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앤트완 사전트는 어떻게 가장 소란스러운 큐레이터가 되었나

2023.09.06

앤트완 사전트는 어떻게 가장 소란스러운 큐레이터가 되었나

가고시안 갤러리의 디렉터 앤트완 사전트는 현대미술계의 가장 보수적인 문을 허물고 흑인 아티스트 10여 명에 대한 평가를 제고한다. 기득권층의 평가와 상관없이 그는 그 현장에서 가장 화제를 낳는 큐레이터이자 갤러리스트다.

강렬한 패턴의 재킷은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페도라는 먼로(Monrowe), 선글라스는 구찌(Gucci), 이어링은 케네스 제이 레인(Kenneth Jay Lane).

가고시안 갤러리가 뉴욕 소호의 고급 파스타 식당 알트로 파라디소에서 만찬을 열었다. 매년 열리는 예술계 통과의례다. 첼시 갤러리가 대규모 전시의 문을 열고, 대중이 10번가와 11번가 사이 거리에 물밀듯 밀려온다. 그리고 선택받은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축하하기 위한 만찬에 초대되어 늦게까지 칵테일을 즐긴다.

만찬을 주최하는 갤러리 중에서도 래리 가고시안(Larry Gagosian)의 갤러리가 전 세계 19곳에서 만찬을 열며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그날 저녁 휴스턴에서 활동하는 릭 로우(Rick Lowe)가 뉴욕 솔로 데뷔 전시로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작품 몇 점을 선보였다. 몇 해 전 휘트니 비엔날레 작품으로 선정된 뒤 바로 진행한 것이었다. 웨스트 24번가를 따라 긴 줄이 늘어섰고, 직원들은 VIP를 위한 통로를 확보해야 했다. 멧(Met) 디렉터 맥스 홀라인(Max Hollein), 브루클린 미술관 디렉터 앤 파스테르나크(Anne Pasternak), 전 뉴욕시 문화 위원 톰 핑클펄(Tom Finkelpearl), 가나 출신의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아디아예(David Adjaye) 경 등이 그날의 VIP였다. 저녁 8시까지 입장할 예정이었지만, 8시 30분까지 갤러리가 사람들로 붐볐다. 62세의 로우는 마침내 9시쯤에나 앨라배마에서 처음으로 뉴욕에 발을 디딘 가족 12명과 함께 알트로 파라디소에 도착했다. 식당은 축하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몇 주 후 멧의 새로운 근현대 큐레이터로 공식 임명될 예정인 데이비드 브레슬린(David Breslin)이 아티스트 사이 개빈(Cy Gavin)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고시안 갤러리의 최고 운영 책임자 앤드류 패브리컨트(Andrew Fabricant)는 컬렉터들이 자리를 차지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아티스트 아월 에리즈쿠(Awol Erizku)는 마르니 선글라스를 쓴 채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 그 전시의 큐레이터 앤트완 사전트(Antwaun Sargent)가 앉아 있었다. 그는 2021년 초 디렉터로 갤러리에 합류했다. 특유의 스타일대로 꼼데가르송 재킷과 에센셸(Esenshel) 울 캡, 구찌 로퍼를 착용한 사전트는 젊은 사진가 타일러 미첼(Tyler Mitchell)을 위해 예약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당시 사전트는 가고시안에서 기획한 미첼의 전시를 런던에서 앞두고 있었다. 그날 미첼은 이날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가 스트랜드 서점(The Strand)에서 주최한 만찬에 참석하느라 바쁜 상황이었다. “정말이에요. 제가 여기 있을 필요가 없었다면, 저는 거기에 있었을 거예요. 못 믿으시겠지만 스트랜드에서 열린 보테가의 만찬에 참석했겠죠.” 사전트가 눈을 부릅뜬 채 말했다. 35세의 사전트는 Z세대 틱톡 스타의 감수성을 보여주면서 더 연배 높은 사람 특유의 진정성을 담아 말한다. 빈정거리는 기색 없이 발끈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는 그의 말은 종종 드라마틱하게 올라가는 톤으로 끝을 맺는다. 크로스컨트리 선수 출신인 그는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 자전거로 수백 마일을 달린 덕분에 유연한 몸을 자랑한다. 그래서 종종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몸을 꼬다가 최고조에 이르러서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자세를 취한다.

알트로에서 사전트와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하던 사람들은 그가 칵테일을 홀짝이며 의견을 개진하자 쉽게 화제를 전환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매출에 집착하는 갤러리로 꼽히는 가고시안에서 열린 로우 전시의 만찬이 얼마나 이례적인 일인지 얘기했다. 이 아티스트의 창작 작업은 가고시안과는 정말 거리가 먼 휴스톤 제3구에서의 커뮤니티 조성에 오랫동안 관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사전트가 그를 꿰차게 되었다. “팬데믹이 맹위를 떨칠 때, 제가 릭에게 전화를 걸어 ‘그쪽이 작업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고 말했죠.” 그가 ‘앤트와~완’이라고 소리치는 만찬 참석자들을 향해 ‘모든 이목이 쏠리는’ 건배를 하며 말했다.

2022 WSJ 이노베이터 어워즈에 참석한 제레미 O. 해리스(Jeremy O. Harris)와 타일러 미첼, 앤트완 사전트.

아티스트를 위한 밤이었지만, 여러 면에서 사전트의 밤이기도 했다. 사실 그는 이벤트 시작 몇 시간 전부터 “오늘 밤은 릭이 최고이고, 전부입니다”라고 내게 말하면서, 그런 사실을 부인했다. 그렇지만 그 건배에 앞선 외침이 보여주듯, 그 자리는 부인할 수 없는 사전트의 무대이기도 했다. 얼마 전만 해도 온라인에 글을 게재해 임대료를 긁어모으던 사전트가 가고시안에서 짧다면 짧을 수 있는 2년 동안 아티스트와 컬렉터를 연결해주는 이 상업 갤러리 세계에서 사람들이 환심을 사고 싶어 하고, 많은 관심이 쏟아지며, 긴장하게 만드는 세력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사전트가 아웃사이더에서 완벽한 인사이더로 나아가는 궤적은 수 세기 동안 흑인 아티스트가 소외되거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블루칩 갤러리와 최고 기관의 프로그램에 흑인 아티스트를 더 많이 이끄는 무브먼트가 한창인 가운데 나왔다. 사전트는 그 누구보다 이를 실천하고 있으며, 그는 그 과정에서 거의 10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확보한 예술계의 마이크로 셀럽(소규모 집단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큐레이션을 맡은 전시 오프닝은 젊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언론과 유명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오히려 콘서트처럼 보였다. 사전트가 연출한 전시 <소셜 웍스 II>가 열리는 동안 제이 지가 이 갤러리의 런던 지점에 들렀고, 사전트가 그에게 프라이빗 투어를 제공했다.

자정쯤 디저트가 나왔다. 그렇지만 사전트가 룸메이트와 함께 지내는 브루클린 다운타운 아파트로 돌아갈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는 며칠 후 사진가 미첼의 계속되는 상승세에 큰 도약이 될 첫 가고시안 전시의 작품 설치를 위해 런던으로 날아갈 예정이었다.

몇 차례 인터뷰를 가지면서, 나는 사전트에게 그가 차지하는 현재 미술 시장의 가장 높은 자리에 대해, 그가 맞닥뜨린 모든 역경과 심지어 여전히 영향을 주는 몇 가지 힘든 점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정확히 어떻게 도달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제가 개척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죠. 그래서 저는 그것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그가 말했다. “33세의 앤트완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으셨다면, 저는 절대 이런 답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제 인생을 통틀어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겠죠.”

2008년과 2018년 사이 미국의 유명 박물관 30곳이 매입한 작품 중 흑인 아티스트의 작품은 2.37%에 불과했다. 그래서 지난 몇 년간 수많은 대형 기관과 블루칩 갤러리가, 프로그램 편성과 컬렉션에서 흑인 아티스트의 지속된 불평등을 바로잡으려고 특별히 애써왔다. 이후 볼티모어 미술관과 브루클린 미술관은 여성과 유색인 아티스트의 작품을 매입할 기부금 마련을 위해 백인 예술가의 작품을 매각했다. 흑인 아티스트, 특히 구상화 분야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는 자신들의 작품 가격이 유통시장에서 급등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1차 시장의 작품 매입 대기자 명단이 너무 길다 보니 일부 세계 톱 컬렉터들도 작품을 매입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사전트는 거의 틀림없이 이 무브먼트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며, 보디 맞춤 재킷과 이세이 미야케 플리츠 의상을 입은 ‘레드 카펫에 오르는 사교계 제1의 큐레이터이자 딜러’다. 언론사 경영진 출신인 버나드 럼킨(Bernard Lumpkin)과 그의 남편 카민 D. 보쿠치(Carmine D. Boccuzzi)가 소장한 컬렉션 작품의 전시이자 사전트가 맷 와이코프(Matt Wycoff)와 함께 큐레이션한 <Young, Gifted and Black>은 3년 동안 순회 전시를 하고 있으며, UC 데이비스의 마네티 슈렘 미술관(Manetti Shrem Museum of Art)에 전시되어 있다. 사전트는 루이 비통 디자이너였던 故 버질 아블로의 대규모 전시 <Figure of Speech>를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기획했는데, 진취적인 스트리트 웨어 딜러들이 이 전시에 나온 선물과도 같은 작품을 리세일하려고 사들였다. 몇 해 전 사전트는 에이미 응(Aimee Ng)과 함께 프릭(The Frick) 미술관에서 바클리 L. 헨드릭스(Barkley L. Hendricks)의 작품 전시 기획을 요청받았다. 이 미술관에서 열리는 첫 흑인 아티스트의 전시였다. 그리고 예일 대학에서 사진 강좌를 진행했다. 이 사실은그가 아블로를 추종하는 젊은 신봉자들의 눈에 띄어 아블로 전시 리허설 후 브루클린 미술관 밖에서 택시를 잡다가 우연히 밝혀졌다.

사전트가 자신의 일을 해오면서, 그는 업계에 내재된 아트 큐레이터에 대한 ‘지식인인 척 젠체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적인 생각을 바꿔놓는다. 그는 늘 거리로 나간다. 그가 2019년 <새로운 흑인 선봉가(The New Black Vanguard)>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구찌가 밀라노에서 주최하고,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Tyler, the Creator), 아서 자파(Arthur Jafa),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등이 참석한 사인회를 동시에 진행했다. 지난해 3월에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 그 뒤에 <베니티 페어>의 애프터 파티, 마돈나와 가이 오시리(Guy Oseary)의 파티, 샤토 마몽(Chateau Marmont)에서 열린 제이 지와 비욘세의 파티에 연이어 참석했고, 곧바로 자신이 묵던 선셋 타워 스위트룸으로 가서 가방을 들고 나왔다. 휘트니 비엔날레에 로우의 작품이 포함된 것을 기념하는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미첼과 함께 서배너 예술 & 디자인 대학에서 강연하려고 출발했고, 그다음 베니스 비엔날레로 향하면서 핑크색 실크 스리피스 구찌 정장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했다.

“앤트완은 늘 스타일리시하죠. 그는 패션계와 음악계, 그 밖의 다양한 분야에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저와 앤트완, 우리는 늘 미술계의 퓨처(Future), DJ 에스코(Esco)와 비슷하다고 말하곤 했죠.” 에리즈쿠는 내게 유행을 선도하는 애틀랜타 래퍼와 그의 프로듀서 겸 매니저의 이름을 대며 말했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자신만의 노선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고, 업계가 그것을 받아들이자 근사하게 보상받았다는 면에서 사전트에 대한 비교가 아주 적절했다. 수년간 사전트는 <뉴욕 타임스>와 <뉴요커>에 글을 기고하는 프리랜스 비평가로 활동했다. 그는 업계에서 흔한 미술학 석사와 박사 학위도 없이, 말단 직원에서 조수, 딜러, 디렉터로 한 계단씩 사다리를 타고 오르지도 않은 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상업 갤러리에서 지금의 그 대단한 큐레이터 자리에 올랐다.

2022 톰 브라운 가을 컬렉션에 참석한 리치 샤잠(Richie Shazam)과 앤트완 사전트.

하지만 이 사실은 수많은 예술계 원년 멤버들에게 그를 자격 없는 사람으로 비치게 만들었다. 이것이 예술계에서 가장 추앙받는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거의 없기는 하지만, 사전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들에겐 일반적으로 몇 가지 불평거리가 있다. 많은 예술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가 시장 친화적인 흑인 아티스트를 찾아내고, ‘Black Social Practice’의 비호 아래 가고시안의 단골 고객에게 그들의 작품을 판매하는데, 특히 그가 그렇게 해서 수익을 낸다고 해서, 귀재라고 단언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한편 사진 기반 작품의 일부 학자들은 그가 주로 패션 사진가로 활동하는 ‘The Horror!’ 같은 자신의 친구들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의 예술가 선정을 비판했다. 그가 기획한 전시 오프닝에 끌어들이는 관중과 관련해서는, 일부는 ‘그것이 기껏해야 정신없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PR 정도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포퓰리즘을 추구하는 것은 블루칩 갤러리가 아이스크림 박물관으로 바뀌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듯 말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전트가 지나치게 빠르게 레드 카펫이나 패션쇼 앞줄에 등장하는 바람에 진지한 큐레이터로 대접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어느 정보통은 내게 “앤트완 사전트는 <가십걸>에 출연했죠.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이 <M*A*S*H>(한국전쟁 당시 야전병원을 배경으로 엮은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미국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상상이나 되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글로 쓰는 비평가들도 있다. 눈에 확 띄지만 차분하게, 치명적인 리뷰에서 <뉴욕 타임스>의 존경받는 홀랜드 코터(Holland Cotter)는 “물론 가고시안은 그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모든 면에서 매우 전통적이다. 사실 <소셜 웍스>의 가장 놀라운 점 한 가지는 그 전시가 그곳에서 열렸다는 사실이다”라고 썼다. 작지만 영향력 있는 <Manhattan Art Review>는 그 전시를 심하게 혹평했다. “근본적으로, 이 전시가 예술 작품 자체의 특성과는 관계없는 문화적 연관성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는 지속적인 가정이 문제다”라고 이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지독한 혹평의 대가인 작가 숀 태톨(Sean Tatol)이 적었다.

사전트는 딱히 관심은 없지만 자신이 이런 비평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아트포럼>은 제가 했던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리뷰를 하거나 글을 쓰지 않았어요. 단 한 번도요.” 그가 내게 말했다. “저는 10년 동안 이 일을 해왔죠. 그리고 저는 누구도 하지 않던 규모로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술계 한편에서 좀처럼 가시지 않는 극도의 증오심이 있을 것 같기는 해요. 제게 관심이 쏠리면,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죠. 그렇지만 그 누구도 면전에 대고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아요.” 한 성명서에서 <아트포럼> 편집장 데이비드 벨라스코(David Velasco)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앤트완 사전트의 글과 전시가 이 잡지의 다양한 부분에서 언급되어왔다. 리뷰 섹션이 크지 않고, 관심을 원하는 수백 개의 전시가 매달 열린다. 우리가 미처 다루지 못하는 수많은 훌륭한 전시가 늘 있다.”

“그런 상황이 그의 상승세에 제동을 걸지는 않았다. 파크 애비뉴와 75번가에 자리한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여러 전시를 맡았던 그가 이제 이 갤러리의 베벌리힐스 지점에서 <소셜 웍스> 에디션을 무대에 올릴 것이다. 이후 로스앤젤레스에서 두 번의 단독 전시를 개최할 것이며, 이는 그가 완벽하게 해내는 또 하나의 작업이 될 것이다. 160억 달러 규모의 예술 및 사회 정의 기금인 포드 재단(Ford Foundation)의 대런 워커(Darren Walker) 회장은 “앤트완은 컨설턴트들이 ‘양쪽의 재능을 갖춘 리더’를 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 ‘르네상스 사람’이며, 저도 그가 진정으로 다양한 분야에 정통한 르네상스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훌륭한 큐레이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단한 작가이며 자본가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으며, 그는 자신감 넘치게 그것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큐레이터’라는 용어는 전시를 위해 미술품을 고르고, 지적인 엄격함으로 그 선택을 정당화하는 글을 쓰고, 그 작품이 그 공간의 어디에 위치할지 정하는 사람을 전적으로 뜻했다. 큐레이터는 갤러리보다는 박물관에서 일했다. 그들은 예술품을 매각하는 혼란스러운 과정에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그런 전형적인 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도적, 상업적 영역을 편안히 넘나드는 사전트는 이미 아웃라이어(평균치에서 크게 벗어나서 다른 대상과 확연히 구분되는 표본)였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나는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의 끊임없이 활동하는 아티스틱 디렉터이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큐레이터’를 검색하면 맨 위에 뜨는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와 얘기를 나눠보았다. 그는 사전트를 동료로 여기고 있었다. “양쪽이 서로에게 배웁니다. 알죠?” 오브리스트가 말했다. “다양한 전문 분야, 커뮤니티, 관행에 기여하면서, 다양한 전문 분야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것은 더 젊은 세대의 아티스트에게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죠. 큐레이터로서 앤트완의 활동도 그런 면을 반영하는 것 같아요.”

오브리스트의 주장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소셜 미디어가 초래한 더 광범위한 노출 덕분에 현대미술의 관람객이 늘었고, 이에 따라 아웃사이더의 자세를 가졌으면서도 인사이더의 요령을 지닌 유색인 큐레이터로서 사전트의 역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해지고 있다고 한다. 브루클린 미술관 관장 파스테르나크는 이렇게 말했다. “앤트완은 커뮤니티, 매우 광범위한 커뮤니티에 다가가고 있어요. 저는 1980년대 출신이고, 그때는 달랐죠. 당시 예술계는 정말 백인스러웠죠.” 그녀는 다년간 대화를 나눈 끝에 아블로에게 그의 개념예술 작품을 위한 전시를 열어준 인물이었다. 그녀는 9월에 있었던 로우 전시의 오프닝에 대해서도 떠올렸다. “거의 30년간 릭과 친구로 지냈어요. 그리고 런던의 첼시 거리에서 목격한 다양성에 깜짝 놀랐죠.” 그러면서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5~6년 전만 해도 그런 것을 못 봤는데 말이죠.”

대런 워커는 사전트를 두고 ‘최고의 뛰어난 코드 스위처’라고 내게 말했다. “파크 애비뉴와 부시윅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맞죠?” 워커가 말했다. “그는 이스트사이드와 이스트뉴욕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앤트완이 하는 일은 미술사, 특히 근현대 미술사의 규범을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우수한 것이 뭔지 재정의하고, 무엇이 위대한 예술의 우수성을 구성하는지, 누가 그것을 생산하는지에 대해 더 폭넓게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전트는 시카고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 레슈나 추(Reshuna Chew)가 3남매를 나중에 철거된 카브리니 그린 홈즈(Cabrini-Green Homes) 공공 주택에서 키웠다. 추는 월그린(Walgreens)에서 매니저로 일했고, 아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 그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려고 노력했다. “어머니는 우리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어요. 그런 게 그저 좋았어요. 돈에 대해 의식하지 않았거든요.” 사전트가 말했다.

2023 GQ 글로벌 크리에이티비티 어워즈에서 만난 타일러 미첼과 그레이스 웨일스 보너, 앤트완 사전트.

우리는 다임즈(Dimes)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컬렉터들 대부분이 카프리섬에서 요트를 타거나 애스펀 산장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휴가를 떠나는 7월 말이었다. 사전트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계속 업무를 처리했다. 문자로 미첼의 작품을 팔고, 가고시안 아시아 디렉터 닉 시무노비치(Nick Simunovic)와 중국에서 열리는 프라이빗 컬렉션에 대해 논의했다. 그들에게 로우의 작품을 제안하기 전 분위기를 살피려는 의도였다.

사전트는 성장하면서 일찍 정치에 흥미를 가졌다. 덕분에 집에서 30분 걸리는 마더(Mather) 공립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특별 법률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판사를 위해 일하는 인턴으로 활동했고, 버락 오바마의 미국 상원 선거 캠페인을 위해 자원봉사 했고, 모의 재판 팀에서 경쟁했으며, 육상과 크로스컨트리를 연습했다. 결국 그는 시카고 게이 클럽 지역인 보이즈타운(Boystown)에서 이 도시의 문화와 밤의 유흥을 조금씩 즐기기 시작했다. 사전트는 식당에서 아티스트나 시인과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또 화가 지넷 헤이즈(Jeanette Hayes)와 오바마 행정부 수반의 10대 아들이었던 챈슬러 베넷(Chancelor Bennett), 훗날의 찬스 더 래퍼(Chance the Rapper) 같은 친구들과 어울렸다.

사전트는 외교학과에서 공부하려고 조지타운 대학에 진학했고, 힐러리 클린턴을 위해 인턴으로 일했다. 그는 슬슬 정치가 버거워지기 시작했고,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브루클린 이스트 뉴욕에 있는 어느 학교의 비영리단체 티치 포 아메리카(Teach for America)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한 대학 친구가 그가 지낼 수 있는 방 한 칸을 구해주었다. 구겐하임에서 일하는 지아지아 페이(JiaJia Fei)의 아파트를 셰어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사전트가 자신의 소지품을 싸 들고 페이의 아파트에 들어서자, 그녀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외향적인 룸메이트가 자신이 나가고 자신의 임대 계약을 사전트가 이어받을 것이라고 공표했다. “그는 유치원 선생님이었죠. 그래서 저는 ‘좋아, 괜찮을 거야. 미친 사람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했죠.” 페이가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함께 살고 있다.

페이는 그 당시에는 전무하던 구겐하임의 소셜 미디어에서 입지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2012년이었다. 그때 페이가 인스타그램의 잠재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즉 어떻게 전 세계 휴대폰 화면으로 개인 컬렉션의 보물을 보낼 수 있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당시 사전트가 LSAT(미국 법학 대학원 입학시험)를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던 것을 떠올린 페이는 갤러리에서 개최하는 만찬이나 패션계 파티에 그를 데려가면서 새 룸메이트에게 예술계 입문을 제안했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전시를 돌았고, 페이는 자신의 피드로 쓸 지속적인 콘텐츠를 수집했다. 사전트가 종종 그 사진에 등장했고 결국 자기만의 계정을 시작했다. 사전트는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학교에서 근무하고, 그다음에는 패션 촬영을 하거나 비행기를 타려고 필사적으로 뛰어다녔다고 말했다. “학교가 JFK 공항과 가까워서 아주 다행이었죠.”

사전트는 2013년 5월 티치 포 아메리카에서 의무를 마무리 지었고, 글을 게재할 최대한의 기회를 포착하며 글쓰기에 집중했다. 그해 하반기, 그는 <허핑턴 포스트>에 게재한 글에서 CNN 앵커 돈 레몬(Don Lemon)이 젊은 흑인 남성들에게 거들먹거리며 건넨 조언의 ‘논쟁거리가 되는 부분’에 대한 통렬한(금전적 지원 없는) 견해를 밝혔다. 이 게시물이 입소문이 났다(레몬은 현재 현대 흑인 아티스트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으며, 사전트와 친분을 쌓아가고 있다. 그해 여름 그들이 아디아예 축하 파티가 열린 대런 워커의 아파트에서 만난 것이다).

그다음 버즈피드(BuzzFeed)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그곳에서 사전트는 대부분 인터넷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대중문화 기사와 기타 콘텐츠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성했다(사전트가 작성한 기사 헤드라인 중 하나가 ‘27번이나 터무니없이 완벽하고 아름답고 완벽해 보였던 올리비아 포프(27 Times Olivia Pope Looked So Ridiculously Perfect and Beautiful and Perfect)’였다). 하지만 사전트는 실제로 예술에 대해, 주로 젊은 유색인 아티스트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 했다. 그는 바이스(Vice)에서 건당 150달러에 아이템 몇 가지를 게재했다. 그렇게 그는 월세 750달러를 감당할 수는 있었지만, 빠듯한 수준이었다.

그는 “저한테 그 일이 주어진 것조차 아주 감사해요. 수많은 흑인 작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죠. 서로 의뢰를 주고받는 일조차 어려운 사람들이니까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기존 출판계에서 대표적인 작가는 거의 백인이었고, 사전트가 그 분야에 진출했을 때 이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페이는 이렇게 기억했다. “<뉴욕 타임스>의 홀랜드 코터가 흑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에게 밝혀야 했던 날이 떠오르는군요… 그가 정말 충격받은 듯했죠.”

2014년 예술계 비영리단체 크리에이티브 타임(Creative Time)은 윌리엄스버그 해안가에 있는 도미노 설탕 공장이었던 곳에서 카라 워커(Kara Walker)의 새 작품을 공개했다. 35피트의 스핑크스 같은 모습의 이 조각품은 지난 10년 동안 가장 많은 화제를 낳은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워커는 사전트가 학부생이었을 때부터 그의 척도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뉴요커>에 인터뷰를 제안했지만, 결국 그 잡지는 그것을 거절했고, 전속 작가 힐튼 알스(Hilton Als)가 그 전시에 대한 평론을 썼다. 잠재력 있는 임무의 거절은 변화무쌍한 디지털 미디어 경제에서는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하지만 그 일은 20대의 사전트에게 크게 보였다. 사전트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저녁 식사 자리에서 힐튼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스물세 살에 <뉴요커>에서 첫 기사를 쓰려고 애쓰고 있었죠… 그리고 그 일로 제 사기가 꺾이지는 않았지만, 살짝 위축되기는 했죠’라고 말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알스는 그 대화에 대한 질문을 받자 “앤트완이 그것을 사실로 믿어서 아주 유감입니다”라고 말했다. 사전트는 결국 잡지 <콤플렉스(Complex)>에서 그 기사 작성을 허락받았고, 자신의 영웅인 워커가 가장 위대한 문화적 교차점의 순간에 있을 때 인터뷰한 것은 그의 야망을 부추겼다. 그는 자신의 글이 대중에게 새로운 흑인 아티스트에 대해 알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주류에 있는 사람들의 관행에 대해 분명히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는 종종 흑인 아티스트의 작품을 무감각하게 설치하는 컬렉터에 주목했다. 그는 언젠가 백인 컬렉터의 집을 방문한 일을 떠올렸다.

“제가 코너를 돌았더니 빌어먹을 카라 워커의 작품 실루엣이 보이는 거죠”라고 사전트가 말했다. “좋아요. 뭐든 좋아요. 하지만 ‘뭐예요? 왜 이것들을 20점이나 갖고 있나요? 왜 20점씩이나 갖고 있는지 내게 말해줄 수 있나요?’라고 말했죠.”

웨이트리스가 우리의 음식을 내왔다. 워커의 전시가 열릴 때쯤, 사전트는 자신의 글을 거의 전적으로 예술 쪽으로 돌렸다. 그는 갤러리 전시를 위한 카탈로그 에세이를 기고했고, 이는 초기에 맡은 큐레이터 작업으로 이어졌다. 사진 비영리단체 애퍼처(Aperture)를 위해, 그는 <새로운 흑인 선봉가>를 편찬했고, 그 후 여러 번 재판을 찍고 순회 사인회를 했다. 그 후 자신의 트라이베카 아파트를 오랫동안 문화 살롱의 터전으로 삼았던 럼킨이 그를 찾아와 자신의 컬렉션을 다루는 단행본을 의뢰했다.

럼킨과 그의 남편 보쿠치는 헨리 테일러(Henry Taylor), 라시드 존슨(Rashid Johnson), 조던 캐스틸(Jordan Casteel)을 비롯한 흑인 아티스트의 작품으로 그들의 컬렉션을 구성하고 있었다. 컨커디어 대학이 럼킨과 보쿠치에게 컬렉션 작품으로 전시를 요청했을 때, 그들은 사전트에게 그들의 컬렉션 매니저 맷 와이코프와 함께 전시를 기획해달라고 부탁했다. 비슷한 시기에, 사전트는 그 컬렉션을 기록한 책의 편찬을 도왔던 것이다.

현대 흑인 아티스트를 위한 시장이 형성되고 있었고, 그 전시는 타이밍에 딱 들어맞았다. 2018년 5월 숀 콤스(Sean Combs)는 케리 제임스 마샬(Kerry James Marshall)의 ‘Past Times’를 2,110만 달러에 매입해, 생존한 흑인 아티스트의 작품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그 흥분이 1차 시장으로 조금씩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미국을 대표한 흑인 추상화가 마크 브래드포드(Mark Bradford)의 신작도 무려 500만 달러에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다.

2020년 2월 럼킨의 전시가 사전트의 지휘 아래 전국 순회를 시작했을 때 잘나가는 비평가들이 더 정기적으로 흑인 아티스트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때로는 사전트에게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찬사를 읽어보면, 이제는 너무 과장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또는 이 백인 비평가들이 흑인 예술의 위대성을 평가할 때 인종차별주의자로 비치고 싶지 않아 거짓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사전트가 말했다. “정말 모든 전시가 훌륭할까요?” 그가 1분처럼 느껴지는 긴 시간 동안 ‘모든’이라는 말을 끌었다. “그 전시 모두요? 유감이지만… 7년 전 리뷰에서 ‘완전 쓰레기’라고 해놓고, 이제는 찬사를 보낸다니 말이 되나요?”

어느 정도 예상한 대로, 갤러리에선 흑인 아티스트에 대해 글을 쓸 뿐 아니라 그들을 갤러리의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이는 사전트 같은 직원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2018년 가고시안에 최고 운영 책임자로 합류했고, 많은 이들이 77세 딜러왕의 후계자로 점찍은 앤드류 패브리컨트의 레이더망에 앤트완이 포착되었을 때, 이미 몇몇이 그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패브리컨트는 “앤트완을 처음 만났을 때, 스타의 힘을 볼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제 말은, 그 남자는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거죠. 그는 엄청난 매력이 있고,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해냈죠. 그는 예술가들과 관계를 만들어갔고, 패션계와도 인연을 만들고 있습니다… 창의적인 면을 지녀 예술품을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의 논리적인 면도 지니고 있죠. 과거에는 그다지 훈훈하거나 만만한 직장은 아니었던 가고시안에서 그가 쌓은 경험 속에 내재된 독특한 점이죠.” 결국 그는 1970년대 중반 웨스트우드 빌리지 거리에서 포스터 판매부터 시작해 지금은 연간 1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갤러리 설립자에게 소개되었다. 사전트는 그룹 전시를 준비하는 파트너십에 동의했고, 그 결과 그 갤러리 핵심 인물들이 들어본 적 없는 아티스트가 그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재작년 10월 가고시안은 내게 “예술계는 오랫동안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흑인 아티스트가 경쟁의 장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살짝 깨닫게 되었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래서 많은 다른 갤러리처럼 제 갤러리도 마찬가지로 다양성을 고민하고 있었죠. 하지만 결국 저는 그 아티스트들이 놀랍도록 혁신적이고 참신한 예술가라는 점을 깨달았죠. 앤트완이 제게 데려온 아티스트는 ‘오, 세상에, 당신은 이 아티스트가 왜 흥미롭다고 생각하죠? 정말, 별로인데. 찬성할 수 없어요’라는 말이 나오게 할 법한 인물들이 아니었어요. 대개는 정반대 평이 나왔죠.”

사전트는 가고시안에서 첫 데뷔 전시를 위해 그 시점까지 했던 것보다 더 야심 찬 제안을 했다. 그것이 바로 <소셜 웍스>였다. 커뮤니티 조성하기와 어느 정도 관계된 공연 및 설치미술을 기반으로 하는 작업 방식에 참여하는 흑인 아티스트 그룹의 전시였다. 아디아예는 60톤이나 나가는 독립된 조각품(그의 첫 조각품)을 제작했다. 린다 구드 브라이언트(Linda Goode Bryant)는 제대로 가동될 준비를 갖춘 도시 농장을 설치했고, 농산물은 봉지에 담아 벽에 고정했다. 티에스터 게이츠(Theaster Gates)의 <프랭키를 위한 노래(A Song for Frankie)>(2017~2021)는 전설적인 시카고 하우스 뮤직의 개척자 프랭키 너클스(Frankie Knuckles)의 아카이브에서 구한 음반 5,000장을 사용했고, 그의 음악이 그 전시 내내 크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누군가는 모든 것을 팔아야 했다. 역사적으로 큐레이터는 때때로 갤러리를 위해 일회성 작업을 하면서 관습적인 측면에 머물러왔고, 큐레이터-딜러라는 개념은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다. 사전트는 그것을 꽤 쉽게 받아들였다.

패브리컨트는 “그가 이 아티스트 대부분을 발굴하고 있고, 단골 의뢰인과 이런 작품을 원하는 사람이 꽤 여러 명 있죠. 이것은 고도의 지능이 요구되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꽤 빨리 그 일에 뛰어들었죠. 그리고 그는 사회적 상호작용뿐 아니라 돈 때문에 그것을 즐깁니다.” 가고시안은 그런 업무 영역의 확장은 사전트에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저는 그를 세일즈맨이나 미술상이라고 부르지 않을 거예요.”

사전트는 그의 월급이나 수수료를 밝히지 않을 것이다. 바이스에 게재한 아이템 한 건당 받았던 150달러보다는 분명 더 많다. 분명 사전트의 큐레이션과 판매 수수료에 눈을 치켜뜨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상업 갤러리에서 흑인 아티스트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전시를 개최하는 것이 미치는 영향은 유색인 아티스트를 지원하는 힘을 가진 자리를 차지한 유색인인 자신이 품은 야망에서 중요한 요소다. 모든 예술 기관이 이 목표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런 전시를 하고, 존경받는 큐레이터나 흑인 큐레이터가 와서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게 해도, 판매할 작품이 없습니다. 그것은 값비싼 PR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그런 것은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무례한 일이죠. 우리는 특별한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경쟁할 기회를 부탁할 뿐입니다. 바로 그 점이 제가 그 갤러리에 합류하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줬어요. 그들이 경쟁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를 저한테 주었기 때문이죠. 제가 그 기회를 통해 해왔던 것을 볼 수 있잖아요. 그리고 필요한 것은 그것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런저런 것을 바로잡아가고 있어요…’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집어치우라고 해요. 우리는 미국에서 살아왔고,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경쟁의 기회만 주면 되죠.”

몇 해 전 런던에서 프리즈 아트 페어가 시작되기 며칠 전, 가고시안은 데이비스 스트리트에 있는 메이페어 전시 공간에서 타일러 미첼의 전시를 처음 열었다. 27세의 미첼은 <보그> <베니티 페어> 화보 촬영을 통해 최초로 많은 찬사를 받았고, 이 전시 오프닝은 런던 패션 위크가 한창인 9월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 서거로 연기된 상태였다. 그 전시는 그 전에도 이미 여러 위태로운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이 아티스트가 갤러리에서 처음 여는 전시라는 점, 그림에 열광하는 예술 시장에서 열리는 사진 전시라는 점, 이제 국제 아트 페어의 열광과 경쟁해야 한다는 점이 바로 그런 요소였다. 나는 전시로 향하던 중 메이페어를 거닐고 있는 미첼을 우연히 만났다. 우리가 그 갤러리에 가까이 다가가자, 창문을 통해 딥티크(Diptych, 둘로 접을 수 있는 목판 성상화) 사진 몇 점이 보였다. 가고시안의 다른 갤러리와는 다르게, 이 갤러리에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르는 통창이 설치되어 있고 자정까지 조명을 끄지 않아, 일반인이 외부에서도 전시의 대부분을 볼 수 있었다. 이 작품들은 미첼에게 중요한 돌파구가 되었다. 그것들은 셀럽의 화보를 촬영해온 그의 경력을 바탕으로 해도, 렌즈를 젊은 남녀에게 돌려 미국 흑인에 대한 일종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갤러리 뒤의 위장된 벽 속에 사전트의 사무실이 있었다. 나는 그 벽을 열어 책상에 앉아있는 사전트를 찾았다. 그는 갈색 버버리 정장(‘에이, 영국이니까요’)과 런던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이며 런던에서 열린 <소셜 웍스 II>에 참가한 그레이스 웨일스 보너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새벽 5시까지 마돈나의 메릴본(Marylebone) 저택에서 시간을 보냈지만(‘오, 세상에, 그 집에는 프리다 칼로와 피카소 작품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큰 가슴을 가진 여자들을 소재로 작품을 창작하는 그 사람, 오! 맞다, 존 커린(John Currin)의!’), 그는 피곤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프닝이 시작된 지 2분 만에 머리에 모자를 쓰면서 “완전히 문전성시군요”라고 말했다. 미셸 오바마의 초상화를 그렸고, 360만 달러라는 높은 판매가를 기록한 신작을 발표한 아티스트 에이미 셰럴드(Amy Sherald)가 들어왔다. 회화 작품이 경매에서 195만 달러 이상에 팔린 리넷 이아돔 보아케(Lynette Yiadom-Boakye)도 참석해, 영국 출신 동료 아티스트 앤시아 해밀턴(Anthea Hamilton)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떠오르는 스타 로렌 핼시(Lauren Halsey), 런던 새디 콜스HQ(Sadie Coles HQ)에서 전시를 여는 화가 알바로 배링턴(Alvaro Barrington)과 빈 태생으로 런던에서 활동하는 딜러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도 참석했다. 보너와 아일랜드 출신 동료 패션 디자이너 시몬 로샤, 영국 <보그> 편집장 에드워드 에닌풀도 전시에 모습을 보였다. 전날 미첼은 안나 윈투어에게 이미 프라이빗 투어를 해주었다. 크리스티안 아만포(Christiane Amanpour)도 있었지만, 고급 정장을 차려입은 금융가들과 수백 명의 유색인 젊은이들도 술집에서 귀가하는 길에 무슨 소란인지 엿보려고 그곳을 찾았다. 7시 40분. 세일즈 어시스턴트가 갤러리에서 거리로 뛰쳐나오더니 사전트의 어시스턴트에게 다가가 전시의 매진 소식을 전했다. 잠시 뒤, 사전트가 몇 달 동안 공들여온 거래를 매듭지으며, 전시 공간 뒤쪽 사무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전부 팔렸어요. 심지어 에디션도요. 사진 작품 판매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죠?” 그가 말했다. “제가 그 작품들의 2/3를 직접 팔았죠. 제가 팔 수 있을지 없을지 의구심이 있었다면…”

갤러리가 여전히 북적이는 가운데 사전트, 미첼 그리고 더 많은 VIP들이 메종 에스텔(Maison Estelle)에 마련된 프라이빗 공간으로 발길을 옮겼다. 메이페어에 자리한 이 프라이빗 클럽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촬영 금지’ 정책 때문이다. 손님들에게 카메라 렌즈에 스티커를 붙이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오브리스트가 그곳을 찾았고, 그뿐 아니라 아트 페어에 전시할 미첼의 작품 몇 점을 의뢰한 프리즈 마스터스(Frieze Masters)의 관장 네이선 클레멘트 길레스피(Nathan Clements-Gillespie)도 동석했다. 미첼의 할리우드 에이전트를 맡은 UTA 직원과 그에게 지난해 첫 갤러리 전시를 마련해준 잭 샤인만(Jack Shainman) 갤러리의 대표도 있었다.

샴페인과 칵테일이 제공되고 몇 시간이 흐르자, 웨이터들이 미첼의 전시 이름을 맨 꼭대기에 필기체로 적어놓은 거대한 케이크를 들고 나왔다. 사전트는 휴대폰 카메라에 붙인 스티커를 떼더니 사진을 찍었다. “많은 일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정말, 여기까지 왔군요.” 케이크 조각이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는데 사전트가 한 손에 칵테일을 들고 내게 말했다. “그들은 저를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결국 우리는 여기에 이르렀죠.” 바로 그때 세일즈 어시스턴트가 빛이 번쩍이는 전화기를 손에 든 채 다가오더니 그를 살짝 잡았다. 사전트가 내게 양해를 구하며 말했다. “잠깐만요. 업무 처리 좀 할게요.” (VK)

Nate Freeman
사진
Rafael Pavarotti (Art + Commerce)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