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사샤 고든의 자화상 속에는 #여성예술가17

2023.09.07

사샤 고든의 자화상 속에는 #여성예술가17

점점 투명해지는 쓰라린 기억. 사샤 고든의 그림은 집요하게 스스로를 향한다.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사샤 고든. 고든은 브루클린에 자리한 이곳에서 정오부터 새벽 5시까지 작업을 한다.

SASHA GORDON

풍만한 실루엣을 자랑하는 사샤 고든(Sasha Gordon)의 거대한 자화상을 보노라면 그녀가 살면서 어떤 감정의 풍파를 겪었는지 궁금해진다. “테일러 스위프트처럼 작업을 해요. 나쁜 일이 생기면 그림을 그리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평범한 날도 많지만 감정이 격해지고 마음이 조급해질 땐 뭔가를 그려야 직성이 풀려요.” 그럴 때 그녀가 그리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고든의 최근작 ‘Like Froth’는 첫 이별을 주제로 한다. 24세의 백인과 아시아계 혼혈인 화가 고든은 그 전까지는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이 그림은 최근 세실리 브라운(Cecily Brown), 제나 그리본(Jenna Gribbon), 샌포드 비거스(Sanford Biggers) 등 유명 여성 아티스트의 작품과 함께 코펜하겐 외곽의 루돌프 테네르 박물관(Rudolph Tegners Museum)에 전시되었다.) 그림 속 여인은 나체의 연약한 모습을 한 채 바다 한가운데 외딴 바위에 앉아 있다. 보티첼리(Botticelli)의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을 오마주한 그림이지만 주인공은 고통스러운 표정의 고든이다. “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었어요.” 고든이 그림에 대해 설명했다.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던 사람에게 얼마나 화가 나고 실망했는지, 그 감정을 그려 넣어야 한다고 느꼈죠. ‘내가 왜 늘 백인과만 데이트하고 있지?’ ‘그걸 왜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지?’ 온갖 의문에 시달렸어요.” 이별은 고통스러웠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이별의 아픔이 창작에 큰 도움이 됐거든요. 그림도 정말 마음에 들고요.”

고든은 이후 친구들과 함께 몇 달 동안 LA, 코펜하겐, 런던으로 여행을 다녔다. 왼 손등에 도일리 모양의 스무 번째 타투도 새겼다. 브루클린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대형 그림 2점이 현재 느끼는 감정을 보여준다면 지금 그녀는 상당히 기분 좋은 상태인 것이 확실하다. 얼마 전 그리기 시작한 그림에서 그녀는 고양이로 변신한 상태다.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아요.” 고든이 고백했다. (반면 시추와 푸들 믹스인 반려견 ‘보바’에게는 대단한 애착을 갖고 있다.) 또 다른 대형 그림에서 고든은 살아 있는 토피어리 형상으로 변해 있다. 몸과 머리가 도자기색 피부가 아니라 초록색 나뭇잎으로 덮일 예정이지만 아직까지는 머리에만 나뭇잎이 듬성듬성 그려져 있었다.

Gordon’s Seductress, 2021. ©Sasha Gordon, Seductress, 2021. Oil on Canvas, 40×30in. Courtesy of the Artist and Matthew Brown Gallery. Photo: Ed Mumford

고든의 자화상은 비밀스러운 연금술 끝에 탄생한다. 사실주의적 구상미술의 홍수 속에서 고든의 작품은 확실히 차별화된다. 그녀가 주재료로 사용하는 건 아크릴이 아니라 유화물감. 여러 색의 물감을 겹겹이 쌓아 반투명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고든의 주특기다. 그녀는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RISD) 3학년 때부터 대형 작품에 집중해왔다. 지난봄에는 창의적인 큐레이터 제프리 다이치(Jeffrey Deitch)의 도움으로 뉴욕에서 첫 개인전(<Hands of Others>)을 열었다. 7점의 흥미로운 그림은 온갖 기묘한 상황에 놓인 고든을 비춘다. ‘My Friend Will Be Me’에서는 보라색 돌기둥으로 변한 고든을 볼 수 있다.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리며 관객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유쾌하기도 하지만, 어딘가 불편한 감정을 자극하기도 한다. ‘Pinky Promise’에서는 민트색 피부가 눈에 띄는 두 명의 고든이 새끼손가락과 젖꼭지를 맞댄 채 숲속에 나란히 서 있다. 제프리 다이치는 캐시 후앙(Kathy Huang)이 기획한 LA 갤러리 단체전 <Wonder Women>에서 고든의 신비로운 동그란 얼굴이 그려진 1.8×1.5m 크기의 그림 ‘Mood Ring’을 소개하기도 했다. 다이치가 증언했다. “학생 신분으로 이렇게 독특한 시각을 갖고 뛰어난 성과를 내는 건 아주 드문 일입니다.”

고든은 아트 바젤 마이애미가 열리는 12월에 마이애미 현대미술관에서 데뷔 개인전을 가진다. 이른 나이에 촉망받는 예술가로 자리 잡는다는 건 그녀에게 어떤 의미일까? “성공과 함께 많은 것이 주어지는 상황이 두렵기도 해요. 저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작은 마을 출신입니다. 요즘은 가면 증후군에 시달리기도 하죠. ‘내가 왜 여기에?’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요. 어떤 사람은 심지어 제가 롤모델이라고 말해요. 저는 그냥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뿐인데 말이죠.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고 있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뉴욕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백인 마을 서머스에서 폴란드계 미국인이자 유대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녀는 긴 시간 내면에 침잠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모두가 익숙하게 접하는 미술은 그때부터 고든에게 평범한 발달 교육 이상의 의미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낸 어머니는 고든의 든든한 지원군이자 멘토였다. 고든의 어머니는 솔방울이나 작은 꽃 등 자연물을 섬세하게 묘사한 그림을 방 안 곳곳에 걸어두었고, 네 살 고든에게 그림 책상도 마련해주었다. 안과 의사인 아버지를 닮아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던 고든의 오빠 알렉스는 현재 의대에 다닌다. 친구 대부분이 백인에 가톨릭 신자였던 소박한 동네 서머스에서 고든 남매는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다. “제가 종교적인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유대 문화에 길들여졌다고는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고든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불교 신자인 어머니나 유대교인 아버지 모두 ‘독실한 종교인’은 아니다.) 게다가 고든은 성장하며 자신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주변과 미디어에서 보는 여성 대부분이 마르고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고든은 그런 사회에서 ‘평균보다 큰 사람’으로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고든은 친구들의 초상화를 즐겨 그렸다. “제 얼굴은 백인 친구들만큼 흥미롭지 않았어요. 친구들의 얼굴은 저보다 확실히 더 입체감이 있었죠. 하지만 교내 전시회가 열리는 날만큼은 제가 주인공이었어요. 그림 덕분에 하루 종일 자신감이 충만했죠.” 오랜 시간 고든은 소외감 속에서 살았고, 때로 극심한 불안과 강박 장애로 고통받았지만 정확한 진단을 받은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다. 학창 시절에는 테니스(고등학교 동아리에 소속돼 있었다), 바이올린, 피아노를 배웠다. 음악을 좋아해서 가끔 미술가 대신 음악가가 되면 어떨까 상상하기도 했다. 바이올린에는 꽤 소질이 있었지만 이내 ‘동양인 여자아이가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는 것은 조금 진부하다’는 생각에 교내 오케스트라를 그만뒀다. (대신 학교 친구들 모르게 개인 레슨을 받기는 했다.) 그러나 미술에 대한 관심은 한결같았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대부분 유럽인과 백인이어서 자신의 그림은 결코 세계적인 인정을 받을 수 없겠다고 직감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2016년에 RISD에 입학한 그녀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지만 그녀의 그림은 날로 주목받았다. 지도 교수들과 다른 학생들은 고든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든은 자신 또한 인종차별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고든이 그린 그림 ‘The Bath’는 이전까지 그려오던 그림과는 확연히 달랐다. 각성의 순간이었다. 폭이 2.4m에 놀랍도록 복잡하게 묘사된 이 작품은 여러 명의 나체 여성이 한국 대중목욕탕에 한데 어우러진 모습을 묘사한다.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처음으로 분명히 드러낸 작품이에요.” 고든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백인 주변부에서 살아오며 느낀 불편함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안전한 공간이라고 느끼는 목욕탕에 분홍색으로 잔뜩 부풀린 인물이 침입한 듯한 장면을 그렸죠.” 한국 대중목욕탕에 가본 경험이 없었던 고든은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작품을 완성했다. 그림을 다 그리자 어머니는 고든을 뉴저지에 있는 한국식 목욕탕에 데려갔다. “다른 아시아 여성과 옷을 벗은 채로 함께 있다는 것에서 엄청난 안정감을 느꼈어요.” 이 그림은 현재 서머스의 부모님 댁에 걸려 있다.

Gordon’s My Friend Will Be Me, 2022. ©Sasha Gordon, My Friend Will Be Me, 2022, Oil on Canvas, Detail, 72×60in. Courtesy of the Artist and Matthew Brown and Jeffrey Deitch, New York. Photo by Genevieve Hanson

살기 위해 그림을 그리며 고든은 점차 ‘나의 주체는 나’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같은 반 백인 친구들의 초현실적 초상화를 따라 하는 대신 기법을 단순화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담긴 복잡성을 탐구했다. 이때 RISD에서 제공한 무료 심리 상담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그녀가 고백했다. “아시아계 가정에서는 서로 감정을 터놓고 얘기하지 않아요. RISD의 심리 상담 시간에 많은 감정과 기억을 깊이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마주할 수 있었죠.” 고든은 상담을 이어갔다. “레이디 가가가 오프라 윈프리에게 자신의 정신 질환에 대해 털어놓는 영상을 본 후 엄마가 전화를 하셨어요. 그러더니 ‘너의 감정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아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엄마가 레이디 가가를 보고 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게 아주 웃기기는 했어요(웃음).” 고든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깨달아가는 모든 과정은 그녀의 작품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고든은 고전주의 양식으로 가득한 로마에서 한 학기를 보내기도 했다. 로마는 그녀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과거에는 느껴보지 못한 자유를 느끼며 그녀는 원하는 삶을 펼쳐나갔다. “먼저 색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해보기 시작했어요.” 고든이 회상했다. “이탈리아의 적갈색 건물, 그 색감이 특히 마음에 들었죠. 빛을 표현하는 최적의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반투명 색상을 자주 사용하게 됐어요. 미소를 지을 때, 격렬하게 웃을 때, 분노를 느낄 때, 흐느낄 때 등 다양한 표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실험했죠.” 고든은 자화상에 다양한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이런 방식은 신디 셔먼을 떠올린다. 그녀에게 자신의 그림이 어떻게 보이길 바라는지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영화 스틸 사진처럼 생동감 있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젊고 유망한 갤러리스트 매튜 브라운(Matthew Brown)은 2019년 12월 자신이 기획한 단체전에 고든의 이름을 올렸다. 당시 고든은 RISD에 재학 중이었다. 이듬해에는 브라운이 LA에 자신의 두 번째 갤러리를 열며 고든의 신작 16점을 전시했다. 고든의 첫 개인전이기도 한 이 전시에 수많은 평론가들이 주목했다. “사샤 고든은 어린 시절의 장면을 재구성하며 기억의 모호성이라는 본질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심한 디테일로 가득한 생기 넘치는 세계를 창조한다.” 아트 인 아메리카의 할리 웡(Harley Wong)의 평가다.

일주일 후, 나는 그녀의 스튜디오를 다시 방문했다. 그녀의 신작 ‘Sasha the Cat’은 여전히 밑그림만 그려진 채 방치돼 있었다. 그림에서 고양이 모습의 사샤는 팔꿈치와 무릎을 웅크린 채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실뭉치를 갖고 놀고 있다. “고양이 귀를 그려 넣어야 할지 말지 아직 고민 중이에요.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영화나 뮤지컬 <캣츠>를 떠올리게 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털은 확실히 그릴 거예요. 페르시안 양탄자 위의 주황색 얼룩무늬 고양이처럼 보이면 좋겠어요.” ‘Sasha the Cat’ 뒤에는 훨씬 더 큰 버전의 사샤가 스케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배경이 되는 인물은 더 작게 그리는 것이 이치에 맞지만 고든은 크기를 자유롭게 조절하곤 한다. 배경 인물을 훨씬 더 크게 그림으로써 비율을 무너뜨리고, 이런 묘사는 보는 이들을 불편하게 한다.

토피어리 사샤 그림에는 어느새 머리에 이어 한쪽 팔과 가슴 일부에도 나뭇잎이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에도 도플갱어가 등장하는데, 나체 상태로 날이 활짝 벌려진 가위를 든 모습이다. “가위를 은밀한 부위에 아주 가깝게 그리려고 했어요. 작업하면서 되는대로 위치를 정했죠. 언제나 명확한 아이디어를 갖고 작업을 시작하는 것 같지만 막상 그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마무리될지 불투명해지곤 해요. 그저 계속 그림을 그릴 뿐이죠. 기다려야 해요.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고단한 단계를 수없이 거치면서요. 지금 제가 하는 작업은 분노나 원한과는 거리가 멀어요. 작품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전혀 절망적이지 않죠. 오히려 축제 같은 느낌이에요.”

정오부터 새벽 5시까지 작업하는 고든이지만 그녀는 작업에만 매몰된 삶을 살지는 않는다. ‘현재는 싱글’인 그녀에게 최근 새로운 친구도 많이 생겼다. 안나 박(Anna Park), 도미니크 펑(Dominique Fung), 아만다 바(Amanda Ba) 등 그녀와 같은 건물에 작업실이 있는 아시아계 예술가들이다. 고든은 이들의 작품을 팬으로서 좋아한다. 고든은 또 마르가리타와 햄버거를 먹기 위해 포트 그린 근처의 월터스(Walter’s)나 로만스(Romans’)를 즐겨 찾는다. 이세이 미야케나 장 폴 고티에의 빈티지 옷을 ‘득템’하기 위해 아이쇼핑도 즐긴다. “음악을 들으며 혼자 신나게 춤을 추기도 해요. 노래하는 것도 좋아하죠.” 작업할 때는 과거에 즐겨 보던 TV 시리즈를 틀어둔다. “<섹스 앤 더 시티>와 레나 던햄이 출연하는 <걸스>는 벌써 세 번이나 정주행했어요.”

고든은 여전히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그림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저를 그리는 일이 정말 재미있어요.” 고든은 아트 바젤 마이애미가 열리는 12월까지 계속 자화상 작업에 집중할 계획이다. “3년 동안 전시를 위해 그림을 그려왔는데, 전시 계획 없이 아주 자유로운 상태에서 제가 그리게 될 그림도 기대돼요. 다른 인물도 한번 그려보고 싶고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채 정말 순수하게 예술을 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요.” (VK)

#여성예술가17

피처 디렉터
김나랑
피처 에디터
류가영
DODIE KAZANJIAN
사진
SOPHIE SCHWAR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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