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코페르니의 시대
코페르니라는 이름의 태양, 지금 패션계는 코페르니를 중심으로 돈다.
‘과학기술’이라는 단어 없이 코페르니(Coperni)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브랜드명부터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니까. 코페르니 CEO 아르노 바양(Arnaud Vaillant)과 세바스티앙 메예르(Sébastien Meyer)는 2023 S/S 컬렉션에서 벨라 하디드의 몸에 패브릭을 분사하며 패션사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다. 다섯 마리의 로봇 강아지가 등장한 2023 F/W 컬렉션은 과학기술과 인간, 패션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미래를 그렸다.
코페르니의 특별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다른 패션 브랜드와 달리 고상한 척하지 않는다. 팬데믹이 발발하고, 럭셔리 브랜드가 수십 달러짜리 마스크를 판매할 때 코페르니는 DIY 마스크를 만드는 튜토리얼 영상을 올렸다. 세바스티앙과 아르노가 키스하는 사진을 공식 계정에 업로드하고, 쇼가 끝난 뒤 홍보 대행사 직원들까지 태그해 자축하는 모습에서는 ‘사람 냄새’마저 느껴진다.
모듈러 가구 브랜드 USM과의 협업으로 완성된 팝업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세바스티앙과 아르노의 옷차림은 요란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르노는 마르지엘라의 니트 톱과 뉴발란스를, 세바스티앙은 깔끔한 카키색 봄버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내게 건넨 첫마디는 “부탁 하나만 하죠. <보그> 컬렉션 북에 코페르니의 2023 S/S 쇼 피날레 사진이 실린 걸 봤습니다. 그 책을 꼭 갖고 싶어요”였다. 그 후로도 인터뷰를 빙자한 우리의 수다는 30분 넘게 이어졌다. 중간중간 아이폰의 알람이 울리는 바람에 아르노와 세바스티앙이 ‘스와이프’를 해야 했지만.
한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 첫 방문으로 알고 있는데.
아르노 맞다. 건축물과 사람들 스타일을 보며 매우 놀랐다. 도시 전체가 모던하면서도, 최신 기술이 적절히 융화됐다는 점이 유럽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셀프리지스, 봉마르셰, 분더샵까지, 2023 F/W 컬렉션 팝업 공간 연출을 USM이 담당했다. 완벽하게 어울리는 한 쌍이다.
세바스티앙 예전부터 USM 특유의 차가운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을 좋아했다. 내가 발렌시아가에 있을 때도 사무실 인테리어는 온통 USM이었다. 스스로 패널을 조립하며 다양한 형태로 만들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아르노 리테일 매장 컨셉을 고민하며 많은 건축가를 만났다. 코페르니만의 ‘바이브’를 전달하기에는 USM이 제격이었다.
이번에 선보인 아이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만 꼽는다면.
아르노 로봇과 양이 그려진 레더 재킷. 2023 F/W 컬렉션은 장 드 라 퐁텐의 우화 ‘늑대와 어린 양’에서 영감을 받았다. 라 퐁텐의 우화에서는 늑대가 양을 잡아먹지만, 컬렉션에서는 늑대(로봇)와 양(모델)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 컬렉션을 구상하며, 텍스트를 이미지로 구현하는 인공지능인 달리(DALL·E)에게 어두운 숲속에서 로봇을 만나는 양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수천 개의 결과물 중 마음에 들었던 이미지를 골라 아티스트에게 쇼피스 위에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AI가 생성한 이미지를 아티스트가 손으로 그린다는 발상이 흥미롭지 않나. 분더샵 등에서 판매되는 재킷은 핸드 페인팅이 아니라 디지털 프린팅이다.
세바스티앙은 흥미롭게도 군사학교에 다니다가, 결국 패션 스쿨을 졸업했다. 지금은 최신 과학기술에 푹 빠져 있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다.
세바스티앙 패션과 과학기술의 공통점 때문이다. 디자이너와 과학자 모두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한다.
아르노는 지속 가능성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최신 기술과 지속 가능성은 코페르니를 대표하는 키워드다.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는 없는가?
아르노 둘은 확실히 공존할 수 있다. 2년 전, 사과 폐기물로 만든 스와이프 백을 선보인 것이 좋은 예다. 우리는 재활용 소재를 쓸 때도 늘 최신 기술을 접목할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파리 애플 스토어에서 열린 2020 S/S 컬렉션에 QR 코드가 달린 옷을 출시한 것처럼 말이다.
세바스티앙 QR 코드를 스캔하면 소재를 옷으로 만드는 과정을 전부 확인할 수 있었다.
2023 S/S와 F/W 컬렉션이 말 그대로 ‘바이럴하게’ 퍼졌다. 컬렉션 이후 코페르니에 어떤 변화가 찾아왔나?
아르노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다. 스프레이 드레스 퍼포먼스 전후로!
세바스티앙 모두 코페르니를 알게 됐다는 게 가장 중요한 변화다. 그 전까지는 패션계에서만 이름이 알려져 있었으니까.
아르노 <미키 마우스>라는 어린이 잡지 인터뷰도 기억에 남는다. 코페르니가 과학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설명해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코페르니는 모던하지만, 잘난 체하는 브랜드는 아니다. 패션을 사랑하는 소수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친숙한 브랜드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많은 이들이 코페르니의 ‘스프레이 드레스’ 퍼포먼스를 알렉산더 맥퀸의 1999 S/S 컬렉션 피날레와 비교했다.
세바스티앙 비주얼적으로는 닮은 부분이 있지만, 분명 다르다. 우리는 혁신적인 기술을 선보이기 위해 퍼포먼스라는 수단을 택한 것에 가깝다. 릭 오웬스 정도를 제외하면, 알렉산더 맥퀸 이후로 이런 퍼포먼스를 시도한 브랜드가 있었나? 이런 이유에서도 많은 이들이 맥퀸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르노 우선 맥퀸 같은 천재와 비교된다는 사실 자체가 영광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파리 패션 위크에 새로운 자극을 주기 위해 퍼포먼스를 선택했을 뿐이다. 모든 브랜드가 똑같은 형식의 쇼를 선보이니까. 맥퀸 쇼에서는 로봇이 페인트를 뿌렸지만, 코페르니 쇼에서는 사람이 패브릭을 분사했다는 점에서도 아주 다른 퍼포먼스다.
퍼포먼스의 강렬함이 옷의 아름다움을 무색하게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둘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아르노 그런 의견에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2023 S/S 컬렉션을 코페르니의 ‘베스트’로 꼽고 싶다. 우리 옷을 대량으로 구매한 바이어 역시 여럿 있었고.
세바스티앙 패션쇼의 목적이 옷을 선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오늘 같은 팝업은 물론이고, 광고 캠페인에서도 옷은 보여줄 수 있으니까. 패션쇼란 관객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고, 브랜드를 더욱 널리 알릴 기회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말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화려한 퍼포먼스와 상관없이 옷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2024 S/S 컬렉션의 주제는 ‘사운드’였다.
아르노 쇼가 진행되는 내내, 사운드에 맞춰 벽이 움직였고 재킷에는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삽입했다. 쇼의 테마가 사운드인 만큼 퍼포먼스는 없었다. 옷과 실루엣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앞으로도 변화하는 컬렉션의 테마에 맞게 옷과 퍼포먼스 사이의 균형을 찾아갈 것이다.
쇼를 본 뒤 세바스티앙과 아르노는 어떤 음악을 듣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아르노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듣는다. 올리비아 로드리고를 듣다가도 기분이 내키면 필립 글래스를 듣는다. 아, 블랙핑크도!
코페르니는 어떤 브랜드보다 인스타그램을 영민하게 활용한다. 인스타그램이 소비자와 소통할 최적의 창구이기 때문인가?
세바스티앙 정확하다. 코페르니는 처음부터 인스타그램과 함께였다. 2013년 ‘코페르니 펨므’ 론칭을 인스타그램에서 했다. 인스타그램에 정사각 이미지만 업로드하던 때를 기억하나? 우리는 캠페인 이미지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하나의 이미지를 6등분이나 9등분해서 화면을 가득 채우도록 업로드했다. 모든 패션 브랜드 중 그런 방식을 시도한 건 코페르니가 처음일 거다.
아르노 인스타그램은 정말 많은 것을 바꿨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브랜드도 아무 부담 없이 자기 PR을 하며, 럭셔리 브랜드와 경쟁할 수 있다. 코페르니의 쇼가 바이럴하게 퍼질 수 있었던 것도 인스타그램 덕택이다.
코페르니는 여타 패션 브랜드와 달리 친숙한 느낌을 준다. 좀 더 인간적이고, 접근 가능하다고 할까? 아기들이 등장한 2022 F/W 광고 캠페인이 그랬고, 팬데믹이 한창일 때 진행한 ‘드라이브스루’ 형식의 쇼가 그랬다.
아르노 코페르니만의 비밀을 하나 알려주겠다. 우리는 절대 예상 경로를 따르지 않는다. 모두가 “다음 캠페인에도 유명한 모델이 등장하겠지?”라고 내다볼 때쯤, 아기들을 캠페인에 출연시키는 식이다. 이런 위트가 친숙함으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세바스티앙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 역시 코페르니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팬데믹 때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튜토리얼 영상을 올렸고, 2021 F/W 시즌에는 피지컬 패션쇼에 목마른 사람들을 위해 드라이브스루 쇼를 구상했다.
아르노 세바스티앙이 “사람들이 그리워!”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디지털 쇼를 준비하고 있었다. 단순한 영상이 아니라 인간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에디터와 바이어가 차에서 관람할 수 있는 피지컬 쇼를 준비했다. 기뻐하던 그들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코페르니의 핵심은 과학기술과 혁신이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인간미가 동반되어야만 한다.
코페르니의 나침반은 언제나 미래를 가리킨다. 당신들에게 과거, 현재, 미래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아르노 과거는 곧 역사다. 현재는 지금을 즐기는 것. 미래는 혁신과 동의어다.
세바스티앙 과거는 전통 그리고 사부아페르(Savoir-Faire). 현재란 함께 살아가는 것. 미래는 혁신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하며 세상을 뒤흔들었다. 코페르니는 어떤 방식으로 패션계를 뒤흔들게 될까?
세바스티앙 & 아르노 우리가 세상을 완전히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 코페르니는 과학자와 기술자가 아이디어를 펼쳐 보일 수 있는 하나의 플랫폼이다. 이런 노력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코페르니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지 않을까?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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