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계상, 김신록, 박성훈, 유나가 보내는 위로
드라마 <유괴의 날>의 주역인 윤계상, 김신록, 박성훈, 유나. 연기라는 원 테이블에 앉은 그들의 시너지는 우리를 따뜻하게 보듬는다.
우주의 작고 겸손한, 윤계상
소설 <유괴의 날>은 약지 않은 아버지 명준이 딸의 수술비를 마련하려고 소녀를 납치하면서 시작된다. 알고 보니 납치한 소녀 로희는 천재였고, 점차 다른 살인 사건과 비밀이 드러난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ENA 드라마 <유괴의 날>에 배우 윤계상이 명준으로 등장한다. 순수함을 간직한 캐릭터이기에 우리가 애정하는 윤계상표 천진한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다. 근래 스릴러 작품 <유체이탈자>(2021)와 <크라임 퍼즐>(2021), 로맨스극이지만 까칠한 광고팀장으로 나온 <키스 식스 센스>(2022), 6년 전 작품이지만 뇌리에 깊이 박힌 장첸 이후 윤계상의 이런 얼굴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인터뷰를 하며 마주 앉은 그의 현실 표정도 그렇다. 얼굴의 모든 근육을 써서 환하게 웃는 것으로 우선 상대에게 예의를 차리는 사람.
윤계상이 <유괴의 날>을 택한 이유도 ‘인간미 넘치는 유쾌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요즘 CG가 많이 들어가는 화려한 작품이 연이어 나왔는데 이 시나리오는 사람이 보여서 좋았어요. 천재 아이란 컨셉도 재미있었고요.” 드라마의 주축은 윤계상과 극 중 로희(유나)의 ‘케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계상은 아역 배우와 직접적으로 호흡하는 것이 처음이다. 그것이 새롭고도 귀중한 경험이었다고 회상한다. “아역 배우는 가장 이상적인 배우죠. 유나도 연기만 생각하는 마음이 참 좋았어요. 저도 <발레 교습소>(2004) 때만 해도 그랬는데 말이죠(웃음).” <발레 교습소>는 ‘윤계상 회고전’을 한다면 의심 없이 개막작으로 걸고 싶다고 한 작품이다. 가수로서 최전성기에 변영주 감독의 믿음으로 처음 출연한 영화고, 그때 배운 것이 자신의 연기 인생을 끌었다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 이후 20년 동안 30여 작품에 꾸준히 출연했다. 그렇기에 늘어난 노하우, 연기 기술은 그를 프로 배우로 만들었지만 우리가 그렇듯 초기 순수함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강렬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순수하게 연기만 생각하기보다 전체 시스템을 보고 기능적인 부분을 염두에 두죠. 촬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금 이 장소와 상황은 어떤지 체크하고, 욕심이 많다 보니 더 완벽해지려고 애쓰죠. 배우는 우선 연기를 잘해야 하는데 너무 많은 것을 신경 쓰지 않나 걱정되기도 해요.” 배우에게 기술과 메소드가 어느 정도 비율이어야 적절한지 우문을 던졌다. “메소드는 100% 갖고 있어야죠. 메소드로 시작하지만 정신은 차리고 있어야 하고요(웃음). 비유하자면 저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자예요. 피아니스트는 몰입해서 연주하지만 합주에 언제 어떻게 들어갈지 파악하고 있어야죠.” 물론 그것이 잘 안된다고, 그 때문에 고단하고 때론 무력해진다고 덧붙였다.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한 장면을 마주하는 작품 모니터링이 그에겐 고역이다.
윤계상이 아역 배우인 유나에게 많은 조언과 도움을 줬을 거란 건 당연하다. 어떤 역할을 했는지 묻자 겸손이 내장재인 윤계상은 구구절절 말하는 대신 ‘그저 아는 것을 알려줬을 뿐’이라고 요약한다. 하지만 윤계상이 상대 배우에게 보낸 배려와 공은 유나와 극 중 전처로 출연하는 배우 김신록이 그를 멘토라고 칭한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원작에서 명준은 진퇴양난에 휩쓸리듯 범죄를 저지른다. 윤계상은 “당연히 잘못했지만 극이라는 점을 마음에 두고 캐릭터 입장에서 본다면 간절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저는 우주의 조그만 존재일 뿐이에요. 제가 정답도 아니고 전체를 아우르는 정답 또한 없죠. 그렇기에 작품을 하면서 ‘그럴 수도 있다’란 생각을 자주 해요. 배우로서 배역을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정이에요.” 윤계상은 영화에서 전사가 없던 장첸 역을 준비할 때도 그의 지난 인생 이야기를 상상했다. 장첸의 긴 머리 아이디어도 그 과정에서 나온 것. “배우의 덕목 중 하나는 캐릭터의 숨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죠.” 이런 과정이 거듭된다면, 그러니까 작품이 쌓일수록 배우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까? “현실은 다르죠.” 윤계상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도 자주 놀라고 두렵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냥 과거와 비슷한 일이 발생하면 전보다 조금 무뎌질 뿐이죠.”
윤계상은 넷플릭스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촬영을 거의 마쳤다. 펜션에 수상한 여자가 나타나면서 일상이 무너진 주인의 현재와 과거를 담은 미스터리 스릴러다. 워낙 꾸준히 작품을 해온 윤계상이지만 최근 2~3년 사이 정말 쉼 없이 달렸다. 그는 “너무 작품 생각만 하니까 내 기억인지, 캐릭터의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고 말한 적 있다. “배우는 진짜 좋은 직업이죠. 작품을 절실하게 잘하고 싶으면 그 사람화돼요. 하지만 자기가 없어질 수도 있어 위험하죠. 카메라 밖에선 사회인으로 살아가야 하니까요. 또 주변 사람도 힘들게 해요. 성격이 계속 바뀌는 사람과 같이 산다고 생각해보세요. 저도 친구들이 ‘넌 누구냐’고 묻기 전에 정신을 차리기로 했죠(웃음). 그 균형이 말끔하게 지켜지진 않지만 노력 중이에요.” 윤계상이 고안한 방법은 영화 <인셉션>(2010)에서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돌리던 팽이처럼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장치를 만드는 것. 지금으로선 그 팽이가 현관문이다. 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순간 촬영은 잊고 인간 윤계상이 되려 한다. 윤계상이 이런 트리거까지 만든 이유는 “아직 더 많은 작품을 하고 싶어서”다.
윤계상은 수상에 대한 욕심도 솔직히 드러냈다. “염치없지만 연기상을 타보고 싶어요.” <발레 교습소>로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신인 남자연기상을 수상하고, <풍산개>로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나 상복 없는 배우긴 하다. “내가 길을 잘못 가고 있진 않구나, 라는 확인을 받고 싶어서요. god를 하면서 큰 영광을 맞았지만, 달콤한 만큼 쉽게 잊히고 지나가죠.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한 번쯤은 상을 타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인정보다는 확인받고 싶다가 더 맞는 표현이에요.”
윤계상은 가수 시절을 지나간 영광이라 했지만 god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번 추석에 KBS는 god 콘서트를 방영한다. 나훈아가 출연해 화제를 일으킨 그 무대다. 추석날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볼 수 있는 가수의 콘서트는, 나훈아 그리고 god인 셈이다. 윤계상은 “멤버들은 잘하는데 저는 너무 떨려요” 하면서 걱정하지만 말이다.
두 분야의 영광을 이어가는 만큼 윤계상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을지 짐작된다. 그는 지난 세월에 후회 없다고 말했다. “몇 년 전 뇌수막염 때문에 수술을 받았어요. 그때 ‘마지막으로’라는 마음으로 끄적여봤죠. 후회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정말 최선을 다해 재미있게 잘 살았구나, 싶었죠.”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을 겪으면 못해본 것을 떠올리거나 과거를 후회하고 다른 삶을 꿈꾸기도 한다. 윤계상은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새롭게 해보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아요. 종종 연기를 그만두면 뭐 하고 살까 고민하는데, 이거 말고는 원하는 바가 없더라고요.” 무언가에 양껏 쏟아부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답변이다. 만약 여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연출이 아닐까. 윤계상은 감독으로서 단편영화 <테이블>(2020)을 만들어 발표했다. 세 개의 짧은 시리즈로 이뤄진 작품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감독이자 주연배우인 그가 테이블에서 멍하니 있다가 잡동사니를 치우고 직접 가구를 만든다. 정갈하게 다시 시작하고 싶은 윤계상 개인의 욕구가 단순하지만 과감한 연출로 담겼달까. 그는 자기 삶을 영화화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한 장을 못 넘긴다고, 주변인들 프라이버시 때문에 80세는 넘어야 만들 수 있다며 웃는다. 이번에도 그의 화법은 웃음으로 마무리한 겸손이었다. 김나랑(<보그> 피처 디렉터)
진지한 배우의 초상, 유나
<파친코>의 어린 선자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훌쩍 자랐다. 그 사이 소속사도 생기고, 내년엔 교복을 입는 중학생이 된다. “교복을 입는다는 게 왜 이렇게 기대되죠?” 유나의 눈빛이 맑고 또렷하다. 500 대 1. 열한 살 최로희 역의 경쟁률이다. <유괴의 날> 제작진은 아마 모르긴 해도 현재 활동하는 그 나이대의 배우들은 전부 만나봤을 것이다. 유나는 절레절레 고개부터 흔든다. “정말 치열했어요. 오디션을 보러 가면 다른 작품에서 얼굴을 많이 알린 친구들도 있다 보니 과연 내가 로희를 맡을 수 있을까? 맡는다고 해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 분위기에서 위축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오디션이 4차 정도 진행되었을 때는 놀랍게도 어느새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주어진 대사를 해석하고 작품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로희를 어떻게 표현해볼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더라고요. 그렇다면 내가 맡아도 잘할 수 있겠는데? 하는 자신감이 조금 붙었어요.”
6차 오디션 날 감독으로부터 드디어 대본을 건네받았다. 그건 곧 최종 합격이라는 뜻이었다. “감독님이 뭘 꺼내시더라고요. 뭔가 봤더니 대본이었어요. 그때부터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는데 꾹 참다가 밖으로 나와서 엄마와 부둥켜안고 울었어요. 집에 돌아오니 코피가 터지더라고요. 두 달에 걸친 오디션 기간 내내 긴장하고 있었나 봐요.”
그렇게 손에 쥐게 된 로희는 지능이 높은 천재에 시니컬하고 차가운 인물이다. 성인 못지않은 말재간과 실천력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이는 아이다. 이 간극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로희는 굉장히 독특한 인물이에요. 처음에는 로희의 차가움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는데 대본을 보면 볼수록 이면에 깊고 따뜻한 면이 흐르는 게 보였어요. 감독님께 저의 이런 생각을 전했죠. 너무 차갑게만 표현해서는 로희의 매력을 사람들이 못느낄 것 같다, 말과 행동은 조금 차가울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감독님은 그래도 차가운 로희 쪽을 선호하셨는데 결과적으로 조율이 잘된 것 같아요. 드라마를 보시면 알 거예요(웃음).”
<유괴의 날>은 유괴범 명준(윤계상)과 유괴된 아이 로희를 중심에 놓고 펼쳐지는 서사인 만큼 둘의 호흡이 드라마의 근간이 될 수밖에 없다. 배우 윤계상에 대해 묻자 유나의 얼굴이 한결 밝아진다. “저는 진짜로 명준 삼촌과 하는 촬영이 제일 좋았어요. 찍을 때마다 새롭고, 찍을 때마다 설레고요. 계상 배우님은 엄청난 베테랑이시잖아요. 제가 가끔 톤을 못 잡고 헤매고 있으면 바로 현장에 적용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연기 조언을 해주세요. 아이디어를 못 내고 있을 때도 이건 어떨까, 저건 어떨까, 하면서 먼저 제안해주시고요. 극 중 로희는 명준과 항상 붙어 다니는데 현실에서 어색하면 안 되잖아요. 장난도 먼저 걸어주시고 긴장을 풀어주시니까 촬영이 정말 편했어요.”
아직 많은 작품을 경험하진 않았지만, 유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파친코>를 보면 몰입하는 힘이 좋고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는 강점을 지닌 배우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스스로도 강점은 감정 신이라고 생각해요. 연기할 때 감정 신이 가장 재밌거든요. 오히려 평범한 장면은 정말 평범해야 하는데, 사실 촬영 현장이 평범하진 않잖아요(웃음). 내가 밥 먹을 때는 어떻게 먹는지, 양치할 땐 어떻게 하는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신경 써야 평범해지거든요. 하지만 감정 신은 그렇지 않아요. 내가 그 장면에서 느끼는 감정을 오롯이 드러내면 되니까요. 내가 그 인물에 들어가 있으니까 내가 느끼는 게 곧 인물의 감정이라고 믿어요.”
자신의 연기론을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역으로 취약하다고 느끼는 지점도 분명 있을 것이다. “대화 신이 좀 어렵더라고요. 로희는 천재이기 때문에 어른들과 대등하게 주고받는 대사가 많은데, 다양하게 표현하지 못해서 아쉽게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에너지 측면에서도 그렇고요.”
연기에 대해 말할 때면 또렷한 눈동자가 유독 까매진다. 그 눈빛을 더 보고 싶어서 배우로서 평소 신경 쓰는 태도가 있는지 물었다. “깨끗하고 예쁜 말을 쓰는 거요. 제 말투가 가끔 날카로울 때가 있는데, 더 둥글게 표현하고 싶어요. 발음과 발성에도 신경 쓰고 있고요. 걸을 때 똑바로 걷고, 앉아 있을 때도 반듯하게 앉으려고 노력해요. 좋은 자세를 갖추고 싶어요.”
과거 인터뷰를 보면 배우로서 롤모델로 <파친코>에서 만난 배우 윤여정, 김민하를 자주 언급했는데, 이번에 이 목록에 배우 윤계상이 추가되었다. “현장에서 보여주신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아주 간단한 신이라도 그 인물의 전후 상황을 고려해 감정 흐름을 분석하고 촬영에 온전히 집중하는 모습이 멋졌어요. 그리고 상대 배우에게 열린 태도도요. 저도 나중에 명준 삼촌 같은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요.”
<유괴의 날>은 유나의 첫 주연작이다. 거기다 인생의 롤모델로 삼을 만한 좋은 상대 배우도 만났다. 이 경험을 통해 무엇을 배웠고 어떻게 변화했다고 느낄까. “감정이 좀 더 풍부해진 것 같아요. 저는 사실 한 장면에서는 한 가지 감정에 주로 몰두하고 연기해온 편인데 명준 삼촌이 그건 우리의 머릿속 생각일 뿐이지, 사람은 보통 짧은 순간에도 다양한 감정을 느끼지 않느냐고 질문해주셨어요. 덕분에 인물의 감정에 복합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가 생겼어요. 드라마 안에서도 로희가 점차 변화하는 게 느껴지실 거예요. 그리고 어느 정도 해석은 풍부해졌지만 그걸 시청자가 느낄 수 있게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잖아요. 앞으로 그런 표현이 자유자재로 나올 수 있도록 연습을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김현민(영화 저널리스트)
해사한 워커홀릭, 박성훈
배우에게 특정 누군가를 닮았다고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럼에도 박성훈을 보면 배우 박해일이 떠오른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얼굴. 환한 피부와 맑은 눈을 지녔지만 역에 따라 손이 고운 살인마가 될 수 있는 능력. 배우에게 축복일 거다. 박성훈이 맡아온 배역은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오갔다. 현재 방영 중인 로맨틱 코미디 <남남>(2023), KBS 연기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주말극 <하나뿐인 내편>(2018)과 상반된, <더 글로리>(2022)와 영화 <유포자들>(2022)을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만 예로 들었을 뿐, 박성훈의 필모그래피는 지옥과 천국을 퐁당퐁당 오간다. “박해일 선배와는 영화 <상류사회>(2018)에도 함께 출연했는데 영광입니다. 양편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축복이자 행운이죠. 캐릭터가 상반될수록 더 재미있게 촬영하게 되더라고요.”
<유괴의 날>에서 박성훈은 로희를 납치한 명준을 쫓는, 형사 박상윤으로 출연한다. “일본 가는 비행기 안에서 시나리오를 단숨에 읽었어요. 그만큼 극을 끌고 가는 힘이 있었죠. 작품을 선택할 때 제 캐릭터의 색깔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재미를 더 중시합니다.” 원작 소설에서 형사 박상윤은 ’쫓는 자’라는 보조 역할에 머문다는 느낌이 강해 개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박성훈은 이 역할을 어떻게 끌어올릴까. “극에서 박상윤의 특징이나 전사가 두드러지지 않죠. 명준과 천재 소녀 로희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받쳐주고 시청자에게 소개하는 화자 역할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거 같았어요. 캐릭터 분량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편이에요.”
박성훈은 많은 작품을 해왔지만 강력반 형사는 처음이다. “형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잠복을 하다 보니 수면 시간도, 씻을 시간도 부족하죠. 감독님은 상윤이 그 와중에도 단정하고 자기 관리를 하는 모습이었으면 하셨어요. 그에 맞춰 제가 헤어와 의상 아이디어를 내고 몇 번 변형했죠. 물론 보실 때 익숙한 형사 스타일링일 수 있지만 그래도 깔끔함을 가미하려 했습니다(웃음).” 박성훈은 캐릭터의 외형 설정에 아이디어를 많이 낸다. <더 글로리>의 전재준 역을 준비할 때도 힙합퍼들의 이미지를 찾아보고, 눈썹 스크래치와 헤어피스를 하자고 감독에게 먼저 제안했다.
박성훈은 출연 배우들과 관계를 돈독히 한다. <더 글로리> 배우들과 춘천으로 MT도 다녀왔다. <유괴의 날>에 함께 출연한 윤계상, 김신록, 유나 모두 첫 호흡이었지만 먼저 다가가는 박성훈 덕분에 다들 많이 가까워졌다. “배우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작업이 빈번해요. 저도 데뷔 때는 부침이 있었지만 갈수록 익숙해졌어요. 자연스럽게 시간이 쌓이면 친해지겠지만 작품에서 호흡을 맞출 거라면 먼저 손을 내밀어 하루빨리 가까워지려고 해요. 서로 불편하지 않아야 촬영할 때 좋더라고요. 첫 만남에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 할 정도죠(웃음).” 박성훈의 이런 붙임성은 내향인 위주인 배우계에서 귀하다. 하지만 이것은 일을 잘하고자 하는 배우 박성훈의 의지로 끌어올린 것. 일상에서는 내향인에 가깝다. 박성훈은 자신과 비슷한 배우로 윤계상을 꼽았다. “극 초반에는 서로 붙는 장면이 없었는데, 점차 대화하고 술자리를 가져보니 닮은 점이 많더라고요. 취향, 성격이 비슷하고 MBTI도 같아요. 예를 들어 친구 앞에선 장난꾸러기가 되지만 낯선 사람에겐 굉장히 소극적이에요. 무엇보다 형에게 많이 배웠어요. 스태프와 감독님을 대하는 태도, 연기에 대한 열정까지! 형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값진 시간이었어요.”
사람 좋은 박성훈은 타인이 지옥일 때 어떻게 할까? “‘저스트 두잇, 킵 고잉’ 합니다. 부딪쳐도 최선을 다해 해나갈 뿐이지 특정한 극복법은 없더라고요.” 사회에 다친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 역시 집에서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나마 활동적인 여가라면 맛집 탐방. “일명 ‘쩝쩝박사’예요. 지방 촬영 갈 때도 근처 맛집을 열심히 검색해서 찾아가요. 이젠 데이터가 쌓여서 친구들이 전화해서 음식점을 물어보죠. 추천해줘서 맛있게 먹었다고 하면 참 뿌듯하고요.”
박성훈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2> 촬영을 앞두고 있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작품이라서 부담된다기보다는, 하던 대로 하자는 마음으로 임하는 중이다. 영화 <지옥만세>도 개봉했다. 박성훈은 언젠가 <폰 부스>(2003)나 <터널>(2016)처럼 홀로 극을 끌어가는 영화, <롤러코스터>(2013) 같은 경쾌한 템포의 코미디도 해보고 싶다. 그가 동료 배우를 대하는 유쾌함을 보면 <롤러코스터> 같은 작품도 정말 잘 붙을 것 같다. “휴식과 일, 둘 중 택하라면 무조건 후자예요. 워커홀릭 성향이 있어요. 밖으로 나와서 일을 해야 스트레스가 풀리는 스타일입니다. 체력이 달리더라도 이 시간이 쌓여 자양분이 된다고 생각하면 해낼 수 있어요.”
그의 연기를 실물로 볼 날도 머지않았다. 박성훈은 2011년부터 2017년까지 14편의 연극에 참여했다. 매년 두세 작품을 한 셈이다. “지금은 무게 추가 방송에 와 있지만 항상 무대에 설 준비를 하고 있어요.” 박성훈은 연극 얘기할 때 더 반짝이는 것 같다. 정말이다. “연극을 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연극은 반복 속에서 매번 그 감정을 처음 느끼듯이 신선하게 표현해야 해요. ‘반복 속의 새로움’이란 의미를 조금이나마 체득했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연극은 사람들과 살결을 부딪치고 냄새를 나누면서 준비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협업해서 작품을 만들어가야 할지를 배웠죠. 드라마, 영화도 사람들이 함께해서 완성하잖아요. 배우로 생활하는 한 언제나 그때의 가르침이 함께할 거예요.” 김나랑(<보그> 피처 디렉터)
역동적인 협상의 과정, 김신록
김신록은 <방법>(2020) 이후 다양한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얼굴을 쉼 없이 꺼내왔다. 곧 방영될 <유괴의 날> 외에도 차기작이 이미 예정된 상태다. 지금 김신록은 연기를 즐기고 있을까. “뭔가를 향해 의문을 품고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시도하는 것을 좋아해요. 그건 늘 불안정하고 어려운 일인데, 이것도 즐거움이라는 것에 동의가 된다면 저는 지금 즐기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이런 질문을 인터뷰의 서두에 불쑥 꺼낸 이유는 사실 시청자로서 김신록이라는 배우의 연기를 충분히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장면을 장악하는 배우. 더, 더 보고 싶은 배우. <괴물> <지옥> <재벌집 막내아들> 등 강렬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된 배우지만 그럼에도 자기 복제 없는 그의 연기는 여전히 신선하고 생동감 넘친다. “최근 다작을 하긴 했지만 사실 제가 얼굴을 비친 기간이 짧고 세상에는 콘텐츠가 너무 많다 보니 시청자들이 저의 모든 작품을 다 찾아보진 않잖아요. 그러니 여전히 신선한 면이 있을 거예요. 배우로서는 누군가 저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해준다는 게 정말 큰 기쁨이죠.”
김신록을 눈앞에 두고 느끼는 감각은 스크린을 통해 그의 연기를 보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무표정과 웃을 때의 낙차. 그 극적인 온도 차로 순간을 자기만의 시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말에 “전 따뜻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라며 문자 그대로 따뜻하게 웃어 보인다.
<유괴의 날>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궁지에 몰린 김명준(윤계상) 앞에 3년 만에 불쑥 등장해 유괴를 제안하는 전처 서혜은이다. 원작 소설을 읽어보면 속내를 알기 힘든 여러 겹의 레이어를 가진 인물. 배우로서 어떤 갈증이 해소되진 않았을까. “저도 원작을 읽었는데 드라마에는 새로운 줄기가 추가됐고, 특히 후반부에는 온전히 창작된 이야기가 더해져 다채로워진 것 같아요. 사실 이 인물은 저에겐 좀 특별한 경험인데요. 보통은 인물을 연기할 땐 그를 이해하고 동의해요. 그런데 서혜은은 동의 없이 연기해본 아마 최초의 인물이 아닐까 싶어요. 이해는 되지만 인간 김신록으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거예요. 그게 새로운 경험이자 어려움이기도 했어요.” 어떤 위화감이나 마음의 저항을 말하는 것일까. “인물로서는 정당성과 명분을 가지고 호소하지만, 배우로서는 시청자가 이 인물에 동의하지 않기를 바라는 양가적인 마음을 갖고 연기했죠.”
이번 드라마의 가장 많은 장면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는 단연 유괴를 공모한 명준 역의 윤계상이다. 올 초 발간한 김신록의 인터뷰집 <배우와 배우가>의 에필로그에도 배우 윤계상에 대한 언급이 있다. “<유괴의 날>을 준비하면서 윤계상 선배와 이야기를 나눴고, 촬영 중에도 종종 대화하면서 카메라 앞에서 오래 연기한 배우들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그분이 연기해온 시간이 벌써 스무 해가 넘었을 텐데도 현재 연기에 대한 고민과 질문이 정말 많았어요. 또 본인이 연기에 대해 가진 지금의 생각을 연기할 때 실천적으로 해내시는 것 같아요.” 특별한 롤모델 없이 살아온 김신록조차 ‘저런 선배, 저런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인상적이었다. “20대부터 스타셨잖아요. 그런데도 함께 연기할 때 배우 대 배우로서 동등하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인간적으로 아주 멋있었어요.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죠.” 문득 김신록은 후배에게 어떤 선배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는데, 그는 재빨리 답한다. “거부 회피형 선배가 아닐까요? (웃음) 후배들이 다가오려는 게 느껴지는데 성격상 좀 어려워요. 나이를 먹어가며 나름 사회적인 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깊은 관계를 어려워하죠. 저는 친구도 단짝 친구, 연애도 한 명과 길게 하는 편이거든요. 잘 맞는 사람들과는 굉장히 오래가고, 그들에게 의지하는 편이에요.”
누구라도 김신록이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데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배우에게 ‘연기를 잘한다’는 표현만큼 단호하고 함축적인 상찬도 없다. 하지만 그만큼 뭉뚱그린 표현도 없을 것이다. 연기에 대해 오래 고민해왔고 또 수많은 배우들을 인터뷰한 배우 김신록은 그 표현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다고 생각할까. “연기를 잘한다, 라는 말은 아마 사실주의 연기 측면에서 재현을 잘한다, 라는 뜻일 거예요. 아주 실험적인 영화라거나 다큐가 아닌 이상 거의 모든 영상 매체의 연기는 재현 연기란 말이죠. 연기를 잘한다는 표현을 주로 이럴 때 많이 쓰잖아요. 일상의 어떤 누구처럼 보이거나, 진짜 그 직업군처럼 보일 때. 그런데 ‘연기가 뭐야?’를 질문하기 시작하면 잘한다, 못한다로 따질 수가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각자 다른 걸 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이제 잘한다는 말 대신 예를 들면, 그 인물 같았어요, 믿을 수 있었어요, 같은 표현이 더 적당한 것 같아요. 더 들어가면 여기서 나는 뭘 본 것 같아, 이걸 느낀 것 같아, 같은 말이죠. 그러면 결국 감상의 말이 배우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지 않을까요. 시청자 자신에게로요.”
객관적인 관찰자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역설일 수밖에 없다. 김신록은 우리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환기한다. “대상과 분리된 관찰자는 있을 수 없죠. 관찰자와 대상이 만날 때만 관찰이 일어나니까. 그래서 시청자가 완전히 뒤로 빠진 채로 대상인 배우의 연기를 객관적으로 평하는 건 사실 불가능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나의 주관으로 세상과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죠.”
김신록은 어느 인터뷰에서 연기하고, 가르치고, 또 배우며 그렇게 세 바퀴를 균형 있게 굴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 세 바퀴가 어떤 식으로 서로 간섭하고 영향을 주는지 물었다. “서울연극센터의 플레이업(Play-Up) 아카데미라는 연극인 재교육 프로그램이 있어요. 거기서 10년 가까이 워크숍 형식의 강의를 해왔어요. 예전에는 뷰포인트라는 메소드를 가르쳤거든요. 말 그대로 관점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관점이라는 말을 아무리 수평적으로 작동시켜도 내가 너를 본다, 라는 말 자체가 구획되어 있잖아요. 팬데믹을 거치면서 이 메소드 철학이 지금 시대와는 약간 빗겨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 몇 년간 활동이 바빠지기도 해서 수업을 못할 만도 했는데, 이 혼란한 마음과 사유 그대로 수업을 이어가보고자 했어요. 어떤 것을 더듬어 찾아가는 과정을 지속하는 거죠. 수업이 다가올수록 이불 킥을 하면서 내가 괜히 이 어려운 걸 한다고 했나 싶다가도, 막상 하고 나면 늘 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이유는 어떤 사유를 함께 나누는 행위 안에서 사유가 실재적이 되는 것 같거든요. 거기서 얻은 것들을 연기할 때 적용해보기도 하고, 더 공부해야 할 것들이 발견되면 스터디도 하게 되고요.”
김신록에게는 이 과정 전체가 순환하는 실험의 장인 셈이다. 팬데믹 이후 연기와 세계에 대한 기존 관점에 균열을 느꼈고, 그 혼란함을 온전히 마주하려 애쓰는 그의 현재는 어떨까. “최근 ‘신유물론’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이게 연기와 상당히 맞닿아 있어요. 내 안이 어떤 물질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거죠. 비어 있거나 혹은 의지와 주체로 가득 차 있다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의 물질로서 활력과 생기와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또 다른 물질과 만나면서 계속 새로운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것. 이 발상이 연기에 새로운 자극을 줘요. <지옥>을 하던 당시에는 제 화두가 환경과 감각이었는데 그걸 실험하는 장이었거든요. 지금은 또다시 새로운 화두를 품고 지금 만나는 작품에서 실험하는 중이에요. 때론 성공하기도 하고 때론 실패하기도 하죠. 가끔 예전 방식을 끄집어내서 순간을 모면하기도 하고요. 역동적인 협상의 과정인 것 같아요.” 다시 질문의 서두로 돌아간다면, 김신록은 확실히 연기를 즐기고 있다.
김신록과 1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의 키워드는 어쩌면 ‘세계에 저항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매 순간 저에게 ‘진짜 이거 원해?’라는 질문을 해보고 있어요. 거창한 얘기는 아니고요. 전 유튜브를 하루에 4시간씩 보거든요. 그것도 쇼츠로만(웃음). 머리가 아파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자책해요. 이 시간에 더 가치 있는 일을 했어야지! 그렇게 괴로워하면 남편이 옆에서 ‘그게 지금의 너에게 정말 필요하거나 좋은 일이었을 수도 있잖아. 한번 잘 생각해봐’라고 말해요. 괴로워하지 말고 너에게 질문을 해봐. 그게 진짜 괴로운 일인지. 그러니까 지금은 믿어온 모든 가치를 회의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이 얘기를 듣는데 그 끝에 ‘자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김신록은 자유를 향해 가고 있다. 김현민(영화 저널리스트)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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