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에서 만난 다니엘 리, 바야흐로 버버리 시대
버버리의 장미가 성수동 거리에 피었다.
다니엘 리(Daniel Lee)의 목소리는 꽤 작은 편이다. 그의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버버리의 아티스틱 디렉터로서 다니엘 리의 작업 방식은 그와 반대에 가깝다. 크게 소리치지 않아도, 한눈에 봐도 버버리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 멀리 바라보아도, 가까이 느껴보아도 현대적이고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자랑해야 한다. 새로운 세대의 고객이 더 쉽게 버버리라는 거대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친절해야 한다.
지난 2월 런던에서 버버리 첫 컬렉션을 선보인 그는 이 모든 철학을 거대한 버버리 제국에 접목했다. 특유의 네이비 컬러, 한동안 눈에 띄지 않던 버버리의 기사 문양, 다채로운 체크와 영국식 유머를 담은 프린트 등은 다니엘 리의 버버리 시대를 상징할 만하다. 그리고 9월 런던에서 두 번째 컬렉션을 선보인 직후 그는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지는 성수동이었다. 연무장길 일대를 버버리의 보랏빛 장미 프린트로 물들이며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보온 백과 구두만 판매하는 자그마한 매장도 마련했고, 런던 카페 ‘노먼스(Norman’s)의 공간도 열었다. 곳곳에 버버리 깃발을 휘날리며 위대한 정복의 시작을 알렸다.
팝업 스토어 첫날 직접 손님을 맞이한 그는 다음 날 <보그>와 함께 성수동 골목을 누볐다. 공장 지대이자 삶의 터전인 성수동을 느끼며 포트레이트 촬영에 임했다. 지난밤의 흥분이 미처 가시지 않은 채 만난 그는 친절하고도 고요했다. 그가 들려주는 새로운 버버리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 있다.
버버리의 세상에 들어선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첫 순간에 대한 기억은 어떤가?
버버리는 내가 지금까지 맡은 일 중 가장 큰일이기에 막중한 책임을 느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반적으로 큰 부담감이 있다. 예전에는 늘 무대 뒤에 머물렀는데 이제 좀 더 앞으로 나서야 하는 자리라는 변화에 적응하는 중이다.
영국인이기에 어릴 때부터 버버리의 존재가 자연스러울 법하다.
영국 북부에 있는 브래드퍼드라는 도시 교외에서 자랐다. 집에서 한쪽으로 20분 거리에 버버리 트렌치 코트 공장이 있고, 다른 쪽으로 20분 거리에는 개버딘을 만드는 직물 공장이 있었다. 친척들이 그 공장에서 일했다. 또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디자인하는 버버리를 좋아했는데, 당시의 개방감과 그가 영국 문화를 활용하는 방식이 좋았다.
버버리는 빼놓을 수 없는 영국의 상징이다. 그 옆에는 여왕, 펑크와 록, 뮤지컬, 예술 등이 자리한다. 지금 영국을 상징하는 건 무엇인가?
내게 버버리는 현대 영국을 상징하고, 버버리가 다른 럭셔리 브랜드와 차별화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버버리는 늘 가치 체계와 코드를 통해 이런 요소를 표현한다. 또 영국의 패션과 예술, 교육, 헤리티지, 비비안 웨스트우드, 존 갈리아노, 알렉산더 맥퀸의 창의성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들처럼 영국의 의례와 왕실 복장, 제복, 스트리트와 서브컬처 코드를 철저히 아우르는 영국의 복식에서 큰 매력을 느끼고 수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특히 런던은 세계에서 다양성을 아주 잘 느낄 수 있는 도시다. 내가 자란 브래드퍼드도 그런 도시다. 그리고 영국인의 유머 감각, 영국에서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다른 곳에서는 찾기 힘들다.
첫 쇼에서 느낀 건 버버리라는 브랜드와 아웃도어 라이프의 끈끈한 관계였다. 지난 9월 쇼도 글램핑장 같은 현장이 돋보였다. 영국 시골과 그 풍경 속 버버리는 꽤 자연스럽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해가 드나, 밖에 나가 개를 산책시킨 것이 내 정체성의 일부다. 거친 해안과 푸르른 초원, 빅토리안 양식 정원 등 영국의 대비되는 풍경도 좋아하며 이런 점을 활용해 할 수 있는 게 많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생각하면 야외 활동을 위한 복장은 버버리가 추구하는 가치의 핵심이다. 눈, 산, 뜨거운 여름 햇볕 같은 다양한 날씨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준다. 품질과 스타일만큼 중요한 것이 기능이다. 이 점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버버리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런웨이 컬렉션을 공개하는 장소로 런던 북부와 남부에 있는 공원을 선택했다.
자연과 반대되는 것은 미래적인 기술의 세상이다. 패션 속 기술 변화에도 관심이 많은가?
늘 미래지향적이고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며,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이 내 소임이라 여긴다. 내가 가꾸는 버버리는 매우 단순하고 공감하기 쉬운 접근 방식을 취한다.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말을 많이 하는 대신 이미지와 제품 자체를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웹사이트는 더 실용적인 방향으로 개편했다. 버버리를 모두가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니엘 리의 버버리를 상징하는 건 새로운 블루다.
‘나이트 블루(Knight Blue)’라고 하는 푸른색으로, 이제 버버리를 상징하는 색이다. 새 로고를 만들고 기마상 디자인에 나이트 블루 색상을 입히면서 리브랜딩을 단행했다. 버버리 아카이브에서 영감을 받은 이 색은 영국다움을 상징하는 로열 블루 컬러와 아주 비슷하다. 내 마음에 꼭 든다. 밝고 대담하며, 낙관적이고 강렬하다. 말한 것처럼 나는 예전부터 컬러를 상징 요소로 사용했다. 컬러가 매우 명확하고 영리한 브랜딩 장치라는 것을 마르탱 마르지엘라에서 일하면서 배웠다. 마르지엘라에서 가장 중요한 색은 화이트였다. 기계적인 소통 방식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주 직접적인 느낌이었다.
말을 탄 기사를 담은 로고도 부활했다.
기마상 디자인은 용기, 보호, 진취적 관점을 상징하는 매우 아름다운 로고다. 그런 가치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기마상 디자인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트렌치 코트 뒷면의 라벨로 사용되어왔다. 좀 더 현대적인 느낌을 살려서 디자인을 살짝 변화시켰다. 내가 버버리를 바라보는 주된 관점은 하우스의 역사와 아카이브를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알리는 것이다. 기마상 디자인을 활용하는 것은 이런 방향성의 완벽한 예가 되어준다.
그 로고 외에도 수많은 아카이브가 기다리고 있다.
버버리 아카이브는 어마어마하게 방대하고, 우리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일 뿐이다. 활용할 자료가 무궁무진하다.
방대한 아카이브를 지녔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버버리는 밀라노나 파리의 럭셔리 브랜드와 다르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버버리는 영국적이고 아우터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버버리에 오기 전 브랜드에서는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일의 양이 엄청날 듯하다.
힘든 직업이긴 하지만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 갤러리에 가거나 콘서트, 무용 공연, 영화, TV를 보는 등 여가 시간에 하는 모든 활동이 일에 도움이 된다.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서울을 여러 번 방문했다.
버버리에 합류한 직후인 지난 4월 서울을 방문한 것이 최근이다. 이곳의 에너지가 매우 좋았다. 성수 프로젝트 역시 기대가 크다.
성수 프로젝트가 인상적인 것은 젊은 세대가 직접적으로 버버리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버버리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직접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온라인 플랫폼과 매장에서 그 점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성수 프로젝트에서 신경 쓴 것은?
성수 로즈 팝업과 테이크 오버에서는 발견과 탐험의 기술을 조명한다. 이는 버버리 역사의 중심인 동시에,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사용하는 특성이다. 몰입도 높은 경험을 선사해 버버리의 지극히 영국적인 상징과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자리인 셈이다. 영국 장미의 모습을 형상화한 꽃잎 미로(Petal Maze)도 거닐도록 만들었다. 또 버버리의 최신 슈즈 디자인을 공개하는 ‘성수 슈’와 겨울 쇼에서 증정한 보온 백을 선보이는 ‘성수 보틀’도 함께 볼 수 있다. 영국의 인기 카페 ‘노먼스’도 경험해보기 바란다.
공간에서 들리는 음악도 특색 있었다. 평소 어떤 음악을 듣는가?
힙합과 하우스 뮤직을 비롯해 모든 음악을 좋아한다. 내게 음악은 모든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아름다운 표현 방식이다.
패션에 대한 어린 시절 추억이 있나?
AOL을 통해 인터넷을 막 사용하기 시작한 시절부터 인터넷에서 존 갈리아노와 알렉산더 맥퀸 같은 디자이너의 작업을 보면서 열광했다.
패션을 직업으로 선택한 계기는?
패션만이 아니라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았다. 다시 말하지만 어린 시절 쇼를 보면서 영감을 받고는 했다. 그 쇼를 바라보고 있으면 패션 디자이너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가능성이 보였다. 아름다운 것을 만들면서 시간을 보내는 건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첫 직장은 어디였나?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다니면서 마르지엘라에서 인턴십을 한 게 첫 직장이었다. 마르지엘라가 은퇴하기 전이었고 아주 훌륭한 경험이었다. 프랑스어를 전혀 못하는 상태로 입사해서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성장하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에르메스에 있는 나데주 바니 시뷸스키(Nadège Vanhee-Cybulski) 밑에서도 일했다.
마르지엘라부터 발렌시아가, 도나 카란, 셀린느까지 수많은 브랜드와 도시를 돌아다니며 살았다. 버버리와 영국으로 오게 된 기분은 어떤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좋다. 물론 그런 경험을 하면서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여러 지역에서 살아보는 경험을 한 건 엄청난 행운이었지만 언제나 마음은 고향에 있는 것 같다.
버버리는 영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이자 기업이다. 버버리에서 일한다는 것을 가족들이 어떻게 여기나?
매우 자랑스러워한다.(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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