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쎈여자 강남순’으로 보는 한국인의 결핍
<힘쎈여자 강남순>은 <힘쎈여자 도봉순>(2017)의 스핀오프지만 전작을 보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전작과의 관계는 작중에서 재치 있게 짚어준다. 주인공 남순의 할머니 길중간(김해숙)은 첫눈에 반한 남자 서준희(정보석)가 피싱 사기로 2,000만원을 잃자 그를 도와주러 강남경찰서에 가는데, 거기서 도봉순(박보영)과 안민혁(박형식)을 만난다. 경찰서 복도를 지나다 그들의 사건 내용을 들은 중간은 ‘우리 집안 여자’가 분명하다며 봉순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러곤 “강남구는 우리가 관리해야 하는데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이 집안 여자들은 X 염색체로 유전되는 괴력을 가졌지만 나쁜 일에 힘을 쓰면 괴력이 사라진다. 그들은 이 괴력을 이용해 각자의 영역을 보호하는 일을 해온 듯하다. 이 설정이라면 다른 스핀오프에서는 여러 슈퍼 히어로가 공조하는 거창한 스케일을 시도해볼 수도 있겠다. 물론 <힘쎈여자 강남순>이 잘됐을 때 얘긴데, 이 작품은 중반을 향해 가는 현재 최고 시청률 9.8%를 돌파하며 순항 중이다.
<힘쎈여자 강남순>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대놓고 키치한 슈퍼 히어로물이다. 괴력 묘사에 동원되는 특수 효과와 그래픽은 공들인 티가 나지만 이야기의 디테일은 강남순이 몽골에서 던져버린 워낭처럼 시원하게 저 세상으로 날아갔다. 그 워낭이 정확히 남순의 인연에게 날아갔듯 이 작품의 의도된 허술함도 밝고 쉬운 웃음을 원하는 시청자들에게 사뿐히 안착한다. 선명한 권선징악, 엉뚱한 캐릭터, 거침없이 전개되는 이야기, 과장된 연출과 연기가 명랑 만화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 안에 적절한 균형이 있고 개별 장면의 웃음 타이밍도 좋다. 오랜만에 복귀한 김정은의 코믹 연기는 녹슬지 않았고, 요염한 여장부 김해숙 캐릭터도 재미있다. 주우재, 최희진, 아키라 등 새로운 신 스틸러의 탄생도 반갑다. 정작 타이틀 롤인 강남순의 흡인력이 아직 크지 않은데 ‘힘쎈여자’ 가문에서도 최고 능력자인 이 캐릭터는 후반 액션에서 빛을 발할 것으로 기대된다.
주인공 강남순(이유미)은 다섯 살 때 아빠 강봉고(이승준)를 따라서 몽골 여행을 갔다가 실종되었다. 남순의 엄마 황금주(김정은)는 재벌들도 급전이 필요할 때 찾을 정도로 큰 전당포를 운영하는 수완 좋은 사업가다. 밤이면 가죽 쫄쫄이를 입고 오토바이를 몰며 악당들을 쫓는 한국판 배트우먼이기도 하다. 집사 정나영(오정연)과 금주의 관계 설정도 <배트맨>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다. 마약 수사대 경찰 강희식(옹성우)의 도움으로 재회한 남순과 금주는 좋은 세상 만들기에 함께 힘쓰기로 한다.
이 작품의 세계관이 재미있는 건 현실의 역학이 반전된 상황 때문이다. 길중간, 황금주, 강남순 3대는 성은 다르지만 엄연한 모계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말끝마다 ‘우리 집안 여자들’이고, X 염색체의 재생산에만 관심 있을 뿐 허약한 남성 자손은 대를 잇거나 말거나 방치한다. 남편은 딸을 낳기 위한 도구에 가깝다. 길중간은 남편이 도망갔지만 전혀 아쉬워하지 않고 새로 점찍은 남자를 들쳐 업은 채 호텔로 끌고 간다. 완력에 의한 성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니 성별이 바뀌었다면 방심위 징계감이다. 하지만 여자가 남자를 힘으로 제압하는 이 상황에는 현실의 아픔을 연상시키는 비릿함이 없다. 황금주는 저 옛날 아버지들처럼 호강시켜준다는 감언이설로 남편을 꼬드겼지만 결국 이혼했고, 그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어 보인다. 사기꾼 브래드 송(아키라)처럼 남성성을 과시하는 이들에겐 질색팔색하고 브래드 송의 비서나 강희식처럼 참한 젊은이들에게 포용력을 보이는 금주의 모습도 전통적 성 역할의 반전을 잘 보여준다.
<힘쎈여자 강남순>이 내세우는 돈의 가치에 대한 기준도 흥미롭다. 부자들의 사교 클럽에 들어간 황금주는 당당하게 자신이 ‘졸부’라고 밝힌다. 이 드라마도 여성 3대가 돈의 힘을 거침없이 이용하는 모습과 그들의 화려한 패션을 통해 부를 향한 갈망의 대리 만족을 선사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물려받은 돈보다 직접 번 돈을 가치 있게 여기는 정서가 있다. 노동을 통한 신분 상승을 포기함으로써 올드 머니의 특권을 용인하고 선망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요즘 사회 분위기를 고려하면 의미 있는 판타지다. 여기에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는 지현수(주우재), 노선생(경리) 콤비를 통해 일확천금의 덧없음도 짚어줄 듯하다.
한 국가의 문화 콘텐츠에는 시대마다 유행하는 악당상이 있기 마련이다. <극한 직업>, <약한영웅> 등 최근 한국 콘텐츠는 한국이 더 이상 마약 청정국이 아니라는 대중의 두려움에 기반한 경우가 많다. 배경이 강남인 <힘쎈여자 강남순>은 말할 것도 없다. ‘힘쎈여자’ 3대가 신종 마약을 퍼뜨리려는 악의 무리와 대결하는 게 작품 후반의 골자가 될 것이다.
이처럼 <힘쎈여자 강남순>은 정의, 노동을 통한 신분 상승, 강력한 선, 가부장제의 파괴 등 우리에게 결핍된 것이나 실현이 요원한 희망을 대신 그려 보인다. 또 현시대의 두려움도 담고 있다. 허술한 척하지만 영리한 작품이고 명랑하지만 대중의 비관을 외면하지 않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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