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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2023.11.25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지금, 이 글을 쓰는 곳은 11월의 강릉, 이제 막 해가 뜨는 시각. 시를 읽기 좋은 계절, 시를 쓰기 좋은 때, 겨울, 아침, 그 모든 것의 애틋한 초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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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빙자해 일상을 잠시 벗어나거나, 여행을 틈타 일을 하는 나는 때때로 일상의 낯선 순간에, 익숙하지 않은 여행지에서 그곳에만 있는 작은 서점에 들러 시집 한 권을 들고 오곤 한다. 일상과 비일상, 놀이와 노동이 기묘하게 동숙할 때, 시를 읽는 기분이란 그것대로 남다르고 색다르다. 그렇게 지난 시간 내가 만나온 문학동네시인선은 얼마나 됐을까. 이런저런 이유로, 이곳저곳에서, 그때의 기분과 느낌이 이끄는 대로 우연처럼, 기적처럼 만났던 시의 세계. 그 세계 하나하나의 구체적 면면이랄지, 하나의 문장 같은 건 단박에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시라는 세계에 기대 그날의 하루를, 그 시절의 여행을 마쳤다는 것, 시라는 세계에 힘입어 일하고, 먹고, 자고, 걷고, 다시 일하러 나갈 수 있었다는 것만큼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가 곁에서 함께한 나날이었다.

강정, 강지혜, 고선경 저 외 45명,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_문학동네시인선 200 기념 티저 시집'(문학동네, 2023)

2011년에 시작한 문학동네시인선이 어느덧 200번째 시집을 내놓았다. 지난 12년간 199권의 시집을 낸 것이다. 그러니까 백아흔아홉 가지의 세계가, 목소리가, 침묵이, 시간이, 역사가, 공간이, 미지가, 꿈이, 슬픔이, 벅참이, 고독이, 번역이 있었다는 말일 것이다. 200번째 시집에는 ‘기념 티저’라는 말이 덧붙어 있다. 2017년 12월 문학동네시인선 100번째 시집을 기념하며 펴낸 ‘티저 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얼마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는 이름 그대로 일종의 예고편에 해당한다. 앞으로 문학동네시인선으로 신작 시집을 펴낼 50인의 시인이 보내온 미래의 시, 먼저 도착한 안부 인사와 같다. 올해 등단한 시인, 첫 시집 출간을 앞둔 시인, 오랜 시간 시를 써온 시인 등 각기 다른 시의 경험과 시 쓰기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두툼한 시집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이들 50인의 시인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공통 질문에 각자의 입장과 시선으로 정성스러운 답변을 전해왔다. 이를테면 무작위로 뽑아본 아래의 답변들.

‘뭉툭해진 시간의 끝/뾰족하게 깎아내는 것/부스러지지 않도록//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조그만 인중을 만져보는 것/부서지지 않도록//그것을 만든/천사의 무심한 손가락을/그려보는 것.’ – 시란 무엇인가, 시인 강지혜의 답변

‘시란 작아지지 않는 슬픔, 그게 좋아서 첨벙첨벙 덤비는 일.’ – 시란 무엇인가, 시인 박연준의 답변

‘시란 기필코 스쳐 지나가는 시간이다.’ – 시란 무엇인가, 시인 박철의 답변

‘오고 있다고 믿는 것.’ – 시란 무엇인가, 시인 손미의 답변

‘시는 신발,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데려가는/시는 탐색견의 코, 한 사람의 실종을 집요하고 용맹하게 추적하는.’ – 시란 무엇인가, 시인 안희연의 답변

‘내년 겨울 내가 주머니에 넣어둔 것.’ – 시란 무엇인가, 시인 임솔아의 답변

‘시란 세상을 아주 느리게 다시 쓰는 것.’ – 시란 무엇인가, 시인 정다연의 답변

문학동네시인선의 기획위원이자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펴내는 말에 시인을 향한 부당한 동경과 냉소의 압력을 느끼는 시인의 고충과 시가 지독히 어려운 독자의 고충을 함께 전해온다. 이 두 고충은 상호 적대적인 게 아니며 동시에 해결할 수만 있다면 그게 좋겠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시인선’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시인과 독자 모두를 편들기’ 위해서라도, ‘읽히는 시, 그러나 혹은 그래서, 시인과 독자 모두 스스로 당당해지는 시’의 판을 벌이는 것이 시인선의 일이기에. 지난 12년의 세월 동안 199권의 시집이 그 애씀의 흔적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가슴을 후벼파는 뼈아픈 말은 그다음에 정확하게 도착해 있다. ‘시인선의 고충? 그런 건 없다. 시인도 독자도 더는 고충을 견디려 하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에 대한 염려만이 유일한 고충이다.’(5쪽) 시가, 시인이, 독자가, 책이 마주한 세상을 향한 이 말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럴 때면 시를 읽는다. 세상의 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시, 그 시가 우리를 데려갈 곳, 그곳이 비록 미지의 끄트머리일지라도 기꺼이 가보는 것. 그것이 시정(詩情)이고 시의 강건함일 것임을 믿고 싶고 믿게 하는 것. 시란 그런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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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xels, Courtesy of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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