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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디깅’할 것인가? 아니, 꼭 ‘디깅’해야만 하나?

2023.12.03

무엇을 ‘디깅’할 것인가? 아니, 꼭 ‘디깅’해야만 하나?

전시를 보려고 2시간째 줄 서다 뭔가 놓칠까 봐 불안했다. 진심으로 빠진 적은 있었나 자문했다.

관객 사이로 보이는 론 뮤익(Ron Mueck)의 작품 ‘In Bed’(2005).

파리에서 열리는 아트 페어를 취재하러 프랑스에 입국한 첫날. 언제나 그렇듯 아트 페어는 흰색의 거대한 홀에 수백 점의 작품이 전시됐다. A 구역부터 주요 갤러리만 볼 거라 결심해도,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붐비는 사람에, 쏟아지는 정보에 현기증이 났다. D 구역은 내일을 기약하며 밖으로 나왔다. 근처 브라스리에서 와인을 한잔 마시며 저녁 약속 시간을 기다렸다. 이날 멤버는 갤러리스트 A, 아트 부록을 만들러 온 기자 B, 브랜드 홍보 담당인 예술 애호가 C였다. 특히 C는 전시장 갈 때마다 마주치는 바람에 알게 됐다. ‘야’ ‘너’ 할 수 없는 사이지만 그래도 아트 바젤을 보러 온 기념으로 모이기로 했다. 사실 셋이 만나는 자리에 내가 꼈다고 해도 무방하다. 모두 예술에 ‘디깅(Digging)’한 사람들이었다.

정작 장어덮밥을 안주 삼아 와인으로 ‘짠’ 했을 때 우리가 외친 구호는 “노 모어 아트”였다. 예술을 일로 다뤄야 하는 직업의 지난함도 있지만, 지난 9월 열린 프리즈 서울을 치르느라 시달린 탓도 컸다. 갤러리스트 A는 프리즈 런던에 이어 파리 아트 페어까지 참가하느라 열흘째 바깥 생활 중이었다. 누군가는 부러워할 아트 노마드지만 그녀는 없던 두드러기가 생겼다며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술에 ‘디깅(Digging)’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장어덮밥을 비울수록 이들의 대화는 파리에서 본 전시와 페어 출품작으로 이어졌다. “이 전시 봤어요?” “이 작가는 어때요?” 등의 대화 속에 모르는 이름과 미술 사조가 쏟아졌다. 난 적당히 웃으면서 휴대폰 메모장에 대화 중 튀어나온 이름과 전시장을 적었다. 이따 숙소에서 구글링해볼 참이었다. 그것도 한두 개지, 급기야 나는 “그래서 꼭 봐야 하는 전시는 뭘까요?”라고 패를 보였다. 예술 애호가 C는 “저도 잘은 모르지만”이라는 배려의 말을 건넨 뒤 구글 지도에 표시해주었다. 와인 한 병이 비워질 때쯤, 이들은 한밤까지 열리는 전시를 보기 위해 일어섰다. 여기서 마무리할 줄 알았던 나도 급히 가방을 메고 합류했다. “근데 아까까지 힘들어 죽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피곤해요, 그만 퇴근하고 싶어요”라던 노 모어 아트족은 밤 9시 팔레 드 도쿄로 향하는우버를 잡았다. 디제이 파티도 연다니 시원하게 맥주 한잔하며 마무리하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손에 맥주가 들렸을 때, 이들은 “그래서 작품은 어디 있지?”라며 팔레 드 도쿄의 지하부터 2층까지 오르내렸다. 릴리 레이노 드와(Lili Reynaud-dewar)라는 여성 작가의 전시였는데, 어둡고 붉은 조명 아래 침대를 여럿 설치했다. 거기 누워 설치 작품이 되고 싶을 만큼 피곤했으나 처음 들어본 이 작가의 이력을 읽기 위해 브로슈어를 집었다. 관람이란 숙제를 끝내고 이제 맥주를 제대로 마셔볼까 싶던 차에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조식을 먹으면서 어제 대화에서 나온 전시를 체크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습득한 경험을 내가 안 할 수 없다. 혹시 이거 열등감? 포모(FOMO)라고 해두자. 포모는 ‘Fear Of Missing Out’의 준말로 내가 뭔가 놓쳤다는 두려움, 가치 있는 경험을 다른 사람이 하고 있을 거란 불안감을 일컫는다. 원래 ‘매진 임박’ ‘한정 수량’일 때 느껴지는 소비자 심리를 말하는 마케팅 용어였으나 요즘은 현대인의 증후군 중 하나로 통용된다. 작가 패트릭 맥기니스(Patrick McGinnis)가 금요일 밤을 놓치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하룻밤 일곱 군데씩 파티장을 다니다가 ‘포모’라는 단어를 팟캐스트에 쓰면서 유명해졌다.

나도 남들이 다 봤다는 전시를 놓치기 싫었다. 첫 전시는 어제 모임에서 ‘정신착란’에 비유한 작가의 것이었다. 요란한 음악 소리와 흔들리는 비디오 영상에서 나는 그들의 말에 뒤늦게 동조했다. 나도 봤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카페로 나와 작가를 검색했다. 유년 시절로의 회귀에 집착하며 평생 외로워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작가를 소개한 짧은 글만으로도 부끄러워졌다. 어떻게 우린 그를 ‘정신 사납다’는 한마디로 폄하할수 있었을까. 나의 고질적인 습관이다. 이 직업을 가지면서 더욱 남의 창작물을 비평하고, 문제는 폄하하기 일쑤였다. 현대미술 전시를 보고 온 날, 친구들과 소주 뚜껑을 엮으면서 “이것도 천장에 매달면 작품이야”라며 낄낄댔다. “이 작가는 본인은 알고 만드는 거야?” “미술은 결국 누가 더 잘 ‘썰’을 푸느냐의 게임이야” 등의 막말도 했다. 한 사람의 지난한 고통이 만들어낸 작품을 한마디로 끝내버리며, 그것이 나의 권리인 양, 그러면 내 수준이 올라가는 것처럼 굴었다.

우린 누군가의 창작물을 아주 쉽게 비평한다. 사형선고를 내려버린다. 나도 책을 냈을때 온라인 서점에 달린 한 줄 비평을 차마 못 읽었다. 너무 쓰려서. 모두가 비평가, 전문가인 시대, 그리고 내 취향만으로 상대의 노력과 시간을 한 줄로 요약하는 사회. 물론 창작물에 나만의 평가는 충분히 가치 있다. 하지만 진정 그것을 깊이 파고든 후에 결론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그 분야를 디깅한 후에야 평가에 정당성이 더 부여되는 것 아닐까. 또한 잘 알수록 함부로 평가 내리기 어려워질 것 같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전시를 2시간째 기다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계 어딘가에선 늘 고흐의 전시가 열린다지만, 이것은 고흐가 죽기 마지막 두 달 동안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그린 70여 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라 온 파리 시민이 다 나온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이들은 화창한 가을 하늘을 뒤로한 채 줄을 서는가. 들어서니 한 남자가 인파 속에 낚시 의자를 펴고 고흐의 그림을 습작한다.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존중해 붐비는 중에도 주변 공간을 마련해준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열린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전시도 마찬가지로 긴 대기 줄을 견뎌야 했다. 1999년 파리시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후 처음 열리는 회고전에 115점의 작품이 걸렸다. 어떤 이는 붉은 추상화를 앞에서 울고 있었다. “작품을 보고 우는 사람이 많다”는 설명 글이 있을 만했다. 나는 진정 무엇에 디깅해본 적 있는가. 내가 후져보일까 봐, 뒤처질까 봐가 아니라 진정으로 디깅해본 것 말이다.

디깅의 시대라 한다. 예전엔 오타쿠라고 부르며 폄하 뉘앙스를 담거나, 마니아 혹은 컬렉터 정도로 표현되던 것이 이제는 분야는 더 좁게, 깊이는 더 깊게 빠지는 것을 추구하며 이를 ‘디깅’이라 부른다. 요즘엔 내가 좋아하는 것이 곧 나다. 이런 내 취향을 더 파고들고 전문적으로 다듬어가는 디깅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해나간다. 그럴수록 저 사람은 정체성 혹은 개성이 확실한 사람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고 보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분야는 크게 상관없다. 결벽증이 있는 한 연예인은 청소용품 디깅으로 유튜브를 시작해 대박이 났다.

혹자는 디깅을 자신의 스펙처럼 굴기도 한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참석한 리빙 잡지 출신 기자는 패션 기자 앞에서 의기양양했다. 패션 컬렉션을 다닐 때는 움츠러들었는데 ‘여기는 내 구역’이라는 듯이 일일이 가르치려 들었다. 이를 본 패션 기자는 “열등감이야”라며 빈정댔다. 디깅은 아름답다. 언제나 그렇듯 남에게 내보이려는 자랑질의 일환이 아닐 때 말이다.

나는 무엇을 디깅할 것인가. 솔직히 나도 마크 로스코의 회화를 보고 울었는데 그것이 예술 디깅까지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아직 나의 디깅을 찾진 못했지만, 이것은 분명하다. 남의 디깅을, 디깅의 결과물을 함부로 평가절하하지 말 것. 귀국 비행기에서 비평이란 이름 아래 자행된 ‘쿨병’을 버리기로 했다. 옆 좌석에선 파리 전시 티켓으로 ‘다꾸’ 중이었다. 기내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다. (VK)

    사진
    GettyImage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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