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인의 예술가가 프로그타운에 당도한 이유 #여성예술가17
운명처럼 프로그타운에 당도한 5인의 예술가. 이들이 일군 영감의 샘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FROGTOWN
LA에 작업실이 있다는 것이 유일한 공통점인 5인의 예술가들이 서로가 서로의 소울메이트가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놀라운 기적이 LA강 근처의 프로그타운(Frogtown)에서 벌어졌다.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을 찾은 첫 번째 주인공은 조각가 루비 네리(Ruby Neri). 점토를 매만져 발칙하고 당당한 나체의 여성을 빚어내는 그녀는 한동안 눈여겨보던 미스터리한 창고를 2020년 임대했다. “예산을 웃도는 임대료였지만 코로나로 모든 게 봉쇄되기 두 달 전 계약서에 서명한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느껴져요.” 추상화가 릴리 스톡먼(Lily Stockman)은 친구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네리에게 연락을 취했다. “딱 제가 찾던 곳이었어요.” 네리는 이어 풍경화를 즐겨 그리는 사실주의 화가 힐러리 페시스(Hilary Pecis)와 한때 그녀가 가르친 조각가 메건 리드(Megan Reed)까지 불러들였다. 마지막으로 액션 페인팅 화가 오스틴 위너(Austyn Weiner)가 합류했다. 그녀는 이 창고와 똑같은 형태로 대칭을 이루는 바로 옆 창고에 입주했고, 그렇게 프로그타운의 다섯 예술가들이 마법처럼 한곳에 모이게 된 것이다.
올해 32세인 위너부터 51세 네리 사이의 여성 예술가들이 이룬 이 프로그타운 공동체는 놀랍게도 곧바로 친구이자 가족 같은 사이가 됐다. 위너는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 중 누구도 이렇게까지 끈끈해질 거라고 생각지 못했을 거예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았죠. 다들 서로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경력도, 이력도, 작업 형태도 천차만별인 이들에게서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생동감 넘치는 총천연색 작업을 선호한다는 것. 위너는 다섯 명의 케미스트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다소 로맨틱한 이야기를 건넸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각자 즐겨 사용하던 컬러 팔레트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뒤섞이게 될 거예요.” 중요한 공감대가 한 가지 더 있다. 네리, 스톡먼, 페시스, 리드, 위너는 전부 동시대 예술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다른 예술가를 견제하고 배격할 필요는 없다고 굳게 믿는다.
이들의 증언대로 프로그타운의 분위기는 부시윅 큐비클스(Bushwick Cubicles)나 저지시티(Jersey City)처럼 예술가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한 LA 내의 수많은 컨테이너 단지와는 매우 다르다. 일단 9피트에 이르는 프로그타운 스튜디오의 문에는 손잡이가 따로 없다. 문을 닫고 지내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리드가 대표로 이야기했다. “우리는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기고 언제나 서로 활발하게 아이디어를 주고받아요. 그것이야말로 프로그타운의 즐거움이죠. 함께 있을 때마다 스파크가 튀는 게 느껴져요.” 이들은 주로 두세 명씩 모여 창고 앞 주차장에 설치한 피크닉 테이블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다. 키 큰 야생화가 듬성듬성 피어난 주차장의 분위기를 네리의 알록달록한 조소가 밝게 띄우고 있었다. 가끔 이곳에서 함께 테킬라를 마시며 저녁을 마무리하기도 한다. 리드가 자랑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예술계엔 자존심을 세우는 사람들이 아주 많죠. 하지만 여기선 그런 걸 전혀 느낄 수 없어서 좋아요.” 주말마다 프로그타운은 이들의 아이들과 반려동물(개 다섯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로 북적인다. 예상치 못한 게스트도 언제든 환영이다. 지난해 가을에는 미셸 오바마가 이곳을 찾았다. 스톡먼이 당시를 회상했다. “정말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에요. 그러면서도 다정하고, 스마트하고, 호기심도 많으시죠.”
프로그타운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은 수십 년 전 이곳이 작은 두꺼비 떼의 습격을 받은 뒤로 붙여졌다. 그 후로는 두꺼비 대신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 우르스 피셔와 조각가 토머스 하우즈아고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스튜디오를 차렸고, 매년 점점 더 많은 예술가들이 몰려들며 부동산 가격도 치솟고 있다. 하지만 팬데믹 시기에 이곳에 정착해 온갖 위기를 견뎌낸 다섯 예술가들은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는 법이 없다. 이번에는 스톡먼이 말했다. “이곳만의 온화한 분위기는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줬어요. 지난 2년간의 풍파를 버티게 해준 부표 같은 곳이랄까요.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어요.”
루비 네리는 스스로를 ‘캘리포니아 걸’이라 소개했다. 1960~1970년대에 활동한 펑크 아티스트이자 멕시코계 미국인 조각가 마누엘 네리(Manuel Neri)의 딸인 그녀가 성장한 곳은 베이 에어리어(Bay Area). 캘리포니아 대학 데이비스 캠퍼스(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에서 오랫동안 교수직에 재임한 그녀의 아버지 역시 루비에게 엄청난 영감을 준 인물이다. 네리는 훗날 ‘미션 스쿨(Mission School)’이라 불린 그래피티 아티스트 그룹에 속해 페인트 스프레이를 갖고 다니며 동네의 온갖 벽에 말(Horse)을 그리고, 자기만의 태그를 남기며 예술가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35세가 되기 전까지 점토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첫발을 떼고 나니 가속도가 붙더라고요. 점토가 의외로 저랑 아주 잘 맞았어요. 따뜻한 촉감도 좋고 제 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궈가는 작업 방식도 마음에 들었죠.” 최근 열린 LA 데이비드 코단스키 갤러리 20주년 기념전에 네리의 생기 넘치고 알록달록한 세라믹 작품 ‘Lightning Strikes Twice’(2023)가 포함됐다. 대학원생 때 만난 스웨덴 목공 아티스트 토르비에른 베이비(Torbjörn Vejvi)와 열세 살이 된 딸 시그리드(Sigrid)와 함께 보내는 시간 역시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예술가는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요. 작업은 행복하지만 누군가와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오랜 시간 혼자 보내는 것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다행히 프로그타운에 이룬 새 공동체는 그런 아쉬움을 완벽히 상쇄해주었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고 있어요. 다들 자신감이 넘치죠. 그런 분위기가 정말 좋아요.”
“여기가 어떤 분위기냐고요? 시트콤 <사인필드> 같다고나 할까요.” 42세의 힐러리 페시스가 유쾌하게 얘기했다. “서로에게 모든 걸 오픈하죠. 다들 작업할 땐 누구보다 무섭게 몰두하지만 대화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시간도 중요하게 여겨요.” 자신의 손님이 스튜디오를 방문하면 페시스는 다른 친구들의 작업 공간까지 함께 구경시켜주곤 한다. 페시스의 몸값이 심상치 않은 요즘, 꽤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지난해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녀의 작품은 87만 달러에 거래되었고, 뉴욕의 레이첼 우프너 갤러리를 통해 최근 공개된 그녀의 신작은 오프닝 행사가 열리기도 전에 모두 판매됐다. 리드는 힐러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힐러리는 프로그타운의 엄마 같은 존재예요. 지난 몇 년간 그녀는 미술계의 큰 무대를 섭렵해왔고, 수많은 뉴 페이스를 스튜디오로 끌어들인 주인공이죠.” 페시스의 작품 대부분은 그녀가 직접 촬영한 친구 집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이지만, 요즘에는 스톡먼과 리드가 촬영한 사진을 갖고 작업하기도 한다. 예컨대 페시스의 ‘Clementine’s Bookshelf’에 묘사된 고양이는 리드의 반려동물인 회색 태비 고양이 사진을 보고 그려 넣은 것이다. 페시스는 화가 앤드류 숄츠(Andrew Schoultz)와 결혼해 아홉 살 된 아들 아폴로(Apollo)를 키우고 있다. 오렌지 카운티에서 태어나 북부 캘리포니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로데오 외에는 즐길 거리가 마땅치 않던 동네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서 온몸을 타투로 뒤덮으며 개성을 얻기 위해 몸부림쳤다. “제 몸에 새겨진 타투가 딱히 어떤 의미를 가지거나 하는 것도 아니에요. 저를 치장하기 위한 액세서리일 뿐이죠.” 페시스가 무심하게 이야기했다. 그녀의 타투를 보고 연상할 수 있는 것은 사소한 디테일로 가득한 그녀의 그림 정도다. “작은 정보가 꽉 들어찬 장면에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끼거든요.”
페시스보다 세 살 어린 추상화가 릴리 스톡먼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셰이커(Shaker) 자수 견본집의 단순한 아름다움에 몽골에서 본 티베트 전통 회화 ‘탕카(Thanka)’의 지적인 신비주의를 결합한 묘한 그림을 그린다. 지난 6월 그녀는 런던의 알민 레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스톡먼의 어머니는 <세서미 스트리트> 시리즈를 만든 칠드런스 텔레비전 워크숍(Children’s Television Workshop)에서 일했으며, 아버지는 클래식 음악 전공자에서 뉴저지 농부로 전향한 자유 영혼이었다. 네 자매 중 장녀인 스톡먼은 환경 운동가인 남편과 함께 세 아이를 키우고 있다. 1년 전, 막내 프레디(Freddy)를 낳기 전까지 그녀는 매일 아침 LA 강변의 자전거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작업실로 출근했다. “팬데믹 때는 그토록 생기 넘치던 LA마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어요.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보면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죠. 강에서 맞닥뜨리는 야생동물도 폭발적으로 증가했고요. 한동안 커다란 왜가리 한 마리를 매일같이 만난 적 있어요. LA에 다시 자연이 스며드는 과정을 보는 일이 즐거웠죠.” ‘스튜디오의 브레인’으로 꼽히는 스톡먼은 프로그타운 친구들에게 흥미로운 책과 유용한 예술계 소식을 전해주곤 한다. “이곳은 예술가들의 유토피아 같은 곳이에요.” 그녀가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47세의 메건 리드는 마침내 프로그타운에 정착하게 된 것을 행운처럼 여긴다. “개인 작업실도 써보고, 지금처럼 다른 사람들과 작업실을 공유한 적도 있어요. 둘 다 장단점이 있죠. 하지만 프로그타운 공동체는 어딘가 달라요. 일단 팬데믹 초창기에 다들 정말 구명보트에 오르듯 조급한 마음으로 이곳에 입주했는데 그런 간절함이 우리를 끈끈한 관계로 만들었죠.” 카멀에서 태어나 베이 에어리어에서 성장한 그녀는 뉴욕 대학교에 진학한 후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 편입해 네리와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루비는 베이 에어리어 아트 신에서 뜨거운 주목을 받는 아티스트였어요. 개척자 정신이 남다른 친구죠.” 리드 역시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아티스트다. 개성 넘치는 그녀의 조소 작품은 스티로폼, 골판지, 합판, 하이드로칼, 아쿠아 레진 등 그녀에 따르면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 것들’에 의해 탄생한다. “오늘날의 소비 문화에 질식할 것 같은 순간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스티로폼 포장재로 조각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죠. 쓰레기 매립장에서 주운 것들로 아주 가치 있는 걸 만들어내는 일은 희열이 있어요. 그런 사회의 부조리를 담은 크고 작은 오브제는 시대를 반영하는 기념물이기도 하죠.”
마지막 멤버인 오스틴 위너는 이런 프로그타운의 여성 예술가들을 접한 뒤 고민 없이 페시스에게 연락을 취해 곧바로 임대 계약을 맺었다. 3개월 동안 작업실을 꾸미고 지난 5월 스튜디오에 입주했다. “여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꿈만 같아요. 물리적인 환경이 지극히 내면적인 예술가의 작업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을 줄은 몰랐죠.” 그녀는 프로그타운에서 20개 이상의 캔버스를 한꺼번에 펼쳐놓고 빙글빙글 춤추듯이 그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며 작업한다. (그렇게 완성한 최신작이 지난봄 쾨닉 서울에서 열린 그녀의 개인전 <Honey High>에 소개되었다.) 위너는 손목뿐 아니라 팔 전체를 써서 역동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부풀어 오르다가 갑자기 축 늘어지고, 예측할 수 없는 자유분방한 움직임 끝에 겹쳐진 형형색색의 그림 속 형상은 필립 거스턴과 프랜시스 베이컨을 연상시킨다. 위너는 마이애미에서 나고 자랐다. 아역 배우 출신인 그녀의 아버지는 부동산 사업가이고, 패션계에 긴 시간 몸담아온 그녀의 어머니는 때때로 직접 그림을 그린다. 충만한 예술적 영감 속에서 성장한 위너의 첫 장래 희망은 애니 레보비츠 같은 사진가가 되는 것이었다. 꿈을 위해 파슨스에 진학했지만 정작 매료된 것은 그림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거라면 빛이 있는 밝은 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캘리포니아에 정착했죠.”
먼저 프로그타운에 입주한 네 작가들과 친분은 없었지만 위너는 이들의 작업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친구들의 팬이에요. 대단한 엄마이자 예술가, 여성인 이들에게서 배울 점이 너무나 많거든요.” 잔뜩 고조된 위너의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스튜디오로 이사 오기 전, 어떻게 하면 예술가의 커리어와 행복한 삶을 모두 영위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본보기가 돼준 친구들과 이곳을 오가는 수많은 인생을 목격하며 그에 대한 답을 찾은 기분이에요. 많은 이들의 꿈이 펼쳐지고, 그러면서 서로 다른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프로그타운에서 확인할 수 있었거든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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