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코트의 상관관계, 건축무한육면코트
땅과 사람을 잇는 건축, 그리고 우리 여자들의 ‘건축무한육면코트’.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선 내외부 공간이, 건축과 도시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보그>는 이곳에 패션을 더했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 연구사 정다영이 서울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펼쳐지는 융해의 현장을 전한다.
세계적인 건축 사무소 사나(SANAA)의 니시자와 류에(Ryue Nishizawa)가 출연한 다큐멘터리 영화 <도쿄 라이드>의 주인공은 ‘줄리아’라는 이름의 그의 애마 알파 로메오 1750 GT다. 영화감독 베카 & 르무안(Bêka & Lemoine)은 종일 폭우가 쏟아지는 궂은 날 그와 함께 줄리아를 타고 도쿄 곳곳을 누비는 여정을 담았다. 차 밖보다 차 안에서 나누는 그들의 대화가 러닝타임의 절반 이상이다. 영화에서 줄리아는 꽤 많은 돌봄이 필요한 존재였다. 폭우에 취약한 줄리아의 내부는 금방 김이 서렸다. 니시자와 류에는 차창을 열어둔 채 운전대를 잡고 연신 손수건으로 유리창을 닦아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외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줄리아를 건축 공간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최신식 차량이 외부 환경과 차 내부를 완벽하게 밀폐하고 운전자를 보호하는 것에만 치중한다면, 줄리아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도시 풍경과 기후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에게 줄리아를 돌보는 수고는 이를 위해 감수할 수 있는 신체 활동이다. 줄리아를 타고 느끼는 감각처럼 실내 공간과 바깥 도시는 완벽하게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는 오늘날 현대 건축이 이런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니시자와 류에가 말한 것처럼, 도시와 건축 내부는 복잡한 공생 관계를 맺고 있다. 건축물이 내부 공간의 집합체라면, 도시는 건축의 외부다. 건축의 기원은 외부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셸터를 짓는 것에서 왔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치게 내외부를 분리한 나머지 자연과 접속하는 방식을 잊게 됐다. 내외부 경계를 설정하는 방식에 따라 공간 경험의 질은 꽤 많이 달라진다. 많은 건축가들이 도시와 건축 혹은 내외부 경계 공간의 연결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이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그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자본이 필요하다. 좋은 재료, 뛰어난 디자인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올해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서 내외부 공간이, 건축과 도시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경험을 했다. 심지어 무료로 말이다. 서울 곳곳이 프리즈 아트 페어와 미술 주간 행사 때문에 예술적 정취로 한껏 들뜨던 날이었다. 2017년에 시작되어 4회를 맞은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9. 1~10. 29)는 올해 특별히 도심 한가운데 있는 열린송현녹지광장을 주 무대로 삼았다. 세계 각지에서 온 아티스트, 큐레이터를 비롯한 문화 예술인들과 시민들이 자연히 삼청동과 안국동 일대를 지나며 비엔날레를 접했다.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는 건축과 도시를 매개로 세계 도시의 현안과 미래상에 적극 연계하고 참여하는 국제 행사다. 건축과 도시 분야뿐 아니라 미술, 디자인, 영화, 공연 등 다양한 예술 분야와 협업한다. 서울을 포함한 현대 도시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전시 형식으로 풀고 있다.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일반적인 비엔날레와 달리 건축가의 아이디어나 계획가의 정책적 대안이 다양한 시각물과 참여 프로그램으로 번안되어 소개된다.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는 크게 총감독이 선정한 주제에 기반한 ‘주제전’, 여러 세계 도시의 선도적인 공공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도시전’, 전시장이 아니라 실제 도시 현장에 개입하는 ‘현장 프로젝트’로 구성된다. 이번에는 그간 주 전시장으로 사용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아닌 열린송현녹지광장에서 주제전과 현장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서울시청 맞은편의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는 주제전 일부와 이와 연관된 ‘서울 100년 마스터플랜’전 및 도시전에 해당하는 ‘게스트시티’전이 열렸다. BCHO 파트너스 대표 건축가 조병수가 이번 비엔날레의 총감독으로 활약했다. 그와 함께 천의영 경기대 교수, 임진영 오픈하우스서울 대표, 염상훈 연세대 교수, 김사라 다이아거날 써츠 대표가 큐레이터로 개별 전시를 맡았다.
조병수는 올해 비엔날레 주제로 ‘땅의 도시 땅의 건축’을 내세웠다. 그는 기후 위기를 비롯한 여러 상황이 도시 환경을 위협하는 가운데 서울의 자연 지형과 생태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려 했다. 이를 위해 학술적·전문적 행사였던 비엔날레를 관객이 감각적으로 경험하며 즐길 수 있게 노력했다. 그는 주제 의식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구조물을 열린송현녹지광장에 설치했다. 지난해까지 폐쇄되어 있던 이곳은 한국의 굴곡진 근현대사가 담긴 곳이다. 조선 시대 왕족과 명문 세도가들이 살았고, 구한말에는 친일파가 이곳을 점거했다. 해방 후에는 미국에 양도돼 미 대사관 직원 숙소가 들어섰다. 미국이 부지를 반환한 뒤에는 삼성과 대한항공에 넘어갔다. 대한항공의 호텔 건립 계획이 실패하고, 서울시가 소유주가 되면서 110년 만에 이 땅을 시민에게 돌려주기로 선언했다. 그 결과가 지난해 가을에 개방된 열린송현녹지광장이다. 2028년 개관을 목표로 추진 중인 이건희 기증관(가칭)이 들어서기까지 이곳은 한동안 목적 없는 열린 장소가 될 것이다.
이곳에 조병수가 설계한 두 상징물은 가장 근원적인 외부 공간이라 할 수 있는 하늘·땅과 관계 맺는 건축물로 기획됐다. 전망대 역할을 하는 ‘하늘소(所)’와 땅의 촉감을 느끼는 ‘땅소(所)’는 개념적으로 대칭을 이룬다. 하늘소(所)의 계단을 올라가면 경복궁 일대를 아늑하게 감싼 북악산을 비롯한 서울의 자연환경과 광화문과 종로의 인공적인 건축 풍경을 모두 볼 수 있다. 반면 땅소(所)에서 관객은 땅 아래로 아늑하게 내려앉은 지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여기에는 그 밖에도 현장 프로젝트 일환으로 설치된 파빌리온 6개가 있다. 이 작업은 공원 주변의 여러 문화 시설을 연결하는 동선을 만들고, 외부 풍경을 다채롭게 바라보고 경험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김치앤칩스, 리카르도 블루머(Riccardo Blumer), 플라스티크 판타스티크(Plastique Fantastique), 프란시스코 레이바(Francisco Leiva), 프랭크 바코+살라자르 세케로 메디나(Frank Barkow+SalazarSequeroMedina), 페소 본 에릭사우센(Pezo Von Ellrichshausen)이 설치한 임시 건축물은 외부를 단절하지 않고 건축의 창처럼 열려 있다.
닫힌 도시가 일시적인 전시 무대로 바뀌면서 사람들은 그간 쉽게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공간 경험을 하게 됐다. 실내가 아니라 외부 공간에서 전시를 하는 건 설치와 운영 관리가 쉽지 않다. 하지만 줄리아를 타면서 수고로움을 감행한 니시자와 류에처럼 비엔날레 팀은 관객의 경험을 위해 여러 어려움을 감수했다. 한시적으로 도시를 점유하는 일에는 많은 노동력과 치밀한 계획이 요구된다. 그 결과로 이뤄진 경험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제 서울도 그렇게 도시 일부를 시민에게 내줄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 경험치도 많이 쌓았다.
최근 패션 분야는 도시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조금씩 무너뜨리며 새로운 참여를 촉발하는 계기를 선도하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가 일반적인 쇼장이 아니라 서울의 여러 외부 공간에서 패션쇼를 여는 모습이 이를 잘 보여준다. 올해만 해도 잠수교에서 열린 루이 비통 2023 프리폴 패션쇼, 경복궁 야외 마당에서 진행된 구찌 2024 크루즈 컬렉션 패션쇼가 있었다. 지난해에는 제3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총감독이었던 도미니크 페로 (Dominique Perrault)가 설계한 이화여대 지하 캠퍼스 ECC 외부 공간에서 디올 2022 F/W 여성 패션쇼가 열리기도 했다. 국내 사례는 아니지만, 지난 5월 프라다 모드 도쿄의 일환으로 사나의 세지마 가즈요(Kazuyo Sejima)가 디렉터로 참여하고 니시자와 류에가 설계한 도쿄 정원 미술관 파빌리온에서 문화 행사가 열렸다. 이미 10년이 훨씬 넘은 일이지만 경희궁 앞뜰에서 OMA와 렘 콜하스가 설계한 프라다 트랜스포머도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물론 패션 행사는 초대받은 이들만 누릴 수 있지만, 이런 경험이 조금씩 공공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서울은 내외부 경계를 흐리는 건축적 장치를 선보이는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아이와 함께 서늘한 바람이 부는 9월 밤 열린송현녹지광장을 몇 번이나 찾았다. 하늘소(所)의 최상층부 전망대 위에 누워 바람에 흩날리는 천의 궤적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치맛자락처럼 펄럭거리는 천 사이로 검푸른 하늘이 비쳤다. 바닥에 봉분처럼 쌓아둔 흙을 아이는 모래놀이 하듯 맨발로 밟으며 즐거워했다. 옆에서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른 아이가 놀이에 동참한다. 플라스티크 판타스티크가 설계한 ‘나무와 흔적들: 보이(지 않)는 파빌리온(Trees & Traces: An (In)Visible Pavilion)’의 풍선처럼 부푼 공기 건축 안에서는 동굴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밖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지만 내부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바깥 풍경은 왠지 같은 장소를 달리 보게 했다. 페소 본 에릭사우센이 설계한 ‘페어 파빌리온(Pair Pavilion: A Double Portrait)’ 안에서 고개를 힘껏 들어 두꺼운 철제 격자 너머로 어두운 하늘 위에 빛나는 별을 헤아리기도 했다. 도시를 관념적으로 이해하기보다 내 몸에 섬세하게 각인되는 경험이었다. 땅과 하늘을 비롯해 자연과 공명하고 바람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에서 건축의 역할을 상상했다. 자세한 설명을 읽지 않아도 걷고 만지고 보는 가운데 전해지는 도시의 분위기를 느껴본다.
그간 도시의 열린 공간에 개입하는 건축적 장치의 힘이 이토록 강력한지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로 이런 경험이 서울시가 만든 한시적인 건축·전시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무엇이 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도시를 계획하는 이들에게 모두를 위한 열린 공간을 더욱 내어달라고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건축 안에서 건축 바깥을 상상하는 경험은 특수한 계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올해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내게 남긴 것이 있다면 도시에 대한 권리를 좀 더 강하게 욕망하게 됐다는 점이다. (VK)
- 패션 에디터
- 김다혜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윤송이
- 모델
- 서성진, 서지현, 아리나, 오송화, 패리스
- 헤어
- 안미연
- 메이크업
- 김부성
- 글
- 정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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