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물을 기다리는 마음: 동면 한옥에서
양혜규 작가는 어디서 열리는 전시든, 이것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찾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합니다. 유명 미술관에서 열리든, 산간 오지에서 선보이든, 그래서 작가에게 명분 없는 전시는 없지요. 국제갤러리 한옥에서 열리고 있는 <동면 한옥>을 작가가 ‘전시’ 대신 ‘프레젠테이션’이라고 일컫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존 작업을 그러모아 단순히 공간에 부려놓는다 해서 다 전시가 아니라는, 즉 전시에는 작업 세계를 새롭게 편성할 정도로 촘촘하고 강력한 큐레이션과 주제 의식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양혜규의 고집에는 ‘결벽증’에 버금가는 엄격한 자기 기준이 작동했을 겁니다. 하지만 전시든 프레젠테이션이든 혹은 프로젝트라 한들 어떻습니까. 뜨거운 프리즈 주간을 맞이해 잔뜩 힘을 준 서울의 어떤 전시보다도 열띤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는데 말이죠. 설사 그것이 한옥이라는 공간이 품은 이국적인 뉘앙스에 어느 정도 빚지고 있다고 해도, 양혜규가 한옥에 부여한 개념을 떠올린다면 그 역시 감탄할 만합니다.
<동면 한옥>은 작가의 과거와 현재가 공간의 미래와 만나 이룬 결과물입니다. 그간 사무 공간으로 쓰인 한옥 공간은 전시장으로서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었죠. 작가는 이 공간의 상태를 ‘유보적 휴면 상태’로 정의하고 중요한 방법론으로 삼았습니다. 즉 공사를 거쳐 곧 변모할 이 공간을 잠시 동안 지금 그 상태, 그 시간에 머물게 하고는, 2010년부터 최근까지 작업을 배치한 겁니다. 작가의 말처럼, ‘동면’이라는 개념은 곧 잠재력에 대한 겁니다. 잠재력이란 무언가가 활성화되기 전의 상태죠. 이 공간의 잠재력이 양혜규라는 작가의 치열한 시간을 겪어내고 탄생한 작품의 잠재력과 만나는 셈입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진동하는 묘한 한약 냄새에 이끌리고, 곳곳에 놓인 전기 양초가 눈에 들어옵니다. 어느 구석에는 비교적 신작인 조각이 방치된 듯 늘어져 있고, 또 그 맞은편 공사하다 만 날것의 벽에는 작가가 실험한 작업이 걸려 있는 식입니다. 작가의 시간성과 공간의 시간성, 그리고 이를 기억하고 경험하는 나의 시간성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지점에서, <동면 한옥>은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특히 양혜규 작가의 기존 작업이 궁금했던 분들에게, 작가의 과거와 현재로 직조된 <동면 한옥>은 훌륭한 타임캡슐입니다. 20여 년 전 작가가 중국 여행 중 흔들리는 차 안에서 느낀 비포장길의 지형과 감각을 추상적으로 그려낸 ‘멀미 드로잉’, 조명과 일상용품으로 스스로를 꾸민 광원 조각 시리즈 ‘토템로봇’은 매우 반가웠습니다. 승천을 꿈꾸며 때를 기다리는 이무기 닮은 ‘중간 유형 – 서리 맞은 다산의 오발 이무기’는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것 같군요. 식재료를 활용한 판화 작업과 여전히 진화 중인 한지 작업 ‘황홀망’, 그리고 회전하고 반사하는 흑경의 아우라는 또 어떻고요. 그간 보고 싶었던 양혜규의 작업이 밀도 높게 자리하며 그려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둑한 방에 도착합니다. 그곳에 옛 어른들이 광에 장독대나 쌀가마니 등을 쌓아두듯 ‘중간 유형’ 작업을 빼곡히 넣어두었죠. ‘진열’보다는 ‘보관’에 더 가까운, 미술계에서는 금기에 가까운 이런 배치법은 세간으로 꽉꽉 들어차 있던 내 기억 속의 어느 풍경처럼 정겹고도 필사적입니다.
<동면 한옥>을 위해 양혜규는 지난 2006년 8월에 열린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 <사동 30번지>를 기꺼이 소환합니다. 당시 독일에서 활동하던 이 젊은 작가는 인천시 사동 30번지에 실제 있던 폐가에서 전시를 엽니다. 오랫동안 버려져 스러져가던 이 공간을 최소한의 전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작가가 맨 처음 해야 했던 일은 바로 ‘청소’와 ‘전기 연결’이었습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이 기본 문제를 해결한 작가는 ‘유령 같은 삶’을 상징하는 장치를 배치하기 시작합니다. 깨진 거울, 조명 기기, 벽걸이 시계, 종이접기로 만든 오브제 등은 작가에게는 대단히 시급했지만, 당시로선 비미술적으로 간주되던 것들이었죠. 하지만 다시 강조하지만, 양혜규에게 의미 없는 전시는 없습니다. 이 전시에서 처음 등장한 빨래 건조대와 의류 행어는 이후 작가의 조각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오브제로 자리 잡았죠. 당시에는 그저 기묘할 정도로 낯설고 이질적이었던 전시 <사동 30번지>는 돌이켜보면 작가로서 작업하고, 전시하고, 존재감을 각인하고, 알리는 등 미술가로서 생존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낸 시도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1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양혜규는 난공불락의 세계를 구축하며, 알려진 작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사동 30번지>를 구성하던 성긴 작업들 역시 <동면 한옥>에 이르러 어엿한 작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죠. 그때 전선을 연결하기 위해 악전고투한 작가는 이번엔 반대로 멀쩡히 다 마련되어 있는 전기를 전혀 쓰지 않기로 합니다. 오로지 자연광만 활용하는 <동면 한옥>의 전시 공간은 그래서 밤에는 깜깜할 수밖에 없습니다. 흔들흔들하는 전기 양초와 광원 조각의 전구, 오로지 손전등만으로 더듬더듬 공간을 짚어보는 건 정말이지 끝내주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캄캄한 작업들을 탐색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환한 낮에는 보지 못한 부분 부분이 오히려 더 잘 보이더군요. 이미 잘 안다고 생각했던 작업들이 저에게 또 다른 표정을 지어 보였고, 새로운 면모를 수줍게 드러냈습니다. 양혜규는 늘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작가이고, 스스로를 과도기적 상태에 두고자 하는 이는 절대 안주할 수 없지요. 변화를 유예한 <동면 한옥>의 공간에서, 무대를 벗어난 배우처럼 편안해 보이는 작업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양혜규의 움직임과 존재감은 더욱 만개합니다. 그것이 <동면 한옥>의 진짜 잠재력입니다.
야간 개관은 끝났지만, 너무 아쉬워 마세요. 양혜규가 소격동 한가운데서 만들어낸 소우주가 10월 8일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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