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신념에 관한 호기심이 창조한 글 #권오경 #인센디어리스

2023.11.06

신념에 관한 호기심이 창조한 글 #권오경 #인센디어리스

권오경, 허주은, 악시 오, 김주혜, 그레이스 M. 조. 5인의 소설가는 이국에 머물지라도 태어난 땅의 역사를, 어머니가 들려준 경험을 잊지 않고 작품으로 발화했다. 이들이 쓴 이야기는 여러 나라의 독자를 한국의 아픈 과거 혹은 아름다운 세계로 이끈다.

권오경 작가는 신념 때문에 테러를 자행하는 사이비 종교 집단의 이야기를 다룬 데뷔작 <인센디어리스>로 파동을 일으켰다. 신념의 근간을 겨냥하는 그의 집요한 호기심은 맹목적인 사회에 꼭 필요한 구원이다.

스모키 메이크업을 고집하는 권오경은 불의와 편견에 기꺼이 맞서는 작가다. “미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아시아 여성에 대한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이 만연해요. 근거 없는 고정관념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표현하고 싶어요.”

당신의 첫 장편소설이자 대표작 <인센디어리스>(2018)가 마침내 지난 1월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한국에 정식 출간됐습니다. 덕분에 한국어가 익숙한 가족이나 지인으로부터 새로운 감상을 듣기도 했을 것 같은데요. 흥미롭거나 인상적인 반응이 있나요?

번역가 김지현과 출판사 관계자들, 한국 독자들이 주인공 ‘피비 해진 인’의 엄마가 인상 깊다고 해준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제까지 주인공의 엄마에 대한 반응은 많이 듣지 못했거든요. 남다른 희생정신으로 딸을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키우려 갖은 애를 쓰는 피비의 엄마와 피비의 관계는 저와 엄마의 관계를 닮아 있기도 해요. 제가 세 살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한 후 LA에 정착했어요. 그때부터 엄마는 낯선 땅에서 저를 부족함 없이 키워내기 위해 많은 것을 감내하셨죠. 엄마는 강인하고 자비로운 사람이에요. 소설 속에서 피비의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피비에게 언제나 강렬한 존재감으로 현현하듯 엄마 역시 저에게 그런 존재죠. <인센디어리스>를 통해 엄마가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기쁩니다.

한국어로 선동, 방화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인센디어리스>는 임신중절 반대를 위해 테러까지 벌이는 사이비 종교 집단 이야기죠. 종교적 체험에서 영감을 얻은 소설로, 완성하기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집필하는 데 이토록 긴 시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공들여 취재한 부분도 있나요?

미국에 실재하는 사이비 종교 집단과 테러 단체, 임신중절을 둘러싼 역사 및 정치적 사건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어요. 하지만 그토록 긴 시간이 소요된 것은 언어와 표현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단어와 음절, 구두점, 운율 등 표현 하나하나에 고집스럽게 몰두하는 편이거든요. 퇴고를 거듭하면서요. ‘죽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책을 발표할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두면 좀 더 결단력 있게 글쓰기를 밀어붙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동경하는 소설가들이 손이 아주 빠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는 안심하고, 저만의 속도를 존중하게 되었어요.

신앙을 잃은 윌,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피비, 사이비 종교를 창시한 존, 소설은 세 중심인물의 이야기가 번갈아 등장하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모든 인물에 당신의 일부가 투영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스스로를 파편화하고, 탐색하고, 규정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 있나요?

어릴 때부터 신앙심이 아주 깊었어요. 원래 꿈은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것이었죠. 그러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 한순간에 믿음을 잃게 되었어요. 삶의 의미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앙을 잃기 전후로 삶은 완전히 달라졌고, 저에게 남은 것은 지속적인 외로움이었어요. 교회 친구들까지 한꺼번에 잃게 되었으니 의지할 사람도 없었죠. 지금도 때로 엄청난 공허감이 밀려와요. 그 후 ‘내가 보는 세상과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완전히 다른 모습일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의문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그 간극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 가능하긴 할까? <인센디어리스>는 그런 질문으로부터 탄생했죠. 아르헨티나 출신의 소설가 훌리오 코르타사르를 정말 좋아하는데 “나는 질문하는 사람이다”라는 그의 말에 소설가로서 깊이 공감해요. 질문을 던지고, 나름대로 답변을 했다가 다시 과거의 생각을 반박하고 뭔가를 아주 조금씩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세 명의 인물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가장 상징적이라고 느끼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윌의 입장에서 쓰인 첫 번째 챕터가 이야기의 전부를 축약한다고 할수 있어요. 사이비 신도들이 건물 옥상 위에 모여 서서 자신들이 폭탄으로 무너뜨린 건물 잔해를 지켜보고 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존 릴은 왜 가장 먼저 피비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았을까요? 독자들은 그런 의문을 계속 끌어안은 채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를 숨죽여 따라가게 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과 같은 상상을 할 때가 있나요? 그게 사실이라면?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별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요. 믿음의 상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아직도 그 사실을 정확히 설명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껴요. 이런 종류의 슬픔에는 진정한 치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글을 쓰며 받아들이게 되었죠. 물론 슬픔은 사랑 이면에 있는 감정이기도 하잖아요. 수많은 신앙인이 믿고 있지만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여지는 남겨두고 있죠. 스스로를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신의 존재 유무를 판단할 수 없다고 보는 철학적 관점)로 표현하고 싶어요.

<인센디어리스>는 이제까지 7개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으로 <뉴욕 타임스> 선정 ‘주목받는 작가 4인’에 꼽히기도 했죠. 최근 리사 랜돌프 각본, 코고나다 연출을 통해 드라마 시리즈로도 재탄생한다는 기분 좋은 소식도 들려왔어요. 이야기가 영상화되는 일의 즐거움은 무엇인가요? 기대하는 것이 있나요?

한국인 캐릭터를 한국인 배우들이 연기한다는 점이 가장 기대됩니다. <인센디어리스>의 각색이 시작되기 전 제가 제작진에게 거의 유일하게 강조한 점이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는 아시아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데 극도로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아시아인 주인공을 백인 배우가 연기하게 된 사실 때문에 여러 아시아계 작가 친구들은 아주 곤혹스러워했죠. 제작사 필름네이션과 리사 랜돌프가 제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해주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애플TV+ 시리즈 <파친코>를 연출한 존경하는 감독 코고나다의 합류도 정말 기대돼요.

2018년 미국에서 출간된 <인센디어리스>는 올 초 한국에서 정식 출간되었으며 현재까지 7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소설을 쓰는 데 그토록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언어와 표현에 대한 집착 때문이에요. 단어와 음절, 구두점, 운율 등 표현 하나하나에 고집스럽게 몰두하거든요.”

수많은 한국계 작가들이 매력적인 디아스포라 문학을 꾸준히 선보이는 것에서 연대 의식을 느끼기도 하나요?

알렉산더 지, 이창래, 마리 명옥 리, 이민진, 수잔 최… 이제까지 흥미롭게 읽은 책을 집필한 한국계 미국인 작가를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그들이 미국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한 사실이 제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었는지도 잊지 않고 있죠. 이들의 활약은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로 살아가고픈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습니다. 미국 출판계가 한인 작가의 이야기를 더 많이 조명해 이런 좋은 흐름이 앞으로도 계속되길 바랍니다.

예일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브루클린 칼리지에서 예술학을 공부했어요.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시점은 언제인가요? 기폭제가 된 순간이 있나요?

늘 독서를 격렬하게 사랑했어요. 그러면서 언어가 지닌 힘을 믿게 됐죠. 부모님은 항상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을 지지해주셨어요. 대학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인생은 한 번뿐이야”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몰라요. 행복을 느끼는 일에 시간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하지만 이민자 출신으로서 가족을 돌보고 싶었던 마음도 컸기 때문에 한동안은 현실적인 커리어에 매달렸어요. 골드만삭스에서 인턴십도 경험했고, 졸업 후에는 맥킨지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7개월 만에 다시 글쓰기로 돌아갔어요. ‘이건 원하는 삶이 아니다’라는 판단으로 대학원에 진학했죠. 글쓰기가 힘들게 느껴질 때마다 꿈을 단념한 채 지낸 7개월의 시간을 상기하는 것이 도움이 많이 돼요. 단어 하나 쓰기가 괴로운 날조차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쓸 수 없었던 그때에 비하면 훨씬 행복하니까요.

<뉴욕 타임스> <뉴요커> <가디언> <베니티 페어> 등에 인종과 계급, 정치와 사회, 문화에 대한 칼럼을 꾸준히 기고하며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인센디어리스> 역시 사회에 대한 날 선 비판 의식을 담고 있죠. 최근 관심을 갖게 된 사회적 이슈도 있나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파시즘이 극심해지고 있어요. 인종차별, 여성 혐오, 소수자에 대한 폭력, 임신중절에 대해 칼럼을 쓰거나 SNS에 포스팅하는 등 정치적 활동을 할 때 인간의 권리와 불평등에 초점을 맞춰 목소리를 높이곤 해요. 앞으로도 계속 사회의 불의에 대해 이야기할 겁니다.

얼마 전, 애틀랜타에서 사이비 종교 단체에 의해 한인 여성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었습니다. 소설은 현실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지만, 사회악은 여전히 만연한 것처럼 보여요. 당신이 믿는 이야기의 힘은 무엇인가요? 순전한 창작의 즐거움 외에 작가로서 기대하는 소설의 역할은?

이야기는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걸 직접 경험했습니다. 배교(개인 혹은 집단이 복음을 저버리고 신앙으로부터 돌아서는 일)를 결심한 후 말이나 단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을 때 독서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었어요. 소설가 제임스 볼드윈이 한 말 중에 특히 와닿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겪는 고통이 전례 없는 일이라고 믿으며 눈과 귀를 닫기 전에 책을 펴라. 도스토옙스키와 디킨스의 소설은 나를 괴롭히는 사건과 감정이야말로 이 세상을 살았거나 살아가는 모든 이와 나를 연결시켜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내일을 살아갈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고 나면, 희망을 갖게 되죠. 적당한 모임이나 커뮤니티를 찾게 되고,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싸우는 데서 다시금 삶의 기쁨과 의미를 찾게 되는 것처럼요. 그런 것이 우리의 생명을 연장해주죠.

소설을 쓰지 않을 땐 어떤 식으로 영감을 채우나요? 미국 잡지 <Travel + Leisure>를 통해 애정하는 서울의 레스토랑, 카페, 위스키 바, 갤러리 등을 소개한 당신의 ‘서울 가이드’를 즐겁게 읽었습니다. 고깃집 ‘몽탄’과 위스키 바 ‘제스트’, 아트선재센터 등 근사한 공간을 쏙쏙 골라 소개했더군요. 서울은 주기적으로 드나드나요?

올봄에 서울을 방문하기 전까지 팬데믹 때문에 꽤 오랫동안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어요. 앞으로는 더 자주 한국에 드나들고 싶어요. 서울은 편안함을 느끼는 몇 안 되는 장소거든요.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 제 몸이 태어난 곳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느낌도 들어요. 반면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낼 땐 하루하루 꽤 엄격하게 시간을 관리하며 생활하는 편입니다. 글 쓰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죠. 긴장을 풀기 위해 독서를 할 때도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쓰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생각을 해요. 아! 한국 영화와 드라마도 즐겨 봐요. 팬데믹이 시작되기 전에는 한 번에 많은 무게를 드는 운동인 파워리프팅에 몰두했죠. 몸을 쓰는 게 기분 전환에 꽤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다시 조금씩 시도해보려고 해요.

새 소설 <Exhibit>가 내년 5월 미국에서 출간됩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했나요? 두 예술가의 욕망을 파고든 이번 소설은 지난 작품과 어떤 점에서 한결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Exhibit>는 뛰어난 사진가 진 한이 매력적인 발레리나 리디아에게 강렬한 예술가적 충동을 느끼며 시작되는 이야기예요. 두 인물이 나중에는 육체적 욕망까지 공유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죽음과 파멸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저주’와 씨름하는 과정을 담고 있죠. 진은 처음에는 직업적으로, 이후에는 점점 인간적으로 리디아에게 집착하게 돼요. <인센디어리스>와는 확연히 달라요. 훨씬 적나라한 퀴어 소설이고, 언어적으로도 많은 것을 실험했습니다. 더 정교한 문체와 풍부한 여운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신앙의 상실을 포함해 데뷔작이 담고 있던 몇 가지 키워드는 그대로 안고 가기도 해요.

소설과 상관없는 이야기긴 합니다만 언제나 짙은 눈 화장을 고집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SNS에서 공개된 일상 모습을 보면 패션에도 흥미가 있는 것 같더군요. 외양에도 신경을 쓰는 편인가요?

스모키 메이크업을 하고 힘 있는 의상을 입으면 스스로 강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게 좋고, 그런 인상이 진짜 제 모습과 가깝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K-컬처의 인기와는 별개로 미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아시아 여성에 대한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이 만연해요. 아시아 여성은 가냘프고, 순종적이고,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다고 여기죠. 그런 근거 없는 고정관념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모든 것의 결과가 매력적으로 보인다면 나쁠 것은 없겠죠. (VK)

#언어로 찾은 나라

포토그래퍼
이현우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