늘 많이 배워요.

카타리나 프리치의 작품도 화이트 큐브 서울 개관전 <영혼의 형상>에서 공개된다. Katharina Fritsch, Hand, 2020, Plaster and Acrylic Paint, 4.8×11.8×17.5cm, ©the Artist/DACS. Photo ©Ivo Faber. Courtesy White Cube

갤러리의 기조와 개인적인 예술적 취향은 부합하나요?

저 역시 한 번 더 생각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예술가에 마음이 이끌리는 것 같아요. 2006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르네 마그리트 전시가 떠오르는데요. 사과, 새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를 그림에 녹여내는 마그리트의 철학적인 방식이 정말 흥미로웠어요. 화이트 큐브에 소속된 일본 작가 노마타 미노루의 그림도 정말 좋아하는데 비슷한 이유예요. 상상 속의 건물을 그린 초현실적인 풍경이 많은 걸 꿈꾸게 하거든요.

최근 감상한 것 중 가장 좋았던 전시는?

파리 루이 비통 재단에서 올 초까지 열린 클로드 모네와 조안 미첼의 특별전이 정말 좋았어요. 모네가 죽기 1년 전 태어난 조안 미첼은 모네의 그림을 재해석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죠. 갤러리에서 같은 장소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담아낸 두 그림을 함께 바라볼 때 느껴지는 감동이 있었어요. 기획력의 힘을 실감한 순간이었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건희 회장의 소장품을 ‘어느 수집가의 초대’라는 흥미로운 타이틀로 소개한 것 역시 인상적이었어요.

화이트 큐브에서 기획한 것 중 개인적으로 가장 보람 있었던 프로젝트를 소개한다면요.

2022 베니스 비엔날레 시기에 베니스 퀘리니 스탐팔리아 미술관에서 재단의 현대미술 큐레이터 치아라 베르톨라와 함께 기획한 외부 전시를 꼽고 싶어요. 여기에 베트남계 덴마크 작가 얀 보를 기획자로 초대했죠. 박서보 화백의 그림과 이사무 노구치의 조형을 아름답게 배치하며 유서 깊은 퀘리니 가문의 고택을 개성 있는 전시장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 전에는 갤러리현대와 갤러리 인을 거치며 오랜 시간 큐레이터로 활약했습니다. 이때의 경험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요?

탄탄한 연락망이 쌓였죠(웃음). 특히 9년간 몸담은 갤러리 인에서는 김보희, 주태석 등 교수님들 전시를 많이 선보이며 국내 예술계 인사를 많이 알게 됐어요. 해외 파트를 담당하며 1년에 2~3회 정도 해외 작가 전시도 기획했죠. ‘프리즈 런던’이나 아트 바젤 등 굵직한 페어에도 참석하며 해외 네트워크가 쌓였어요. 그런 기회와 인연이 차곡차곡 축적된 덕분에 마침 한국 고객과 원활하게 소통할 스태프를 찾던 화이트 큐브의 연락도 받을 수 있었죠.

화이트 큐브 서울 개관전 <영혼의 형상>에서 만날 수 있는 루이스 지오바넬리의 작품. Louise Giovanelli, Soothsay, 2023, Oil on Paper, 57×38.8cm, ©DACS. Photo ©White Cube(Theo Christelis)

어릴 때부터 예술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나요? 아티스트를 꿈꿀 수도 있었을 텐데요.

소질이 없었어요(웃음). 아버지가 예술을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어릴 때 잠시 미국에서 살았는데 같이 MoMA나 구겐하임 미술관을 자주 드나들었죠.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따라나섰지만 돌이켜보면 소중한 추억이에요. 어릴 때부터 삶 깊숙이 예술이 들어와 있었던 거니까요.

예술을 만드는 사람들과 달리 예술을 널리 알리는 사람들은 어떤 목표를 두고 움직여야 하나요?

아티스트는 오직 자기 작품만 보면 돼요. 박서보 화백의 말처럼 “자기만의 스토리를 펼치고, 추락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요. 갤러리의 역할은 마케팅이에요. 그렇기에 화이트 큐브에 소속된 박서보 화백의 단색화를 화이트 큐브 갤러리뿐 아니라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도 소개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박서보 화백과의 인연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나요? 갤러리스트에게 마음을 움직이는 동시대 아티스트를 만난다는 건 반가운 행운처럼 느껴질 것 같습니다.

2016년에 화이트 큐브 런던에서 박서보 화백의 개인전이 열렸어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한국 작가가 해외 유명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더군다나 반응까지 뜨거웠다고 하니 애국자가 된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지더군요. 제가 화이트 큐브에 합류한 2018년에 화이트 큐브 홍콩에서 또 한 번 선생님의 전시가 열렸어요. 다른 때보다 더 열심히 준비하고 홍보한 기억이 납니다. 앞으로 화이트 큐브 서울 지점을 통해 더 많은 한국 작가를 해외에 소개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커요.

한국 현대미술의 특징으로 읽히는 것들이 있나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미술계에 글로벌 평준화가 이뤄지고 있어요. 회화나 조각 등 전통 매체를 다루는 작가들 외에도 업사이클링을 활용한 가변 설치나 영상, NFT 같은 디지털 매체에 기반을 둔 작가의 행보도 활발해지고 있죠. 갤러리 입장에서 좀 더 다각적인 기획을 시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2022 베니스 비엔날레를 위해 화이트 큐브와 아티스트 얀 보,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의 큐레이터 치아라 베르톨라가 공동 기획한 전시. 양진희 디렉터는 이들과 함께 박서보 화백과 이사무 노구치의 작품으로 고풍스러운 공간을 현대적인 전시장으로 탈바꿈시켰다. ‘Danh Vo, Isamu Noguchi, Park Seo-Bo’, Fondazione Querini Stampalia, Venice 20 April–27 November 2022. ©the Artist. Photo ©White Cube(Ollie Hammick)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 이건희컬렉션 등 전시 열풍으로 뜨거웠던 상반기였습니다. 국내에서 예술의 대중화가 정말 빠른 속도로 이뤄지고 있어요.

갤러리 인에서 일할 때만 해도 방문객의 태도가 다소 위축되었다고 느꼈는데 놀라운 일이죠. 관람료를 내야 하는지, 심지어 들어가도 되는지 묻는 사람도 많았어요. 관객층도 작가의 지인이나 제자, 미술계 종사자에 한정되어 있었고요. 그런데 팬데믹을 기점으로 예술에 대한 관심과 접근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어요. 온라인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뷰잉 룸에 대한 호기심도 높아졌죠. 세계적인 흐름이 그래요. RM의 오디오 가이드를 듣기 위해 LA 여행 일정에 카운티 미술관(LACMA)을 추가하는 사람들처럼 예술을 즐기는 층이 넓어진 것이 정말 반갑습니다.

그러면서 관객에게 조금 더 기대하게 되는 것도 있을까요?

단순한 감상을 넘어 공감과 이해로 나아가길 바라죠. 저는 전시를 보기 전에 미리 공부하는 편이에요. 조금 더 알고 작품을 감상하면 훨씬 재미있는 전시 경험을 누릴 수 있거든요. 장담하건대 더 섬세한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페이스갤러리, 리만머핀, 타데우스 로팍, 글래드스톤, 페레스프로젝트 등 해외 유명 갤러리가 물밀듯이 들어오는 흐름 속에서 국내 화랑은 위기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지역 예술 커뮤니티와의 연결과 상생’을 강조했는데,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할 건가요?

맞춤형 전시와 기획을 준비하려 해요. 학생들을 위해 작가와의 대담을 기획할 수도 있고, 신선한 감상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 음악과 연계한 공감각적 이벤트를 벌일 수도 있겠죠. 새로운 경험이 가능한 곳으로 갤러리를 디자인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지역사회와 관객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최필규 작가가 도자기와 목가구의 아름다움에 대해 쓴 책 <평범한 수집가의 특별한 초대>를 읽고 있는데요. 한국의 고미술품을 주로 전시하는 호림미술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 읽기 시작했어요.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길을 항상 고민합니다.

예술의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일까요?

시대와 문화, 예술은 온갖 경계를 아무렇지 않게 초월하면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요. 한 개인의 감정과 경험의 결과로 탄생한 작품이 수많은 관객에게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광경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죠. 그런 감동의 파동을 일으키는 것이 예술의 힘이자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VK)

피처 에디터
류가영
포토그래퍼
김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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