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와 루이 비통이 만든 예술가의 밤
<보그>와 루이 비통이 예술가 친구들을 소집했다. 웃음, 열기, 영감, 예술을 향한 정열, 모든 것을 숨김없이 드러낸 밤.
4년 전, 루브르 박물관이 딱 하룻밤 동안 에어비앤비로 변모하는 사건이 있었다. 아이 엠 페이(I. M. Pei)가 디자인한 루브르 피라미드 탄생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과 에어비앤비 협업으로 탄생한 이벤트의 당첨자는 ‘모나리자’ 앞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식전주를 마시는 것을 시작으로 ‘밀로의 비너스’를 감상하며 저녁 식사를 즐기고, 나폴레옹 3세의 화려한 처소에서 미니 콘서트를 즐긴 뒤 유리 피라미드에서 잠을 청했다. 피라미드 유리 천장으로 비치는 보석 같은 별빛을 바라보며 즐겼을 극도의 낭만.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방식으로 예술을 탐미한 그 운 좋은 캐나다 여인이 내심 부러웠다. 대학 때 수강한 ‘문화 경영 및 마케팅’이라는 수업에서는 이런 과제가 주어진 적 있었다. 당시 건축이 한창이던 루브르 아부다비의 독특한 투어 프로그램을 고안하라는 것. 조원들과 함께 박물관 건물을 에워싼 물길을 따라 나룻배를 타고 박물관 주변을 돌며 미술관 그 자체를 작품처럼 조망하는 프로그램을 구상했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고 즐기는 일은 언제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화이트 큐브 안을 짜인 동선에 얽매여 서성거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창의적이고 역동적으로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 예술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 꿈꿔보지 않았을까.
9월 5일부터 7일, 2023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가 열리는 기간에 맞춰 서울의 밤은 한층 뜨거워졌다. 5일에는 한남, 6일에는 청담, 7일에는 삼청의 갤러리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행사가 아주 열정적이거나 혹은 은밀하게 펼쳐졌다. <보그>는 루이 비통과 함께 프리즈 아트 페어를 기념하는 파티 ‘Art Night Out’으로 ‘청담 나잇’에 일조했다. 루이 비통 재단이 소장한 신디 셔먼(Cindy Sherman) 컬렉션 전시와 창의적인 퍼포먼스, 샴페인과 DJ 파티가 연달아 이어지는 행사에는 다국적 아티스트와 컬렉터, 퍼포머, 인플루언서, 갤러리스트, 패션 피플, 에디터들이 초대되었다. 여름 내내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사진가 신디 셔먼의 작품을 소개한 전시 공간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은 축제의 주 무대였다. 충분히 깊은 밤, 기묘한 불빛과 공기로 가득찬 전시장에서 사람들은 칵테일 잔을 손에 쥔 채 근황과 취향을 나누고, 프리즈와 키아프에 대한 각자의 고찰을 공유했다.
사진가 신디 셔먼은 배우, 모델, 의상 및 세트 스타일리스트, 헤어 및 메이크업 아티스트, 엔지니어, 조명 기술자, 특수 효과 코디네이터, 리터처 역할을 모두 도맡는 재주꾼이다. 누아르와 B급 영화 속 주인공으로 분한 첫 사진 연작 ‘무제 필름 스틸(Untitled Film Stills)’(1977~1980) 이후 거장의 회화 속에 묘사된 역사 속 인물, 광대, 남성으로도 변신하며 그의 정체성은 날로 다채로워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땀 한 땀 손수 매만져 완성한 셀프 포트레이트 작품 속에서 셔먼은 관객을 똑바로 응시한 채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인상적인 질문을 건넨다.
당신은 누구인가. 인종, 성별, 국적, 직업, 주소, 종교, 가족 관계, 취미 등은 존재에 대한 꽤 많은 단서를 주지만 결코 충분하지는 않다. 커리어적으로 남다른 성취를 이뤄서 행복한 누군가는 남모를 외로움을 겪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즐겁지만 집에서는 혼자만의 사색에 빠지고 싶은 사람도 있다. 예술을 대체로 사랑하지만 미술품에 대한 동경과 싫증을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모든 감정은 일시적이거나 양가적이다. 태어난 이래 자신에게 부여된 수많은 사회적 정체성에 의문을 던지며 다양한 자아를 탐구해온 신디 셔먼은 변장을 통해 그 허점을 겨냥한다. 진실도 아니지만 거짓도 아닌 바로 그 지점, 그 애매모호한 회색 지대에 관심을 드리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투명하게 드러날지도 모르니까.
숨김과 드러냄. 옴니버스 공연으로 ‘Art Night Out’ 축제의 포문을 연 천하제일탈공작소(천탈)는 이것을 퍼포먼스의 주제로 선포했다. “탈을 쓰는 것은 존재를 감추는 행위지만 이를 통해 한결 자유로워진 몸짓은 역설적으로 존재감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정동의 봉산탈춤 취발이춤, 최민우의 은율탈춤 목중춤, 김성현의 고성오광대 원양반춤, 김지훈의 양주별산대놀이 연잎춤은 ‘너와 내가 극적으로 드러나는’ 마법 같은 순간을 창조하며 관객의 흥을 돋웠다. 숨김으로써 만끽한 무한한 자유와 해방감. 천탈을 대표해 <보그>에 공연 소감을 전해온 김지훈 탈꾼은 그것이 탈을 쓴 자에게만 허락된 즐거움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탈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배우의 몰입은 극대화되죠. 관객도 마찬가지예요. 탈을 통해 극의 흐름과 인물의 심리에 한층 짙게 공감하게 되거든요. 자연스럽게 관객 역시 탈꾼의 춤사위에 몰입해 마음껏 춤을 추는 거예요.”
김지훈은 무대를 벗어난 탈 공연장에서 펼치는 퍼포먼스를 즐긴다.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루이 비통 메종 서울처럼. “원래 탈춤은 너른 마당에서 선보이는 예술이었죠. 그러다 근현대에 들어서 원각사를 필두로 한 예술 극장과 프로시니엄(아치형 무대), 블랙박스(가변형 무대) 등 정형적인 공간에서 탈춤을 추게 됐어요. 그런 무대에서는 관객을 가까이 마주하기가 힘들어요. 감정을 긴밀하게 주고받기도 힘들죠. 야외무대나 거리극처럼 관객에 둘러싸여 선보이는 공연을 개인적으로도 훨씬 좋아합니다. 하우스 파티 분위기가 물씬 풍긴 ‘Art Night Out’은 아주 이색적이고 즐거운 무대였어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손끝에서 탄생하기에 예술은 시대성을 띨 수밖에 없다. 현대적이지 않은 예술은 존중받을 순 있어도 공감을 이끌어내기는 힘들다. 김지훈이 꾸준하게 변이하는 신디 셔먼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은 이유다. “전통을 계승한다는 소명은 때론 자기 검열로 작용하기도 해요. 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전통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천탈은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탈춤이 그 시대에 그러했듯 우리는 전승이 아니라 창작을 하고 싶어요. 탈춤이 하나의 장르이자 양식으로 현대인의 너른 사랑을 받길 바라거든요.” 지역 사람들과 함께 벌이는 춤판인 <추는사람>은 천탈이 지난해부터 이어오는 새 탈춤 시리즈로 현대적인 연출을 가미해 만들었다. 힙합이나 펑크 음악에 맞춰 저지를 입고 탈춤을 추거나 랩을 곁들이기도 한다. 그뿐 아니다. 전통 탈춤 속에서 여성은 거의 말이 없거나, 있더라도 남자에 의존해서 말을 하는 수동적 존재로 그려지는데 천탈은 주도적 삶을 사는 여자들에 대한 탈춤극을 만들어 선보이기도 했다. 한창 진행 중인 탈춤극 <오셀로와 이아고>는 해외의 서사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공연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과 수어 통역사,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 해설까지 제공하는 베리어 프리로 진행된다. “‘Art Night Out’ 행사에서 느낀 희열 같은 걸 우리끼리는 ‘신명 난다’고 표현해요. 흥겨운 신과 멋. 신명이라는 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더 많은 동시대인과 교류할 수 있도록 다양한 창작물을 꾸준히 선보일 거예요.”
고민한 끝에 길이 보이고, 그 길 위에서 만난 소중한 동행자들이 추진력을 더해준다. <보그>와 루이 비통 그리고 드래그 퀸. 전통을 존중하면서 트렌드를 만들고, 창의적인 미래를 도모하는 다른 예술 친구들과의 만남은 천탈에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천탈이 시작한 춤판을 반짝이는 존재감으로 무장한 네 명의 드래그 퀸이 이어받는 순간 파티 열기는 더해졌고, 세계는 확장됐다.
풍성한 가발, 화려한 메이크업, 스타킹과 하이힐 등 과장된 여성성을 뽐내는 드래그 퀸은 LGBTQ+ 흐름과 깊이 연관되어 있지만 사실 누구나 될 수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드래그 퀸 나나영롱킴은 <보그>와 루이 비통의 파티를 위해 절친한 동료 캼, 링링, 둘리를 불러 모았다. 댄서나 배우 이력이 있는 친구들로 더욱 역동적인 쇼를 보여줄 수 있는 멤버들이었다. 네 명의 드래그 퀸이 개성 있는 솔로 무대를 펼친 후 듀엣 무대와 4인 무대가 쉴 틈 없이 이어지자 흥겨움이 폭발했다. 나나영롱킴의 가슴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대중적인 퍼포먼스는 아니라서 어색해하는 관객도 많을 거라 예상했는데 다행히 갈수록 분위기가 무르익더라고요. 드래그 공연이 익숙한 외국인 모델과 인플루언서 친구들은 오히려 탈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고 해요. 탈춤과 드래그 퀸. 너무 다른 매력을 자랑하는 두 퍼포먼스가 조화로운 시너지를 낸 것 같아요.” 공연이 끝나고도 네 명의 드래그 퀸은 한참이나 전시장을 활보하며 예술의 밤을 만끽했다. 새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빛나는 추억을 남기고, 와인도 음미하면서.
나나영롱킴은 과거 앤디 워홀의 전시를 보기 위해 에스파스 루이 비통을 방문한 기억을 더듬었다. “통창으로 둘러싸인 테라스 공간이 유난히 눈에 밟히더라고요. 드래그 퀸의 주 무대는 보통 어두운 클럽이거든요. 이런 데서 공연을 해보면 참 좋겠다 싶었는데 <보그>와 루이 비통의 초대를 받고 ‘Dreams come true!’라고 외쳤답니다.”
예술은 집요한 자기표현이다. 미약한 한 줌의 생각도 물감이 묻거나 질료가 더해지며 확고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나나영롱킴은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뽐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변신하는 신디 셔먼의 행보에 동참했다. “드래그 퀸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스스로 디자인해요. 신디 셔먼처럼요. 무대 위에서 ‘여성성’이라는 탈을 쓰는 드래그 퀸도 많지만 저는 페르소나 뒤에 숨기보다는 드러내고, 표현하고 싶어요.” 그는 드래그 공연이 뜨거운 화제를 부르는 이벤트를 넘어 하나의 예술로 인정받길 바라는 꿈을 갖고 있다. “드래그 퍼포먼스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정말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입니다. 외국에는 대낮에 펼쳐지는 드래그 공연도 많고, 부모님 혹은 자녀들과 함께 공연을 보러 가는 경우도 많아요. 그런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11월에 있을 개인 사진전도 열심히 준비하고 있답니다.” 나나영롱킴은 영감을 주는 퍼포머로서 프리즈 위크 내내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했다. <보그>와 루이 비통의 ‘Art Night Out’ 파티 다음 날에는 VIP를 위한 ‘Kiaf on Night’ 무대에도 올랐다.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영광이었고, 감동적이었어요.”
탈꾼 김지훈과 나나영롱킴은 예술의 힘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에 있다고 입을 모았다. 김지훈에 따르면 오래전 과거에는 그 꿈을 ‘대동 사회’라 일컬었다.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모두가 함께 즐기는 것. 하나로 어우러져 화합하고,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는 그런 어울림을 ‘대동’이라고 했죠. 전시장에서 춤판이 벌어지고, 하우스 파티 같은 분위기 속에서 탈춤을 추고, 탈꾼과 드래그 퀸이 한 무대를 꾸미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를 이루게 하는 작은 움직임입니다.”
무엇이 예술이고, 누가 진정한 예술가인가에 대해 우리는 끝없이 논쟁한다. 대중문화와 소수 문화를 가르는 벽을 보면 예술은 편협하다. 예술품에 가격이 매겨지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예술에 대한 순수한 믿음과 환상이 산산조각 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에는 분명 부정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다. 영원할 것 같던 차별과 편견이 예술로 인해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광경을 우리는 꽤 자주 목격해왔다. 형용할 수 없는 공허한 마음을 풍성하게 채워주기도 하고, 메마른 땅에 격의 없는 웃음을 삽시간에 퍼뜨린다. 오직 예술 때문에 우린 그런 마법 같은 순간을 기대할 수 있다. 루이 비통 메종 서울이 조금은 다른 색채로 번쩍거리던 어느 날 밤, 우리는 함께 웃고 춤췄다. 남자로 변한 신디 셔먼이 그런 우리를 내려다보며 가냘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VK)
- 사진
- 오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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