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그레이스 위버가 자유를 찾는 법 #여성예술가17
화가 그레이스 위버의 성공적 일탈. 매끈한 표면과 경계선을 벗어나자 진정한 자유와 해방감이 찾아왔다.
GRACE WEAVER
텍사스 마파의 막스 헤츨러 갤러리에서는 현재 화가 그레이스 위버(Grace Weaver)의 전시 <Indoor Paintings>가 한창이다. 스마트폰과 노트북, 도리토스와 게토레이가 흩어진 풍경에 놓인 인물을 통해 위버는 일상에서 감지되는 풍부한 감정을 끌어들인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021년 겨울이었다.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팬데믹의 영향이 컸죠.“ 자신의 개인전 <11 Women>이 열리던 제임스 코핸(James Cohan) 갤러리를 거닐며 그녀가 이야기했다. 위버가 ‘공적인 삶의 극장’이라 표현한 전시장은 과장된 크기와 색채, 몸짓을 한 인물이 그려진 역동적인 그림으로 가득했다. 단정하고 정갈한 화풍을 자랑하던 위버의 과거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미국, 독일, 스코틀랜드, 프랑스, 덴마크 등 다양한 나라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작품의 인물들은 정말이지 각양각색이었다. 치장하고, 조깅하고, 먹고, 흡연하며, 휴대폰을 보거나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바빠 보였다. 게다가 대부분 뒤틀린 사지와 몸짓을 지녔다. “다소 어색하게 움직이면서 스스로도 그런 엉성한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인지한 인물들이에요.” 스포츠 브라, 바이크 쇼츠, 힙색을 착용한 여자들은 빈 병과 트래픽콘이 늘어선 거리를 활기차게 활보하고 있었다. 95×89in 크기의 거대한 캔버스를 꽉 채운 여자들은 위버가 과거에 즐겨 그려온 인물보다 훨씬 단순한 색상과 느슨한 붓놀림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화가 필립 거스턴(Philip Guston)과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 에이미 실먼(Amy Sillman)을 한결같이 좋아해요. 시간이 흘러도 늘 그대로인 예술가들이죠. 하지만 그들의 화법과 이미지에 대한 접근 방식이 어쩐지 저와는 맞지 않았어요.”
대부분의 화가들이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서 그 둘을 결합하기 위해 분투한다면 과거 위버의 화풍은 굉장히 틀에 얽매인 것이었다. 제임스 코핸 갤러리의 공동 대표 데이비드 노르(David Norr)는 그녀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레이스는 초기작에서 인물을 뚜렷한 윤곽선을 지닌 평면적인 형태로 그렸는데 궁극적으로 그런 엄격한 정밀성이 그녀에게 막다른 골목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위버 역시 동의했다. “아주 작은 붓을 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굉장히 깐깐하게 작업했어요.” 하지만 팬데믹 시기, 브루클린 부시윅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끈질기게 캔버스를 응시하며 그녀는 결국 돌파구를 찾아냈다. 이제까지의 삶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기도 했다. “이때를 계기로 새로운 시선과 방식으로 작품에 임하게 됐어요. 정말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고 싶은 방식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표현은 과감해졌지만 위버는 여전히 우아하고 품위 있는 여성이다. <보그>와 마주했을 때, 그녀는 블랙 집업 니트를 블랙 스커트 안에 넣어 입고, 검은색 부츠와 스타킹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런 차림으로 위버는 프로스트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케이트 잠브레노와 프랑스 문학 단체 티쿤(Tiqqun), <섹스 앤 더 시티> 등을 언급하며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나갔다. 음악에도 해박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음악은 위버의 작품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아주 끔찍한 그림을 그린 적이 있어요. 스매싱 펌킨스의 음악을 들으며 그린 그림이었죠. 보기만 해도 불안한 감정이 밀려와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마무리해야 했어요.” (<11 Women>을 준비하는 동안 위버는 독일 음악가 엘렌 알리엔(Ellen Allien)의 ‘Trash Scapes’ 같은 테크노와 일렉트로닉 장르를 즐겨 들었다.)
위버의 부모님은 모두 학계에 몸담고 있다. 아버지는 버몬트 대학교 학보사 편집장으로, 어머니는 같은 대학에서 수학 및 통계학 강사로 일하고 있으며, 위버 역시 자연스럽게 교육자의 길을 가려 했다. (과거 그녀는 ‘온갖 정보를 수집해 새로운 이론을 창출해내는’ 과학적 연구에 흥미를 느꼈다.) “정말 교수가 될 줄 알았어요. 교육자 집안에서 성장하다 보니 지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모든 것에 통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고요.” 대학교 2학년 때 본격적으로 회화에 입문한 위버는 2011년에 스튜디오 아트 학사로 버몬트 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버지니아 코먼웰스 대학교에 입학해 미술 석사 학위까지 순조롭게 취득했다. 그러다 위버는 도망치듯 브루클린으로 떠났다. (올해 33세인 위버는 삶과 예술의 동반자인 남편 에릭 데겐하르트(Eric Degenhardt)를 만났다. 남편은 그의 할아버지와 함께 위버의 캔버스 틀을 손수 제작해준다.) 위버의 화풍에 최근 나타난 변화 역시 그때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버몬트주 벌링턴에서 성장한 위버는 언제나 뉴욕의 낭만을 (그리고 혼돈까지도) 동경하며 살았다. 위버는 자신의 고향 벌링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더 모험적인 환경을 꿈꾸게 만드는 지극히 안전한 환경이었죠. 벌링턴 같은 차분한 장소에 더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어요. 이 문을 박차고 나가 더 많은 것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싶다는 욕구에 항상 사로잡혔던 것 같아요.”
이후 몰두하게 된 거대한 규모의 작업은 위버에게 자유와 해방감을 선사했다. “맨 처음 그림을 그렸을 때 다른 종류의 지능을 사용하는 느낌이라 좋았어요. 지식이 아니라 직감을 믿어야 했던 것처럼요.” 위버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다듬기 위해 그리고 또 그렸다. 조슈아 리브킨(Joshua Rivkin)은 저서 <Chalk: The Art and Erasure of Cy Twombly>(2018)에서 위버와 같은 화가들의 몸부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화가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기 위해 애쓰며 서성이는 모습을 보라. 자신의 지식과 성급한 확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신과 질서에 대한 고집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고민하면서.”
데이비드 노르는 위버의 변화를 환영하는 쪽이다. “예술계에서는 대개 관습에 얽매인 그림이 보상을 잘 받는 편이에요. 그레이스와 같은 입지를 지닌 화가가 자신의 작품을 고쳐 쓰는 일은 아주 드물죠. 위버가 묘사하는 인물에서 나타난 변화는 위버가 겪은 철학적 변화를 상징해요.” 위버는 물론 그녀가 묘사하는 인물들과 별로 닮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분명 위버 자신이 투영된다. 그녀가 <11 Women>을 통해 선보인 작품에 도시가 봉쇄된 후 남편과 함께 매일같이 7~8마일을 달리던 경험을 녹여낸 것처럼. “팬데믹 기간에 세상은 종말 직후의 기괴한 분위기로 가득했어요. 도시를 물들인 고립감과 불안이 이 활기 넘치는 그림의 모든 면면에 스며들었죠.” (전후 독일의 암울함을 비춘 바젤리츠의 그림 ‘Heros’는 위버에게 훌륭한 영감이 되었다.) 변화의 소용돌이에 놓인 위버는 그 무렵 붓을 잡을 때마다 과도기적 불안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훨씬 넓고 두툼한 붓을 사용해 아직 마르지 않은 물감 위에 과감하게 덧칠하는 방식으로 계속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갔다. 밝은 색조와 어두운 색조가 한데 어우러지거나 얼룩이 흩어지고 떨어져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보다 빠르게, 무심하게 작업하는 새로운 방식을 통해 개성이 더욱 뚜렷해진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직감을 믿고 나아갔죠.” (그렇게 작업한 작품은 이후 이스라엘 텔아비브 전시, 에슬링겐암네카어 전시를 통해 공개됐다.)
위버는 예술가로서 경험한 전위적 변화를 2020년 발간된 에이미 실먼의 에세이집 <Faux Pas: Selected Writings and Drawings>가 품은 아이디어와 연결한다. “실먼은 그림에 흔적을 남겨요. 이를 통해 우리는 그녀가 맨 처음 무엇에 집중했고, 그녀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죠.” 위버도 마찬가지다. 변화를 포용하고 관객과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하면서 그녀는 ‘사랑스러운 관대함과 해방감’을 느꼈다고 터놓았다. “더 이상 매끈한 표면 뒤에 숨고 싶지 않아요. 전부 보여주고 싶어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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