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인간이라는 희귀한 존재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의 독서법.
한 해 동안 몇몇 독서 모임에 참여했다. 책은 읽어도 모임에는 좀처럼 나서지 않는 나로서는 신기한 경험이었는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잔존한다는 사실, 그리고 책을 매개로 이토록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지금 시대의 책은 셀프 브랜딩을 위한 ‘명함’ 같은 역할을 할 뿐이라거나(실제로 이제 주위 사람 중 상당수가 저서를 가지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책 표지 사진만 올리고 끝나는 것 또한 새로운 독서법일 수 있다(책을 구입해 사진을 찍어 올릴 의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독서가다)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이런 종류의 이야기 역시 책 모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어찌 됐든 ‘책을 읽으면 골치가 아픈’ 사람들이 주류인 세상에서 ‘골치 아플 때는 책이나 읽는’ 소수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공간 자체가 신선하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웹툰으로 연재되다 두 권의 만화책으로 묶여 나온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우리끼리만 재밌는 독서 모임에서의 수다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다른 건 몰라도 ‘책에는 진심’인 독서 클럽 멤버들이 읽었던, 읽고 있는, 읽게 될 책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책의 내용이나 저자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표지나 목차, 저자 소개면 등 책의 구성 요소까지 깨알같이 다룬다. 인간뿐 아니라 미확인 동물까지 포함된 독서 클럽 구성원의 섬세하고 고집스러운 독서관과 지적인 농담에 키득대다 보면 금세 끝까지 읽어버리게 된다. 이 책은 독서가뿐 아니라 비독서가에게도 유효할 것이라고 확신하는데, 그 이유는 일단 이불 밑에서 귤 까 먹으면서 만화책을 보고 싶어지는 계절이 왔기 때문이고, 책에 관심 없는 사람도 끌어들일 만한 서사와 개그 요소가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작품을 계기로 ‘나도 책이나 읽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보면서 읽고 싶은 책을 여러 권 메모했고(맨 끝에 아예 ‘독서 중독자들의 독서 리스트’가 따로 정리되어 있다), 책을 고르거나 읽는 과정에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팁도 얻었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이 사뭇 진지한 어조로 전하는 독서 팁을 공유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책을 고르는 감각이 무뎌졌다 해도 책을 선택할 때는 ‘나 자신’을 중심에 두자. 독서 중독자들은 베스트셀러에 냉담하다. 어쩌다 읽은 책이 훗날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조차 불명예로 여길 정도다. 지적 배경이나 취향이 다른 다수의 사람이 동시에 즐기고 공감한 책에 담긴 내용에 대한 의구심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기준으로 책을 골라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나는 누구인가’ 따위의 질문을 곱씹는 것은 독서와 더욱 멀어지는 길일 뿐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평소 가지고 있던 관심사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책이면 충분하다.
두 번째, 책의 첫인상을 살피자. 한 ‘익명의 독서 중독자’는 책을 고를 때는 책날개만 펴봐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홍은동 연구실에서 이런저런 일을 꾸미며 많은 이에게 지리학의 재미를 오롯이 안겨주고자 동분서주하는 중이다. 밀크티를 좋아하지만 아침에는 커피를 마시고 딸기빙수, 흑백사진 등을 좋아한다. (중략) 지은 책으로는 <지린다, 세계 지리>가 있다”처럼 ‘좋아한다’가 나열된 신변잡기적 저자 소개 글만으로도 읽고 싶지 않은 책을 판별할 수 있다는 거다(일부 동의한다). 또 저자 소개보다 역자 소개를 비중 있게 소개하는 책, 저자명보다 출판사명이 크게 인쇄된 책은 걸러도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은 선택에도 해당 작품을 대하는 출판사의 태도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목차나 서문을 읽고도 무슨 내용인지 짐작이 되지 않는 책은 위험하며, 특히 서문에 장별로 어떤 내용을 다뤘는지 압축적으로 제시한 책은 그만큼 구조를 잘 갖춘 책일 테니 실패할 확률이 적다는 것도 매우 유용한 팁이다.
세 번째, 완독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을 것.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못한 이는 책 읽을 자격도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넷플릭스나 유튜브로 경로 이탈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나만 해도 재미없는 영화나 드라마는 쉽게 중도 하차하면서, 책은 끝까지 읽어야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 끝까지 읽게 되는 책은 80%도 되지 않는다는 독서 중독자들의 고백은 1장만 읽고 방치해둔 무수한 책에 대한 무거운 마음을 덜어준다. 이들이 권하는 심화 편으로는 ‘주석 무시하기’가 있다. 본문과 주석을 오가는 독서는 생각보다 까다로우며, 사실 주석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엄청난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네 번째, 책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도 내려놓아라. 이 단계까지 왔다면 ‘읽고 싶은 부분부터 읽기’도 금방이다. ‘잘 알아서 끌리는 주제’나 ‘잘 몰라서 끌리는 주제’ 등 필요나 욕구에 따라 자유롭게 골라 읽어도 된다는 마음가짐은 독서 경험을 훨씬 편안하고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독서 클럽의 한 신입 회원은 “그렇게 중간부터 읽으면 앞 내용을 모르지 않냐”고 묻기도 하는데, 나로서는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명료한 답이 등장한다. “어차피 우리 나이쯤 되면, 처음부터 읽어도 앞 내용 따위는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는 책을 남용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팁이 있다. 독서가는 책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려는 타입과 책을 남용하는 타입, 두 부류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 책을 쫙 펴서 책등에 흔적을 남기는 일조차 주저하는데, 나 역시 오랫동안 전자로 살아왔다. 책을 살 때마다 면지에 책을 산 날짜를 기록하는 나의 엄마는 후자였는데, 엄마는 책에 날짜와 함께 자신의 서명을 남기는 것만으로 ‘내 책’이 되었다는 만족감이 생긴다고 말했다. ‘책의 여백은 메모를 위한 것이다’라고 믿는 독서 클럽 회원들은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단상을 끄적이거나 가지고 싶은 문장에 밑줄을 긋는 등의 행위로 책이라는 물성을 마음껏 즐긴다. 단, 자신이 정한 필기구만으로(한 회원은 ‘로열 블루’ 컬러만 사용한다).
개인적으로 깊이 공감했던 부분은 독서 클럽 회원들이 ‘책 선물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독서 중독자들의 책 취향은 복잡하고 확고하고 제각각이기 때문에”, 책을 선물하거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금방이라도 멸종할 것 같던 독서가들이 사라지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이유도 이 책에 담겨 있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신입 회원이 들어올 때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에서 인용한 구절을 낭독하며 환영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책은 인간과는 달리, 마음을 짓누르거나 수다를 떨거나 떼어버리기 어렵지 않다. 책은 불러내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는다. 마음 내키는 대로 이 책이나 저 책을 집어 들 수 있다. 책들이 자기들의 의견을 말하면 그도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그들은 나름의 생각을 발언하고 그에게 생각하도록 자극한다. 그가 침묵하면 전혀 그를 방해하지 않고 오직 그가 물어볼 때만 말을 한다. 책과 그의 관계는 다른 모든 일과의 관계가 그렇듯이 자유의 관계였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 같다.
- 사진
- 사계절 제공,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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