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정희민, 회화의 경계를 빙글빙글 넘어서 #여성예술가17

2023.09.06

정희민, 회화의 경계를 빙글빙글 넘어서 #여성예술가17

감각을 곤두세우자 펼쳐진 기이한 현상과 풍경. 열렬한 수신자 정희민이 회화의 경계를 빙글빙글 넘나든다.

두산갤러리에서 선보이는 개인전 <수신자들>을 위한 막바지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정희민을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금천구 독산동에 자리한 정희민의 작업실. 온갖 곳에서 흐물거리는 보랏빛의 아크릴 미디엄(물감에 섞여서 질감과 부피감을 증폭시키는 보조제)과 그것들이 엉겨 붙은 거대한 작품으로 가득한 풍경이 외계 생물의 습격을 받은 후를 짐작게 한다. 새 개인전 <수신자들(Receivers)>을 위한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다. 정희민은 제13회 두산연강예술상 미술 부문 수상자로 두산갤러리에서 9월 13일부터 10월 21일까지 신작 회화 10점과 입체 설치 3점 내외를 선보인다. “아크릴 미디엄은 까다로운 재료예요. 다 말라야 활용이 가능해지는데 습도가 높으면 말리는 데만 4~5일씩 걸리거든요. 이 소재에 골몰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아서 아직도 예상치 못한 문제로 씨름할 때가 많아요. 그런 걸 극복하면서 작업에 깊이를 더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느릿느릿 평온한 그의 음성을 따라 작업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크릴 미디엄을 늘어뜨리거나 뭉쳐서, 일부를 잘라내거나 찢어서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꽃이다. 2년 전, 형형색색의 배경을 ‘까만 꽃’으로 뒤덮은 그림 ‘Iris’(2021) 이후 정희민은 꽃에 집중해왔다. “자연물에서 느끼는 감흥이 큰 것 같아요. 꽃이 지닌 면과 구조, 거기에서 피어나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거든요. 꽃 중에서도 특히 아이리스를 좋아하는데 조형적인 매력이 대단해요. 뭔가를 감싸거나, 잔뜩 주름져 있거나, 흘러내리거나, 하나의 꽃이 품은 장면이 굉장히 다채롭죠.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꽃의 겹과 결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과정이 즐거워요.”

먼 곳에서의 부름, 2022,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Paris·Salzburg·Seoul. ©Heemin Chung, Photo: Artifacts
가려진 신부, 2022,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Paris·Salzburg·Seoul. ©Heemin Chung, Photo: Artifacts

평면에서 조형적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감수성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획득했다. 홍익대학교 회화과에서 조소를 복수 전공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조형예술과 전문사로 평면 조형을 연구하며 손으로 직접 만들고 싶은 본능이 생긴 것이다. 이제는 회화와 조각이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입체적인 회화를 그리기도 하고, 조형을 만들기도 한다. 올 초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열린 단체전 <지금 우리의 신화>에서 선보인 ‘사랑을 울부짖는 작은 사물들’(2022)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결과로 목소리와 뼈만 남은 신화 속 인물 ‘에코’를 모티브로 한 설치 작품이다. 준비 중인 개인전에서도 공감각적 경험을 증폭시키는 대형 입체 조각을 내놓는다. 정희민에게는 모든 것이 회화다. 그는 양감과 질감을 더하면서 회화의 한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회화의 정의는 아직도 모르겠고 때때로 달라져요. 다만 점점 더 포괄적인 장르로 느껴지긴 해요. 정말 모든 것이 다 회화일지도 몰라요.”

정희민, 제이디 차, 한선우가 함께 지난 2월까지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선보인 단체전 <지금 우리의 신화> 전시 전경.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Paris·Salzburg·Seoul. ©Heemin Chung, Photo: Artifacts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기>(2021), <재난 감각>(2020), <프루프록의 평행우주>(2020), <PsychedelicNature>(2019) 등 일상과 사회에 대한 날 선 감각을 앞세운 단체전에 꾸준히 초대받으며 개성 있는 시선을 인정받은 정희민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예술가라는 꿈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다. “고 3 때 입시 학원에 가면서 그림을 그렸어요. 사실 미대에 입학하고 나서도 이 일을 오래 하진 않을 거라고 장담했죠. 대학원에서 좋은 교수님과 동기들을 만나면서, 이 일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보면서 미술의 매력과 가치를 깨닫게 됐어요. 그 후 저만의 것을 찾아서 정말 더듬거리며 여기까지 왔죠.” 정희민의 첫 번째 개인전은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제의 파랑>에서 그는 이미지가 마구잡이로 생산되고 편집되고 유통되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은 잔상을 중첩된 이미지로 표현했다. “미술 학도들이 으레 그렇듯이 학교를 졸업한 뒤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했어요. 주체적인 입장으로 뭔가를 이야기하기보다 매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갈피를 잡아갔죠.” 머지않아 정희민의 그림은 디지털 시대의 회화로 주목받았고,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통해 가상과 실재, 평면과 입체가 혼합된 이질적인 현실을 마주했다. ‘촉각’에 집중한 세 번째 개인전 <An Angel Whispers>(2019)는 앞으로의 행보를 위한 훌륭한 발판이었다. 연약하게 덩어리진 물감이 맺힌 회화와 다양한 상태와 질감으로 변하는 물질을 응시한 단채널 비디오를 통해 정희민은 디지털 세계에서 뭔가를 붙잡고 감각하려는 현대인의 욕망을 비췄다. “이 전시를 기점으로 내가 앞으로 어떤 걸 하고 싶은지 실마리가 잡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예술가로서 표현하고자 한 것에 사람들이 공감해주는 것을 보고 자신감을 얻기도 했고요.”

최근 그의 작업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확장된 부피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약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던 그림 위 투명한 아크릴 미디엄은 어느새 잔뜩 증식하고 팽창해 눈에 띄는 양감과 질감을 자랑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지나 어느새 디지털 시대에 완전히 적응한 신인류가 등장했듯 아크릴 미디엄은 정희민의 새로운 언어적 도구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새 시대에 우리가 기억하고, 지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죠. 작업 초기에는 그런 세상을 포착하고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 그런 시간을 통과한 신체가 어떤 상태인지에 훨씬 관심이 가요.” 그는 빠르게 바뀌는 세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위기감은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는 무기력한 예술가가 아니다. 정희민은 달라지는 세상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을 반기며 전진하고 있었다.

아침 낭송, 2022,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Paris·Salzburg·Seoul. ©Heemin Chung, Photo: Artifacts
Iris, 2021,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Paris·Salzburg·Seoul. ©Heemin Chung, Photo: Artifacts

새로운 전시 <수신자들>은 외부의 자극을 흡수함으로써 활짝 만개한 1987년생 아티스트 정희민의 현재를 상징하는 이름처럼 들리기도 한다. 물론 ‘Receivers’라는 단어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소네트의 한 구절 “우리가 언제 끝없이 열려 있는 수신자가 될 수 있을까?(Shall we be endlessly open and receivers?)”에서 따왔다. 책은 그의 소중한 영감 보따리다. 그는 첫 영상 작업 ‘아이의 노래’(2019)의 제목을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도입부에 등장하는 페터 한트케의 시에서 빌려왔다. 개인전 <How Do We Get Lost in the Forest>(2022)에서 선보인 신작은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환각제의 일종인 메스칼린을 복용한 후 유디트의 치맛주름을 묘사한 텍스트를 모티브로 삼았다.

삶에서 얻는 모든 자극이 한곳으로 흘러가는 극한의 몰입은 예술가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책뿐 아니라 작업하며 귀 기울이는 팟캐스트와 친구들과의 대화까지 모든 것이 고스란히 작품에 투영된다. “단순히 몇 시간 집중하는 게 아니라 몇 개월 동안, 혹은 1년 내내 하나의 작업에 골몰한 상태로 살아가는 거잖아요. 재료가 이끄는 대로 우연적 효과와 발견을 따라가기도 하지만 결국엔 가장 중심이 되는 생각을 붙들고 씨름하며 작업하는 것이거든요. 모든 신경이 하나에 집중된 상태가 작업을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인 것 같아요.” 새로운 무대도 몰려오고 있다. 내년 말에는 타데우스 로팍 런던에서 전시를 열고, 최근 수상한 두산연강예술상 특전으로 두산갤러리 해외 레지던시(뉴욕 ISCP) 입주 기회도 얻었다. 올해 정희민이 사뭇 다른 마음가짐으로 캔버스를 마주하는 이유다. “이젠 깊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어요. 이것저것 탐색하고 많이 더듬어봤다면 내 영역과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그 안을 파고드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빈 캔버스는 여전히 두렵지만 한번 손을 움직이면 수많은 자극과 영감이 그의 손을 춤추게 할 것임을 안다. 열정적인 수신자 정희민의 세계가 끝없이 요동친다. (VK)

#여성예술가17

포토그래퍼
김형상
류가영
사진
Artif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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