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타운’, 김진아 감독이 만든 확장된 세상
더 이상의 공백은 없다. 네모난 프레임을 벗어나 360도로 확장된 세상이 미처 목격되지 못한 아픔과 슬픔, 행복을 기어이 포착해낸다. <동두천>, <소요산>, 그리고 마침내 <아메리칸 타운>으로 완성된 김진아의 VR 3부작. 미군 위안부의 발자취를 뒤따르는 그의 집요한 기록이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은은하게 공명한다.
당신을 통해 생애 처음으로 VR 영화를 체험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김진아 VR 특별전 <당신의 침묵을 비추는 거울> 덕분이었다. VR 기기를 쓴 관객은 회전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며 10분 안팎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동두천>(2017), <소요산>(2021) 그리고 <아메리칸 타운>(2023). 미군 위안부 이야기가 드디어 마무리되는 시점인 만큼 한국에서 전시회를 잘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한국 영화사의 현대미술관 같은 상징적 장소인 한국영상자료원에서 3부작을 한꺼번에 선보일 수 있어 기쁘다. 전시를 기획해준 김홍준 원장은 존경하는 선배이자 든든한 응원군이다. 2005년 내가 하버드대 전임강사로 일할 당시 기획한 한국 영화 회고전과 지난해 열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특별전에도 모두 참석해줬다. 3부작을 보고 나서는 눈시울을 붉히며 “어떻게 이렇게 숨도 못 쉬게 만드냐”는 말로 응원해주셨다.
현재 LA에 머물고 있다. 전시를 통해 3주간 한국 관객을 마주했는데 인상적인 만남이나 대화가 있었나?
<아메리칸 타운>을 보며 펑펑 울던 40대 초반 여성 관객이 기억난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평온한 논밭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고 했다. 착취를 둘러싼 장소에서 그토록 평화로운 분위기가 흐른다는 것. 그 싱그러운 침묵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고 한다.
국내에 96개 기지촌이 존재했다. 미군을 위한 서비스업 중심의 구역인 기지촌은 위안부 문제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 동두천 기지촌, 소요산 낙검자 수용소에 이어 신작에서는 군산 미 공군기지를 조명했다.
동두천 기지촌은 여전히 영업 중이고, 소요산 낙검자 수용소는 공포 영화에 나올 법한 폐허다. 그런데 아메리칸 타운은 분위기가 좀 애매모호했다. 인적은 드문데 밤에 영업하는 클럽이 몇 군데 있었다. 공간이 영화적이지 않아 어떻게 담아내야 할지 고민이었다. 산 사람의 공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사람의 공간도 아닌 시간과 역사의 연옥 같은 느낌이었달까.
돌파구는 어디서 찾았나? 지난해 <보그> 인터뷰에서 <아메리칸 타운>은 가장 ‘시각적’인 작품이 될 거라 귀띔했다. 공간 여기저기에 놓인 거울에 인물의 과거를 투사하는 연출에 눈길이 갔다.
타운 안을 많이 걸어 다녔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이 거울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다 보니 길을 걷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놀랄 때가 많았는데 그 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거울이 지닌 상징성이 있지 않나. 앞은 물론 뒤를 비추기도 한다. 그러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는 아주 선명한 명제가 떠올랐다. 해결되지 않은 사회문제 속 대상을 착취하지 않으면서 생생하게 기억하게 만들기 위해 온갖 기술과 매체를 실험했지만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늘 한계를 느꼈다. 그런데 원시적 광학 도구인 거울이 어쩌면 참여를 유도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메리칸 타운>에서 우리의 모습이 보여야 하는 거울에 주인공 여성의 과거 모습이 비친다.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고, 그것도 현재가 아닌 과거를 목격하게 된다는 점이 불러일으키는 시각 기호학적 효과가 매력적일 것 같았다.
전작과 달리 <아메리칸 타운>에서는 주인공이 처음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다. “누구세요?”라고.
여전히 수많은 기지촌이 남아 있고, 전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만큼 미군 위안부 문제를 지금, 여기, 나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 거울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여러모로 충격적이지만 결국 거울 안의 세상이기에 <아메리칸 타운>에서 관객은 비극과 비교적 편안한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듯 말이다. 하지만 거울 속 여자가 밖으로 나와 구체적인 실체로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녀의 고민과 문제는 내 것이 된다. 여자를 따라다니며 모든 내밀한 상황을 목격한 당신은 누구인가? 21세기를 살며 VR 기기를 뒤집어쓰고 1980년대 기지촌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고 목격하는 당신은 어떤 존재인가? 그런 의문을 던지고 싶었다.
기록과 아카이빙에 대한 역할과 책임을 강하게 의식하는 예술가다. 그래서인지 “다큐멘터리의 힘을 믿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든 게 너무 빨리 사라진다. 위안부 재판에서 가장 난감한 지점이 바로 증인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거다. 모든 증거가 사라지면 우린 뭘로 싸울 수 있을까? 아메리칸 타운 전체가 재개발로 빠르게 철거되는 중이고, 몽키하우스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사라지고 말 거다. 그런 조급함이 VR 작품 세 편에 더해 AR 작품까지 만들게 했다. AR 기술로 공간을 아카이빙할 수 있고, 한번 그렇게 데이터를 스캔해놓으면 미래의 관객은 철거된 기지촌 안을 언제 어디서든 배회할 수 있으니까.
맨 처음 VR 기기를 착용할 땐 의미 있는 장면을 놓칠까 봐 불안했다. 8년간 이어진 신기술과의 동행은 만족스러웠나? 그럼에도 아쉽게 느낀 기술적 한계가 있나?
화질이다. 그리고 기계가 없으면 감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 쓰는 행위의 불편함. 그런 것들이 경험의 기회를 축소시킨다는 아쉬움도 많다. 팬데믹이 몰고 온 위기도 치명적이었다. VR 기기를 접할 수 있는 영화관과 박물관이 전부 문을 닫게 되면서 게임 유저와 게임 소비자, 초고화질 공연 실황 영상을 찾아보는 K-팝 팬들처럼 일부 마니아층만 VR 기기를 접하게 됐으니까. 신기술을 둘러싼 열광적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침체됐다. 2016년쯤 VR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저널리즘의 새 지평을 열었던 VR 다큐멘터리 시장도 사장되다시피 했다. 너무 아쉽다.
황석영 작가의 소설 <바리데기>의 영화화를 위한 각색 작업에 몰두 중이다. 베라 파미가와 하정우가 주연을 맡은 로맨스 영화 <두 번째 사랑>(2007), 양자경, 헨리가 이끄는 <파이널 레시피>(2014) 이후 오랜만의 상업 영화 작업이다.
<아메리칸 타운> 베니스 상영 준비에 골몰하며 혼이 쏙 나가 있었을 때 영국인 제작자의 연락을 받았다. 너무 방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라 잘해낼 자신이 없었는데 “너밖엔 없다”며 베니스까지 찾아오셨다(웃음). 이후 한국에서 다시 만난 황석영 작가님은 영어로 진행한 내 인터뷰까지 하나하나 다 읽어봤다고 하시며 초국가적 감각을 비롯한 내 생각과 이념이 선생님께서 소설을 집필할 때 고민하던 부분과 너무 비슷하다고 하셨다.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와 결합했을 때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이 발생하는데 그것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에 특히 공감하셨다. 탈북자 여성이 주인공인 <바리데기> 역시 그런 이야기라고 말이다.
한국에서 미술을, 미국에서는 영화를 공부한 후 시각예술, 실험 영화, 다큐멘터리, 극영화, VR까지, ‘영상’이라는 느슨한 기반 위에서 다양한 연출법을 실험해왔다. 어떤 갈증에서 비롯된 행보일까?
하고 싶은 이야기에 집중한 뒤 그에 어울리는 매체를 고민하다 보니 스펙트럼이 확장됐다. 여성의 몸, 디아스포라, 언어의 제국주의 등 살아온 시기마다 집요하게 파고든 주제가 있는데 그것에 몰두하다 보면 어떤 때는 퍼포먼스가 생각나고, 어떤 때는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새로운 기술과 매체에 대한 탐구심이 워낙 강하기도 하다.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2001)는 6년간의 기록이 담긴 157분 분량의 비디오 에세이로 디아스포라, 거식증, 여성성, 가족사 등 지극히 개인적 화두로 가득하다. 스물두 살,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교육자 부모님의 반대를 물리치고 미대에 입학했지만 한국 여성 예술가로 살아가는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계부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하던 여자 친구를 위해 남자 친구가 그 계부를 살해한 사건과 ‘서울대 성희롱 사건’ 등 윤금이 사건 외에도 여성의 몸이 유린되는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 사회 안에서 여성의 몸을 가진 내가 설 자리는 없다는 좌절이 너무 컸다. 노동과 계급에 관한 문제는 타도의 대상이고, 다이어트를 하다 굶어 죽은 여자의 이야기는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마는 국내의 인권 감수성도 너무 편협하게 느껴졌다. 눈앞의 거대한 벽 앞에서 대체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지 알 수 없던 스물두 살, 끝내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 사람인가? 일찍이 잔인하게 묘사된 폭력적 이미지와 대중의 관계에 천착하던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우리 모두 서로에게 무관하지 않다는 연민을 갖기를 촉구했다.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면 가장 먼저 슬픔과 분노 등 감정적 반응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 감정은 ‘그런 불행을 겪지 않을 수 있어 감사해’라는 소시민적 반응에 그칠 수도 있고, 정작 고통을 겪은 이를 배제하게 되는 이중 폭력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지 않기 위해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 하고, 타인을 위해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이성적으로 돌아보려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따뜻한 사람이 아니라 서늘한 사람이 되고 싶다.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는 뭔가? 영화로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나?
정의라는 말이 풍기는 위선의 냄새가 싫고, 정의의 이름으로 너무나 끔찍한 폭력이 자행되기도 한다. 정의(Justice)를 정의(Define)하는 것보다 정의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벌어질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마련하는 일이 훨씬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좋은 영화는 필요한 질문을 던지며 그런 세상을 만드는 일에 기여한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답답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적어도 우리가 잊고 있었던 뭔가를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영화는 의미를 지닌다.
베니스국제영화제와 인연이 깊다. <동두천>이 이곳에서 ‘베스트 VR 스토리상’을 수상했고, 한국 여성 감독 최초로 경쟁 부문 심사 위원으로 활약했다. 최근에는 로에베의 샛노란 드레스를 입고 <아메리칸 타운>을 상영하러 다녀왔다. 세상에 어떤 영화가 더 많아지길 바라나?
누드화는 남성 화가가 여성을 대상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예술이다. 식민 제국이 피식민지의 원주민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도 같은 원리다. 여전히 선진국의 관광객은 제3세계 어린이를 아무렇지 않게 피사체로 삼아 들여다본다. 영화의 역사 또한 권력의 역사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는 피사체에 머물던 존재들이 카메라 뒤에서 주체로 활약한 작품이다. 그런 영화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지만 우리에겐 더 많은 불편한 영화가 필요하다.
UCLA 영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하버드대학 시각예술환경학과에서 학생을 가르친 최초의 아시아 여성이자 미국 언론 <버라이어티>가 영화 학교를 대상으로 선정한 최우수 교육자로도 꼽혔다. 학생들을 보며 자주 하는 생각은?
무섭다(웃음). 20년 전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어느덧 IT와 미디어 회사의 중역이 되어 전 세계를 뒤흔드는 결정을 내리고 있다. 영화를 제작해 문화를 주도하거나 의회에서 정책을 펴기도 한다. 세상이 주목하는 중요한 자리에서 내 수업 시간에 함께 나눈 이야기를 인용하는 학생을 보면 그때 내가 뿌린 씨앗이 어떻게 열매 맺는지가 극명하게 보인다. 무섭다. 그러니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지 확실하게 정립된 상태에서만 교단에 서야 한다. 물론 그런 치열한 환경에서 내가 덕을 본 것도 많다. 끊임없이 배우게 되고, 정말 다양한 자극과 영감을 얻게 되니까. 학생들을 통해 시대에 부응하는 예술가로 살 수 있어 감사하다.
드문드문 미국 생활의 면면을 공개하는 SNS를 보면 텃밭을 가꾸며 느끼는 보람도 큰 것 같다.
내가 소유한 모든 것 중에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아닐지(웃음). 팬데믹 시기에 귀찮아서 뒷마당에 파묻은 과일과 채소의 씨앗들이 싹을 틔우는 것을 보고 그 생명력이 귀하고 반가워 본격적으로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숲을 이뤘다. 텃밭에 자라는 작물이 못해도 50종은 되고, 꽃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삽으로 퍼내야 할 정도다. 매일매일 작업량이 엄청나지만 서재에 앉아 나부끼는 나뭇잎과 꽃잎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불순물이 다 씻기는 듯 개운하다.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행복이다. 덕분에 반가운 손님도 늘었다. 꽃과 열매가 움트니 벌과 나비가 찾아오고, 산비둘기와 매가 날아오고, 다람쥐, 너구리, 주머니쥐도 드나든다. 농약도 안 치고 엄청난 노력을 한 것도 아닌데, 환경만 잘 갖추고 나니 전부 알아서 잘 자란다. 참 신기하다.
다음 작품은 영화가 아니라 가드닝 북이 될 수도 있겠다.
재미있을 것 같다. 정말 별일이 다 생기니 말이다. 뿌린 대로 쑥쑥 커서 놀라운 생태계를 이루는 정원을 보고 있으면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든다. 무언가를 양분 삼아 하나의 존재가 끈기 있게 살아가는 모습은 언제나 대단하고 애틋하다. (VK)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포토그래퍼
- 박종하
- 컨트리뷰팅 패션 에디터
- 김미진
- 스타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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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트
- 최서윤(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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