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사하라 론지가 목격한 풍경 #여성예술가17

2023.09.07

by 김나랑

사하라 론지가 목격한 풍경 #여성예술가17

사람들은 끊임없이 오고 간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사하라 론지는 그런 풍경의 유일한 목격자다.

티모시 테일러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New Shapes>에서 사하라 론지가 자신의 대형 작품 ‘Tennis Club(Sahara Longe, ©Sahara Longe, Courtesy of Timothy Taylor)’을 바라보고 있다.

SAHARA LONGE

“그 칵테일 드셔보셨어요? 너무 맛있어서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숙취로 죽을 것 같긴 하지만요.” 사하라 론지(Sahara Longe)는 티모시 테일러(Timothy Taylor) 갤러리 런던에서 열린 개인전 오프닝 파티의 주인공이었다. 행사가 끝난 다음 날 오전 11시, 론지는 여전히 속이 울렁거린다고 말하면서도 행복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주 즐거운 밤이었어요.” 의상 때문에 당황스러운 에피소드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제가 입고 있던 비비안 웨스트우드 드레스 기억하시죠?” 그녀가 은밀한 목소리로 나에게 되물었다. “사이즈가 너무 작긴 했는데 예뻐서 그냥 샀거든요. 그런데 어제 누군가 저를 좀 세게 끌어안았는지 지퍼가 터진 거예요. 옷이 갑자기 헐렁해지는데 아주 아찔했어요.”

유쾌한 성격의 29세 아티스트 사하라 론지는 풍부한 색감으로 가득한 반추상적 그림으로 잘 알려진다. 그녀의 명성은 평론가들이 예상한 것보다 빠른 속도로 높아져 미술계에서는 이미 그녀를 제2의 리넷 이아돔 보아케(Lynette Yiadom-Boakye)로 칭송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프리즈 런던’에서 열린 론지의 개인전이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받음과 동시에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며 개인전에 대한 세간의 기대는 잔뜩 높아진 상태였다. 그리고 반응은 뜨거웠다. 그녀의 새 작품은 공개되자마자 전부 팔렸다.

론지는 일상의 풍경에 놓인 사람들을 즐겨 그리는데 전시 제목 ‘New Shapes’에서 유추할 수 있듯 개인전에서는 더 기하학적인 스타일의 대형 초상화를 선보였다. 론지가 설명했다. “훨씬 간결한 느낌이 있죠. 디테일도 많이 생략했고요.” 론지의 도전은 대성공이었다.

Police Man, Sahara Longe, ©Sahara Longe, Courtesy of Timothy Taylor

“전시를 준비하며 다른 아티스트들이 그린 거리 풍경을 많이 찾아봤어요. 그들이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집중해서 봤죠.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궁금해지잖아요. 저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일까, 그들의 삶은 어떨까, 그런 조용한 관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묘한 상호작용을 비춘 작품이에요.” 론지는 특히 독일 표현주의 화가 에른스트 키르히너(Ernst Kirchner)를 동경한다. “키르히너의 그림은 정말 놀라워요. 어떤 그림에서는 적대적이고 날 선 분위기가 풍기지만 정말 풍부한 이야기가 느껴지거든요.” 론지는 키르히너 다음으로 칸딘스키를 언급했다. “그림은 노래와 같아야 하고, 선을 사용하는 방식은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아야 한다는 칸딘스키의 에세이를 읽은 적 있어요. 그 말이 무척 멋지더라고요. 화가는 선을 사용해 시선의 흐름을 유도해야 하죠.” 하지만 론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는 영국 산업주의 화가 L.S. 라우리(L.S. Lowry)다. “아버지가 라우리를 정말 좋아하세요. 라우리가 거리의 모습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이번 기회에 열심히 들여다봤죠. 그림 속 인물은 정말 평면적이고 디테일도 전혀 없어요. 그런데도 얼굴과 자세에서 개성이 느껴지죠. 잘 아는 사람은 뒷모습이나 서 있는 자세, 손을 사용하는 모습만 봐도 누군지 대번에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라우리처럼 그림 전체를 단순화하면서도 캐릭터를 유지하고, 스토리를 전달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죠.” 론지가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그렇다고 론지가 거장의 영향만 받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스튜디오가 있는 브릭스턴의 밤거리를 활보하는 파티 피플 역시 훌륭한 영감의 소재다. “O2에서 항상 작은 콘서트가 열리거든요. 늦게까지 작업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길거리에 줄지어 선 무리에 갇히곤 해요. 그럴 때 조명 속에서 환하게 웃으며 춤추는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죠. 사람들의 화려한 옷차림과 온갖 색조가 일렁이는 장면이 몹시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하루 종일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느라 아주 끔찍한 몰골인데 저 빼고 다들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더군요(웃음).”

좋아하는 예술가로 프랜시스 베이컨까지 언급하자 문득 론지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이 거의 다 남성이라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론지가 맞장구쳤다. “맞아요. 최근 그 점에 대해 고민했어요.” 그러나 그녀의 결론은 우연의 일치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작품에서 느껴진 ‘솔직함’이 좋았을 뿐, 여성 아티스트와 교감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이다. “모임에 참여해 끈끈하게 연대하는 것이 더 중요하죠”라고 말한 론지에겐 네 자매가 있고, 모두 친하게 지낸다. 여성 예술가로 이루어진 모임도 만들었다. 갤러리스트 조지아 카(Georgia Carr), 디자이너 제스 휠러(Jess Wheeler), 작가 케이티 헤셀(Katy Hessel)이 운영하는 레지던스에서 만난 아티스트 미카엘라 이어우드 댄(Michaela Yearwood-Dan) 등이 모임의 일원이다. 론지는 특히 예술 사업과 관련해 이어우드 댄을 무척 신뢰한다. “사기를 당할 뻔했는데 이어우드 댄의 조언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거든요. 사업적인 조언이 필요할 때 늘 그녀를 찾아요. 절대 눈 뜨고 코 베이는 일이 없죠.”

Spotlight, Sahara Longe, ©Sahara Longe, Courtesy of Timothy Taylor

론지는 일찍이 화가가 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일단 시에라리온인 친할아버지와 영국인 외할아버지 모두 화가였다. 출생지 런던을 떠나 서퍽의 시골로 이사한 사건도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중요한 징검다리였다. “이사 간 집이 거의 쓰러져가는 농가였어요.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죠. 하지만 덕분에 부모님이 방을 원하는 대로 꾸며도 좋다고 하셨어요. 침실 벽 전체에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행복했죠. 아버지가 구독하던 잡지 <프라이빗 아이>에 실린 만화를 너무 좋아해서 매일 그 그림을 따라 그리곤 했어요.”

그러나 진짜 예술가가 되는 길은 험난했다. 버크셔의 히스필드 학교를 졸업한 후 그녀는 미술사를 공부하기 위해 브리스틀 대학에 입학했지만 에세이를 쓰는 일이 괴롭고 힘들어 1년도 되지 않아 자퇴했다. 터닝 포인트는 예기치 못한 순간 찾아왔다. 우연히 카페에서 사람들이 피렌체의 찰스 세실(Charles Cecil) 아틀리에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구글에서 찰스 세실 아틀리에를 검색하자마자 그녀는 ‘여기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2015년 그 명문 미술학교에 입학한 후 론지는 4년 동안 열정적으로 공부했다. “엄격하고 조금 이상한 곳이었지만, 모든 규율과 예술적인 광기가 전부 마음에 들었어요. 힘들어서 학교를 떠나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저랑은 잘 맞았죠. 그림 그리는 법을 제대로 배울 수 있어서 좋았어요.” 론지는 만족스러운 학교생활 끝에 2019년 졸업했다. 그러나 성공의 길은 아득했다. “찰스 세실 졸업생들은 보통 초상화 의뢰를 받기 시작하며 전업 화가가 돼요. 물론 정말 정말 뛰어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죠. 그리고 저는 정말 정말 잘하지 못했어요.” 이제 촉망받는 화가가 된 론지가 담담하게 과거를 떠올렸다. “천천히 작업하는 편인 저에게 빠르게 완성해야 하는 초상화 작업은 너무 어려웠어요.”

이후 론지는 5개월간 시에라리온에 머물다가 봉쇄령이 내려지기 직전, 서퍽으로 돌아왔다. “모든 걸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어요.” 그러던 중 취미로 꽤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SNS가 그녀를 다시 미술계로 이끌었다. “우연히 제 작품을 본 사람들이 마음에 든다며 관심을 표했고, 그때부터 작품을 한 점 두 점 판매하기 시작했어요.” 작품 판매를 맡아줄 갤러리를 물색하기 위해 여러 곳에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을 받지는 못했다. 한참 후, 유일하게 에드 크로스(ED Cross)로부터 답변을 받았고, 그다음이 티모시 테일러 갤러리였다. “요즘 근사한 자리에서 저녁 식사를 즐기다가 문득 그때 답장을 받지 못한 갤러리들이 생각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재빨리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보냈던 DM을 삭제하죠!” 론지의 메시지에 답하지 않은 갤러리들이 지금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녀의 대형 작품 판매가는 억 단위이며 열성적인 수집가들이 지금도 론지의 작품을 손에 넣기 위해 줄을 선다. “굉장한 일이죠. 제 작품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직도 너무 놀라운걸요.” 그녀가 수줍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론지는 ‘프리즈 서울’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공개한다. “이번엔 훨씬 작은 크기의 작품을 선보일 거예요. 마무리 작업만 남겨두었죠.” 그녀가 서울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뿐이 아니다. “K-팝 콘서트에 가보고 싶어요.” 론지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천진난만한 편이다. “소프 파크(Thorpe Park, 영국의 놀이공원)에 가곤 해요.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거든요. 롤러코스터를 타면 스트레스가 다 풀려요.” 론지가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사하라 론지는 지금 생애 최고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중이니까. (VK)

#여성예술가17

피처 디렉터
김나랑
피처 에디터
류가영
FUNMI FE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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