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말하자면, 우리의 공동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살아간다.’(180쪽)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감염의 공포로 몰아넣었을 때, 세계적 석학 주디스 버틀러는 긴급하게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창비, 2023)를 써 내려갔고 위의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공동과의 관계’에 관한 엄중한 현실 인식과 더불어 ‘공동과의 관계’ 회복에 대한 호소 혹은 그 실현을 위한 촉구일 것이다.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과 그 후의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는 버틀러가 말하는 ‘공동과의 관계’의 의미를 정교하게는 아니어도 각자의 구체적 경험 속에서 어렴풋이 또는 아주 강렬하게 감각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2023년 5월 세계보건기구가 공중 보건 위기 상황을 공식 해제한 현재와 버틀러가 이 책을 처음 출간한 2022년 10월 사이에는 상황에 차이가 있지만, 코로나를 겪기 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세계임이 분명하다. ‘공동과의 관계’를 둘러싼 우리의 감각은 전혀 다르게 작동하며 달라진 방식의 작동은 현재진행형이다. 신종 바이러스가 불러온 상황의 위기는 지나갔을지언정 그것이 곧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버틀러는 이 물음을 철학적 사유와 오랫동안 견지해온 윤리적, 정치적 입장으로 분석해나간다. 무엇보다 이 바이러스는 ‘외래의 것이라는 점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라는 점’(22쪽, 강조는 저자의 것)을 말한다. 팬데믹 초기, 바이러스가 특정 국가의 ‘외부’ 또는 ‘외국’에서 유입되었으므로 특정 국가를 차단하고 배제해야 한다는 일련의 흐름이 있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여기에 관한 버틀러의 입장은 명확하다. ‘우리가 외래 요소를 살아 있는 유기체의 핵심에 자리매김하고 신체와 세계 간의 상호작용을 신체의 생명 활동 자체로서 우선시하는 상호구성주의 모델을 받아들인다면, 문제는 우리를 외래의 것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는 오히려 치명적일 것이다)이 아니게 된다. 오히려 목적은 신체가 쇠약과 죽음의 위험 없이 새로운 것과 함께 살아가고 그것을 수용할 수 있도록,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받아들이는 것일 터이다. 세계는 그저 인간 행위의 배경으로서 혹은 인간의 개입이 이뤄지는 장으로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신체와 세계와의 불가결한 관계를 예증하면서 매일매일 세계의 조각조각들이 신체 안으로 융합되고 있다.’(24~25쪽) 그렇다면 남은 숙제는 ‘외래의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과 어떤 방식으로 공동의 관계를 맺을 것인가로 수렴될 것이다.
‘세계가 갑자기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나는 현상’(37쪽)인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에서 우리는 세계의 작동 방식과 그 민낯을 피할 길 없이 목격해왔다. 이를테면 특정 인구, 민족, 종족, 권역에 대한 배제, 차별, 혐오, 경제 우선주의적 입장으로 감염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노동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 등등. 또 버틀러가 여러 차례 주장해온 상호 의존성과 관계성이라는 개념을 재확인한다. 인간이 또 다른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자연과 얼마나 상호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나와 타인 사이에 경계를 짓고 자신을 온전한 자아로 구별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당연하다 여겨온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마음 편히 숨 쉬는 데 타인의 건강과 안녕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윤리적 질문을 날카롭게 제기해왔다.
그 가운데서도 이 책의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살아 있는 이들에 대한 애도 가능성’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비폭력의 힘>에서 나는 애도 가능한 이들과 애도 가능하지 않은 이들 사이의 구분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작동과 그 의미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폭력의 표현까지는 아니더라도 폭력의 효과임을 주장한 바 있다… 나는 애도가 상실을 인정하고, 상실의 현실을 마음속에 새기며, 나아가 상실의 사건 그 자체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방어의 기제를 해체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애도와 우울증> 속 프로이트의 주장을 끌어오고 있다. 이런 종류의 인정은 시간을 요하는 노력이자, 가늠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는 상실을 반복적으로 마주하며 그 강도를 누그러뜨리는 노력이다. 프로이트는 애도는 현실의 다른 순간들이, 누군가 혹은 무엇이 돌이킬 수 없도록 가버렸다는 사실을 확증할 때 조금씩 일어난다고 주장한다.’(151~152쪽) 부재의 감각을 인정하기, 그것을 인정하기까지의 시간을 확보하기. 애도는 이 과정에서 아주 천천히, 서서히, 조금씩,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긴 과정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남아 있는 이들에게도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갑작스러운 감염으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들, 감염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지 못한 채 상실을 받아들일 시간조차 빼앗긴 사람들. 버틀러는 애도 가능성이야말로 평등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애도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어떤가. ‘애도 가능성은 이미 살아 있는 생명체에, 즉 현재는 걸어 다니고 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이,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제대로 된 기념이나 항의도 할 수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 이미 부착되어 있는 삶의 한 특성으로서 작동하고 있다.’(168쪽) ‘애도 가능성에 대한 주장은 우리 시대 가장 강력한 사회운동 중 하나’(169쪽)라는 버틀러의 주장은 비단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남긴 상실에만 해당하는 건 아닐 것이다.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일까.’ 버틀러의 질문을 이렇게 다시 써본다. ‘충분히 애도할 시간, 그 시간을 존중할 공동의 관계가 절실한 세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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