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가 멈춰 선 곳
빠르고 유유히. 망설임 없이 질주하는 박세리가 멈춰 선 곳마다 솟아오르는 신선한 활력.
워낙 일찍 움직인다는 얘기를 들어 저도 평소보다 서둘렀습니다(박세리는 예정 시간보다 40분 일찍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비가 와서 차가 밀리겠다 싶었어요. 늘 미리미리 움직이는 편이에요. 선수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죠. 어떤 때는 1시간 반이나 일찍 도착하기도 해요. 알람을 맞출 필요가 없어요. 회사 직원들도 덩달아 빨리빨리 움직이죠. 방송 출연이 힘든 게 시작 시간과 끝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더라고요. 아주 힘들어요(웃음).
이번 <보그> 화보 촬영은 조금 색다르게 느껴졌을까요. 올해 홍보대사로 위촉된 애스턴 마틴의 DBX707과 함께했습니다.
차와 함께 화보 촬영을 한 건 처음이에요. <보그> 아이디어로 반려견 모찌까지 함께했는데 덕분에 더 즐거웠어요. 저보다 우리 모찌가 잘 나온 사진으로 골라서 실어주세요(웃음).
반려견 여섯 마리, 반려묘 두 마리의 ‘엄마’죠. 은퇴 후 삶에서 아이들이 차지하는 지분이 크겠어요.
2016년에 은퇴하고 나서 맨 처음 모찌를 가족으로 들이고, SNS에서 눈이 가는 아이들을 하나둘씩 데려오다 보니 어느덧 그렇게 됐죠. 애들한테 받는 위로가 정말 커요. 퇴근하면 저를 반겨줄 가족이 있으니까 힘이 나죠. 더 부지런히 살게 되고요.
또 하나의 든든한 동반자인 DBX707은 최고의 주행 능력과 안정감을 겸비한 SUV입니다. 저도 직접 운전해보니 폭발력 있으면서도 우아한 매력이 느껴지더라고요. 원래 SUV를 편애하신다고 들었어요.
안전을 중시하기 때문에 튼튼하고 큰 차를 선호하거든요.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생활하다 보니 고속도로를 탈 때가 많은데 DBX707처럼 묵직한 차는 가속할 때 안정감이 남달라요. 특히 핸들링 감각이 탁월해 아주 부드럽게 나아가니, 덕분에 장거리 운전을 해도 덜 피곤하죠.
인생 첫 차는 무엇이었나요?
벤츠 ML 클래스였는데 그것도 벤츠에서 출시한 첫 SUV였어요. 스무 살 때 미국 가서 곧바로 운전면허를 따자마자 산 차죠. 그땐 골프 짐이 많아 이것저것 싣고 다니기에는 SUV가 편했거든요. 이후 모델이 업데이트될 때마다 바꿔 타다가, BMW X6가 나왔을 때 사서 한동안 잘 타고 다녔어요. 늘 검은색 SUV를 몰았죠. 강인해 보이는 게 좋아요.
드라이브도 종종 즐기시나요?
시간이 없어요. 한번 집에 가면 웬만해서는 집 밖으로 잘 안 나가죠. 강아지들과 산책 겸 30분 이내로 걸어 다닐 수 있는 정도가 쉴 때 제 활동 반경의 전부라고 보시면 돼요.
1년 전 이맘때 ‘LG전자 박세리 월드매치’가 열렸어요. 골프 레전드와 현역 선수들이 함께 경기를 펼치는 자선 행사죠. 얼마 전 부산에서 두 번째 월드매치가 열렸는데 이형택(테니스), 박태환(수영), 이동국(축구), 진종오(사격), 윤성빈(스켈레톤), 신수지(체조) 등 올해는 더 다양한 스포츠 스타를 초대했더군요.
지난해는 ‘골프의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의미를 앞세웠다면 올해는 K-스포츠와 K-아트 등 보다 다양한 콘텐츠를 아우르기 위해 신경 썼어요. 내년에는 아마 또 다를 거예요. 해마다 스토리를 조금씩 바꾸려고 하거든요. 그래야 재미있잖아요. 행사에 참여해주는 레전드 선수들도 즐겁고요.
안니카 소렌스탐 선수는 월드매치 직전에 청주에서 열린 ‘세리팍 & 안니카 인비테이셔널 아시아’에도 참여했습니다. 과거의 경쟁자와 함께 전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에요.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같으니 이젠 굳이 경쟁할 필요가 없죠. 안니카도 저처럼 재단과 단체를 통해 후배 양성과 골프계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어요. 그런 레전드 선수가 많아요. 안니카처럼 되고 싶은 선수들, 저를 롤모델로 하는 선수들 모두가 건강한 경쟁을 펼칠 수 있는 무대와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공동 목표죠. 다들 같은 마음이라 힘을 합칠 수 있으면 주저하지 않는 편이에요.
지난여름에는 미국골프협회(USGA)에서 역대 미국 메이저 대회 우승자를 초청한 행사에 다녀왔죠.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아요.
저도 우승자로 참석하긴 했지만 영광스러운 자리였어요. 스스로 ‘새 발의 피’라 느낄 만큼 훌륭한 레전드 선수들이 모인 자리에 초대받아 감사했죠. 운동선수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구나, 다시 한번 느끼고 왔어요.
다들 은퇴 이후의 삶을 어떻게 즐기고 있던가요?
편안하게 골프를 즐기는 분들도 있고, 결혼해서 가정주부로 사는 친구들, 제2의 인생을 시작한 후배들, 저처럼 골프계를 위해 애쓰는 사람 등 아주 다양해요. 무엇을 하든 참 보기 좋더라고요. 한창때는 다들 마음의 여유 없이 살다가 이제 웃으면서 서로를 응원해주는 모습이요. 이젠 결이 조금 다른 반가움을 느끼죠.
1998년 US 여자 오픈에서 ‘맨발 우승’을 거둔 지 25년이 되었습니다. 한국인 최초 메이저 우승, LPGA(미국여자프로골프) 통산 25승, 골프 명예의 전당 입회 등 과거의 이력이 당신에게 선사하는 것은?
자신감이죠. 미국에 갈 때 가진 목표가 명예의 전당에 오르겠다는거였는데 7년 만에 꿈을 이뤘어요. 어릴 때부터 어떤 직업을 택하든 그 분야 최고가 되어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가 굉장히 컸죠. 새로운 도전을 할 때 그런 마음이 어느 정도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 일찍이 꿈을 지지해주신 것도 감사하게 느끼는 부분이고요.
새삼스럽지만 이름 뜻을 물어도 될까요?
‘세상을 빛내리’라는 뜻으로 친할머니가 지어준 순우리말 이름이에요. 참 잘 지어주셨죠? 언니는 박유리, 동생은 박애리, 전부 ‘리’ 자 돌림이에요.
빛나는 선수 시절이었지만 돌아봤을 때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뭐라고 그냥 지나쳤을까’ 싶은 순간이 몇 있어요. 후배나 동료들과 밥 한번 먹는 일이 그런 것이죠. 마음의 여유가 너무 없었으니까요. 다음 주에 보니까, 내년에 보면 되니까 하는 마음으로 무신경하게 흘려보낸 순간들이 아쉽긴 해요.
이제는 순간을 충분히 즐기고 계시죠.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주문하는 것처럼 남다른 ‘플렉스’에 대리 만족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그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니에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삶이 아니잖아요. 항상 시간에 얽매여 살고, 밤에도 일하다 보면 커피 한잔 마음 편히 마실 겨를도 없이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는데 그럼 남는 게 없잖아요. 선수 시절에도 그런 생각은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밥 먹을 때라도 최대한 편하게, 주변 의식 안 하고 시간을 누리려 했죠. 그런 일상이 결코 소박한 게 아니에요. 충분히 즐겨야죠.
틈틈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어떤 즐거움을 느끼나요?
덕분에 팬층이 훨씬 다양해졌죠. 밝은 기운을 준다는 이미지도 생겼는데 은근히 의식하게 되더라고요. 예능 프로그램 같은 경우는 너무 가볍지 않으면서 솔직하게 임할 수 있는 환경일 때 출연을 결심하는 편이에요.
일상에서 박세리는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은 여자더군요.
눈물은 원래 많았어요. 다만 웃음이 그렇게 많은지는 몰랐지. 하여튼 둘 다 엄청 많아요.
선수 때는 그런 감정의 진폭을 묻어두고 살았던 거잖아요.
골프가 그래요. 예민한 스포츠죠.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실수가 나오거든요.
개인 유튜브 채널 ‘세리 TV’의 구독자가 30만 명을 넘었어요. 50만 명이 넘으면 청담동에서 파티를 열겠다고 했죠.
그건 한 달이라는 시간 제한이 있는 공약이었는데 이미 끝났어요(웃음). 선물은 좀 고민해봐야죠. 팬들과 소통하려고 시작한 건데 골프 선수라는 정체성은 가져가면서 자유롭고 편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즐겁게 도전해보고 있어요. 캐디도 되어보고 스크린 골프도 쳐보면서요.
닉네임이 필요할 때 항상 ‘까칠녀’ ‘성질녀’라는 이름을 쓰더군요(웃음).
솔직히 성격이 유한 편은 아니니까요. 운동선수라 그런지 잘못된 부분이 눈에 띄면 잘 넘어가질 못해요. 어떤 관계에서든 선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하고요. 누구와 어떤 상황에 놓이건 어느 정도의 긴장감은 항상 갖고 임하죠. 다른 사람들에 비해 ‘친하다’는 기준도 조금 까다롭게 적용하는 면이 있어요.
인생을 18홀에 비유한다면 은퇴 후의 삶은 ‘남은 9홀’이라 표현했죠. 많은 걸 이뤘지만 어떻게 보면 이제 다시 시작이기도 해요.
일단 운동선수로서 전반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어 감사하고요. 은퇴 후 맞이한 후반전은 또 다른 도전의 연속이죠. 새로운 꿈은 후배들 때문에 생겼어요. 제가 누군가의 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 후배들이 좋은 대우를 받으며 골프에 집중하는 환경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커졌거든요. 그래서 회사(바즈인터내셔널)도 차린 거고요. 후배들 덕분에 은퇴 후의 공허함 같은 것에 매몰될 겨를 없이 새로운 꿈을 향해 움직일 수 있어서 오히려 고마워요.
올림픽 여자 골프 국가 대표 팀 감독에 이어 올해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해설 위원으로 나섰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후배들의 경기를 지켜보나요?
안쓰럽고, 기특하고, 만감이 교차해요. 더 잘했으면 좋겠고, 대한민국 골프계를 이끌 최고의 선수가 되기를 바라죠. 물론 선수들이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라 그게 좀 신경 쓰이긴 해요. 더 바쁘게 움직여야겠다고 느끼죠.
박세리의 상상은 차근차근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용인시와 함께 골프 R&D 센터와 골프 테마파크 설립을 추진한다는 업무 협약을 체결한 데 이어 박세리의 이름을 내건 최초의 LPGA 투어가 내년 3월 팜스프링스에서 개최된다고요.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있죠. 나라고 모든 걸 다 이룰 수는 없으니 급할 것 없이 천천히 전진하자고 다짐했는데 그 마음에 공감해주고 도움을 준 사람들 덕분에 가능해지는 것 같아요.
환경 개선에 대한 의지가 강해진 계기가 있었나요?
해외에서 선수 생활 할 때 좋은 대우를 받는 선수들을 보며 느낀 게 많았어요. 골프용품 같은 정말 사소한 부분까지 선수 한 명에 대한 지원이 정말 전폭적이더라고요. ‘이러니까 잘할 수밖에’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죠. 그때부터 ‘은퇴하면 이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골프의 인기가 높아졌지만 선수 한 명에 대한 지원은 여전히 부족해요. 제가 선수 생활 할 때보다 지역사회의 지원은 오히려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요. 주니어들에게는 실전 연습할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선수들이 편히 드나들 수 있는 골프장도 한참 부족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 좋은 변화가 있다면요.
훌륭한 남자 선수들이 많이 나와서 좋아요. 투어의 인지도나 인기가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것도 불안정하거든요. KPGA와 KLPGA가 균형 있게 함께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남자든, 여자든, 더 많은 남녀 선수가 해외에서 활약하는 광경을 보고 싶어요.
골프 웨어도 어느새 뜨거운 패션 키워드가 됐어요.
옛날에 골프 웨어는 정말 골프 할 때만 입어야 할 것 같은 옷이었는데(웃음) 요즘은 평상복과 다름없더라고요. 그런데 옷에 너무 신경 쓰면 그것도 불편할 것 같아요. 골프가 생각보다 섬세한 운동이라 몸이 편하지 않으면 집중력이 금세 흐트러지거든요.
우연히 어머니와 함께 찍힌 선수 시절 사진을 봤는데 너무 멋지더라고요. 보이시한 쇼트커트, 화이트 티셔츠, 골드 네크리스와 이어링을 매치한 심플한 스타일링이 쿨해 보였죠.
선수에게는 편한 옷이 제일이고, 그다음으로는 깔끔하고 클래식한 스타일을 선호했어요. 옷 색깔도 화이트, 블랙, 베이지가 전부였죠. 프린트가 과하면 싫었고요. 치마도 안 좋아했는데 화보 촬영 때마다 치마를 입게 되네요(웃음).
사업가, 감독, 해설 위원, 엔터테이너로 변신하며 은퇴 후에 너무 바쁘게만 지내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기도 합니다.
쉬어도 가만있지 못하는 편이라 할 만해요. 엄청 바쁘긴 하지만 집에서 애들이랑 편하게 있으면 금세 충전되죠. 차 한잔의 여유도 소중하고요. 그런 게 삶의 가장 큰 낙이죠.
지금 박세리에게 가장 귀한 것은 시간일까요?
그러게요. 시간이 점점 더 빨리 흐르는 것 같아요.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웃음과 재미를 놓치고 사는 건 자기만 손해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살아가야죠. 즐겁게 지낼수록 좋은 일이 더 많이 생기더라고요. 핵심은 지금 내 모습을 인정하는 거예요. 그럼 벅찰 것만 같은 하루도 즐겁고 의미 있게 느껴지더라고요. 이제 다 끝났나요? 모찌야, 얼른 집에 가자.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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