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슈프림을 만든 남자, 안젤로 바케와의 대화
2010년대 패션계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하위문화에 불과하던 스트리트 웨어가 주류 문화로 급부상한 것이다. 각각 베트멍과 오프화이트라는 스트리트 브랜드를 이끌던 뎀나와 버질 아블로의 럭셔리 하우스 진출은 ‘스트리트 패션의 하이패션화’가 이뤄졌음을 공식화하는 사건이었다. 스트리트 웨어가 점점 몸집을 불려가는 가운데, 묵묵히 신의 대들보 역할을 하던 인물이 있다. 2006년부터 2016년까지 슈프림을 이끈 안젤로 바케(Angelo Baque)다.
바케의 지휘 아래 슈프림은 가장 컬트적인 브랜드로 거듭난다. 슈프림의 드롭 날이 다가오면 매장 앞에는 텐트가 들어섰고, 사람들은 약 40달러에 출시된 티셔츠를 리셀로 구매하기 위해 수십 배에 달하는 돈을 흔쾌히 지불했다. 탁월한 마케팅 전략과 숨길 수 없는 ‘쿨함’을 지닌 그는 2012년에 어웨이크 뉴욕을 설립했다.
지난 11월 29일 안젤로 바케가 서울 성수동을 찾았다. 어웨이크 뉴욕의 2023 F/W 컬렉션을 소개하고, 엠프티 성수와 함께한 익스클루시브 제품 출시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안젤로는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그가 뱉는 모든 말에는 뼈가 있었다. 흡사 스트리트 브랜드 티셔츠의 그래픽처럼 강렬했다. <보그 코리아>가 그와 함께 뉴욕, 지금의 스트리트 웨어 신 그리고 ‘포저 문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4월 칼하트윕과 협업 컬렉션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두 번째로 방문한 서울은 어떤가. 오롯이 서울의 것이라고 부를 만한 문화를 찾았는지 궁금하다.
15년 전쯤 처음 도쿄를 방문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의 도쿄에서는 새로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지금의 서울도 똑같다. 요즘 같은 때 새로운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또 내가 만난 서울 사람들은 조금 더 자유롭고, 자신을 표현하는 데 두려움이 없다. 음악, 예술, 음식 등 어느 분야에서든 그렇다. 사람들이 서울이라는 도시만의 정체성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점은 뉴욕과 똑같다.
정말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디렉팅은 물론 캠페인 이미지 촬영을 담당하기도 하고, 안젤로 바케 스튜디오라는 에이전시도 운영한다.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나?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하지만, 정작 ‘제대로’ 하는 일은 없다. 어릴 때 사진을 배운 것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모든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어웨이크 뉴욕을 설립한 것도 내가 20년 넘게 쌓은 경험을 모두와 나누고 싶어서였다.
어웨이크 뉴욕은 어떤 브랜드인가? 소비자는 어떤 것을 기대해야 하며, 어웨이크 뉴욕만이 가진 차별점은 무엇인가?
좋은 질문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는 뉴욕이 담겨 있다. 나처럼 뉴욕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내면에는 늘 뉴욕이 숨 쉰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젊음, 유스컬처다. 최근 오픈한 어웨이크 뉴욕의 플래그십에는 언제나 새로운 아티스트의 작품이 걸려 있다. 의도적으로 젊은 포토그래퍼, 스타일리스트와 일하려고 하는 편이기도 하고. 어웨이크 뉴욕은 늘 젊다.
최근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하며 ‘If not us, then who?’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다. 기억하기 쉬우면서도 당찬 슬로건의 유래가 궁금하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휴고 멘도자(Hugo Mendoza)의 아이디어였다. 우리보다 뉴욕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는 뜻을 내비치고 싶었다. ‘뉴욕 출신’임을 자처하는 브랜드는 정말 많지만, 나와 휴고처럼 뉴욕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이끄는 브랜드는 없다. 우린 그 점이 무척 자랑스럽다.
이번 팝업의 슬로건 역시 ‘우리 아님 누구?’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문법적으로는 틀리지만, 어웨이크 뉴욕만의 ‘맛’이 훨씬 사는 번역이다.
KB(이규범 디렉터)의 작품이다(웃음). 처음에는 한국 출신의 스튜디오 매니저 조시에게 ‘If not us, then who?’ 번역을 부탁했다. 이후 한국인 물류 담당자가 ‘우리 아님 누구?’는 어떨지 제안했고, 조시는 문법적으로 틀린 슬로건을 내걸 수는 없다며 한참 토론이 이어졌다. KB 역시 ‘우리 아님 누구?’가 훨씬 반항적이라 얘기했고, 결국 그의 결정을 따랐다.
어웨이크 뉴욕의 뿌리는 결국 뉴욕이다. 한 도시의 색이 강한 브랜드를 다른 도시에 소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도시마다 사람들의 삶, 문제, 취향이 상이하지 않나.
미안하지만 그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뉴욕이란 도시만으로 우리 브랜드를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뉴욕이라는 정체성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젊은 에너지다. 그래픽이든, 컬러든, 우리 디자인에는 늘 메시지가 숨어 있다. 그리고 어웨이크 뉴욕을 입는다는 것은 우리 메시지에 공감한다는 뜻이다.
뿌리는 뉴욕이지만, 브랜드의 언어와 메시지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는 뜻인가?
정확하다.
과거 한 인터뷰에서 늘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맨다고 말했다. 1990년대 힙합을 듣고 자랐지만, 지금도 플레이보이 카티의 새로운 앨범을 찾아 듣는 것처럼. 그 동력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하다.
결국 크리에이티브란 항상 새로워야 한다. 정체된 사람은 자신을 크리에이티브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크리에이티브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은 변화와 진화다. 최근 몇 년간 많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하루하루 더 감사하며 살게 된다. 나는 뉴욕 퀸스 출신이고, 어릴 적 친구들은 대부분 평생 뉴욕을 떠나본 경험이 없다. 오늘처럼 다른 도시에서 눈을 뜨는 날은 더더욱 특별하다.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면 늘 ‘퀸스 출신’이라는 설명이 붙는다. 안젤로 바케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전에 퀸스가 어떤 곳인지 먼저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퀸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다.
일단 진짜 코리아타운이 퀸스에 있다(웃음). 최근 가장 뜨거운 이슈는 젠트리피케이션이다.
지금 우리가 있는 성수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적인 피해 지역이다.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다. 뉴욕의 다섯 자치구 가운데 젠트리피케이션의 피해가 가장 적은 곳이 바로 퀸스다. 퀸스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인종과 문화권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 뉴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다양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곳이라고 할까? 음식도 마찬가지다. 퀸스에는 어떤 나라의 음식이든 맛있게 하는 식당이 있다. 브루클린의 피자가 최고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한국, 에콰도르, 콜롬비아, 온두라스 등의 음식을 찾는다면 퀸스로 와야 한다. 브롱크스 출신인 휴고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항상 공동체의 힘에 대해 강조한다. 어웨이크 뉴욕 역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매개체이자 소통의 창구로 봐야 할까?
물론이다.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어웨이크 뉴욕의 주된 목적이다. 어릴 적 나는 다양한 가게를 방문하며 음악, 아티스트, 그래피티 등에 대해 배우며 나만의 크루를 형성해갔다. 물론 옷도 팔고 돈도 벌고 싶지만, 우리의 목표는 문화에 어떤 방식으로든 기여하는 것이다. 과거 아시아에 진출하는 서양 브랜드 대부분이 ‘우리가 와준 걸 감사히 여겨라’라는 식의 태도를 갖고 있었다. 어웨이크 뉴욕은 그런 브랜드와 다르다. 서울이 우리를 환영해주고, 우리가 서울 문화에 기여할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을 선보인다. 협업 역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움직임인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한다(웃음).
(웃음) 대답 그대로 인터뷰에 실어도 되나?
당연하다.
슈프림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내가 슈프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15년, 당신이 브랜드 디렉터로 있을 때다. 그때 내가 슈프림을 좋아한 이유는 슈프림의 협업에 모종의 무작위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케이트 모스, 커밋, 데이비드 린치, 모리세이, 닐 영, 블랙 사바스… 지금 어웨이크 뉴욕의 협업에서도 비슷한 무작위성이 느껴진다.
무작위성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협업의 뒤에는 늘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슈프림의 매력은 모든 걸 ‘대충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실 그 이면에는 슈프림 팀의 엄청난 노력이 숨어 있는데도 말이다. 나는 슈프림에서 큐레이션의 힘을 배웠다. 다양한 걸 큐레이팅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뿌리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협업 대상에 맞추기 위해 타협해선 안 되고, 어웨이크 뉴욕의 협업 제품은 항상 ‘어센틱’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프린트 티셔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당신의 첫 ‘디자인’은 약 20년 전, NBA 선수 패트릭 유잉이 그려진 티셔츠였다. 지금 어웨이크 뉴욕에서도 다양한 프린트의 티셔츠를 선보이는데. 프린트 티셔츠를 이토록 사랑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그만큼 자신의 취향을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은 없으니까. 누군가의 얼굴이 박힌 티셔츠를 입는다는 것은 대상을 향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이소룡 티셔츠를 입는 사람은 이소룡의 철학에 동의하는 사람이고, 넬슨 만델라 티셔츠를 입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결국 소비자 입장에서 프린트 티셔츠란 곧 정체성이다.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보면, 프린트 티셔츠는 가장 강력한 메신저다. 일종의 교육적 기능도 있다. 아까 블랙 사바스를 언급했는데, 그때 슈프림을 입던 어린애들은 대부분 블랙 사바스가 누군지 몰랐을 거다. 모리세이도 똑같다. 슈프림이 모리세이 티셔츠를 선보인 뒤, 어린 모리세이 팬들이 많이 늘었다. 그들도 나처럼 모리세이를 들으며 자랄 것이다.
라킴이 등장하는 캠페인 이미지를 봤다. 힙합을 즐겨 듣는 젊은 세대 대부분이 라킴을 모를 것이다. 그와 같은 1세대 ‘원로’들을 젊은 세대와 소비자에게 소개하는 것이 어웨이크 뉴욕의 임무라고 생각하나?
라킴과 같은 래퍼로부터 영감을 받을 뿐이다. 어웨이크 뉴욕이 향수에 젖어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저 라킴이 엘비스 프레슬리, 밥 딜런과 같은 선상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즈 뮤지션과 달리 래퍼는 나이가 들며 자연스럽게 잊히는 것이 늘 불만스럽다. 힙합은 지나치게 젊음과 외적인 것에 집착한다. 나는 라킴이 지금도 샤데이와 모리세이만큼 쿨하다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슈프림은 물론 많은 스트리트 브랜드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포저’라는 비난을 받는다. 메리엄-웹스터는 최근 ‘진정성(Authentic)’을 2023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기도 했다. 포저 문화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누구나 ‘척’하는 시기가 있지 않나? 자신이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 비난은 지금 젊은 세대가 마주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새로운 도전을 꺼리거나,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미움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포저라고 부르면 ‘어쩔 건데?’, 난 그걸 동력으로 삼을 거다.
쭉 스트리트 브랜드에 몸담은 베테랑으로서, 지금의 스트리트 웨어 신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특히 당신이 판도를 바꿔놨다는 얘기를 듣는 버질 아블로와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더더욱.
내가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이 신은 자그마한 모임 같았다. 전 세계에 500명 정도 있었을까? 버질 이후 모두가 스트리트 웨어를 알게 됐다. 이제는 엄연한 ‘패션’이고, 주류 문화의 일부다. 하지만 차고에 틀어박혀 프린트 티셔츠를 디자인하는 소년만 있다면, 스트리트 패션은 언제나 새로울 것이다. 그런 DIY 정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행위야말로 스트리트 웨어의 본질이다.
스트리트 웨어가 대중문화의 일부가 된 것에 대한 불만은 없나?
덕분에 먹고사는 입장이니, 불만을 갖는 게 이상하다.
예전부터 숀 스투시 같은 스트리트 웨어 1세대가 쿨의 정점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1세대로서 당신이 생각하는 ‘쿨함’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솔직함. 남들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솔직해야 한다. 인턴이나 직원을 채용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도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다. 옷차림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상관없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숨기는 건 멋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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