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트베르펜의 새로운 전설
전설적인 아제딘 알라이아의 뒤를 잇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 피터 뮐리에가 등장했다.
과거에 대한 이해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진 디자이너와 만났다.
지난여름 파리에서 알라이아 레디 투 웨어 쇼가 시작되기 직전, 2021년부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는 피터 뮐리에(Pieter Mulier)의 편안하고 차분한 자태가 팀원들 사이에서 돋보였다. 뮐리에는 백스테이지 방문객과 대화를 나누거나 메이크업 룸을 돌아다니다 자신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는 모델 줄리아 노비스와 연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쇼가 늘 이렇게 편하진 않았다. 안트베르펜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열린 지난 쇼에서는 긴장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번 쇼는 여름날 저녁처럼 느긋한 리듬으로 흐르며 뮐리에가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음을 세상에 알렸다. 런웨이는 튈르리 정원과 오르세 미술관 사이 센강을 가로지르는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인도교에서 펼쳐질 예정이었다. 이 다리는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건설 당시 놀라운 공학적 업적이었다. 태양과 서풍이 만나자 뮐리에의 알라이아 작품에서 따뜻하고 정교한 세련미가 빛을 발했다. “스튜디오에서 알라이아의 가족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뮐리에가 말했다. “모든 것이 사람에 맞춰져 있죠.”
44세 뮐리에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세계에 새로 입성했다. 알라이아가 수장을 맡은 첫 번째 하우스지만, 그 전에도 패션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져왔다. 16년간 라프 시몬스의 오른팔이자 조언자로 활약하면서, 시몬스의 커리어가 점점 더 큰 레이블로 옮겨가며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했고 창의적 관점뿐 아니라 대규모 팀을 관리하는 능력으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보디 콘셔스 스타일을 재해석한 튀니지 출신 디자이너 아제딘 알라이아(Azzedine Alaïa)가 2017년 세상을 떠난 후, 후임으로 뮐리에가 발탁되자 많은 이들이 그가 알라이아의 섬세한 매력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자신만의 신선한 비전을 제시하며 승계에 성공할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브랜드 알라이아는 아제딘과 그 시대에 워낙 깊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우스의 마법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어요.” 2021년 여름 뮐리에의 데뷔 이후, 컬렉션 대기자 명단에 다시 이름을 올린 줄리안 무어가 말했다. “피터는 그걸 해냈어요.”
실제로 보면 뮐리에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뒤로 넘기고 툭 튀어나온 팔꿈치 아래 가느다란 팔이 달랑거리는 모습이 소년 같은 느낌을 준다. 주로 로고가 없는 흰색이나 검은색 스웨트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경기장에서 작전을 지시하고 동료들을 독려하는 팀 주장처럼 하우스를 이끈다. 이틀 전 피팅에서 뮐리에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모델들이 들어올 때마다 수다를 떨었다. “피팅하는 동안 ‘와우!’ 하는 감탄과 박수가 계속 들려요.” 뮐리에와 30분 거리에서 자란 모델 엘리제 크롬베즈가 말했다. “모든 모델이 각 의상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것처럼요. 단순히 런웨이를 걷는 머릿수가 아니고요.”
뮐리에는 백스테이지에서 다른 스태프와 마찬가지로 흰색 작업복을 입는다. 그의 담백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평등주의적 제스처다. 플랑드르 출신 뮐리에는 ‘썸머에일’ 한 잔처럼 경쾌하고 투명한 듯싶다. 그러나 디자인에 대한 그의 태도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업무 시간이 아닐 때도 갤러리와 아티스트 스튜디오를 방문하며 스크랩북과 아카이브를 만들고, 오래된 라디오를 분해하듯 의류를 분석한다. 어떤 디자이너는 내면에 집중하며 디자인이 파격적이지만, 뮐리에는 자신의 작업이 훌륭한 예술에 대한 의견을 형성하려는 오랜 집단적 노력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패션이 무언가를 제안하고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패션은 문화의 일부니까요.”
오르세 미술관의 시계에 매료된 뮐리에는 이번 쇼의 주제로 시간을 선택했다(그는 컬렉션을 시작하는 데 신발과 장소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획일화되고 금세 잊히는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는 패션계에서 시간을 되찾는 것이 시급하다고 여겼다. 다른 하우스와 달리 알라이아는 여전히 연간 두 번만 쇼를 진행한다. 1990년대에 아제딘은 작품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쇼를 마지막 순간에 취소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뮐리에가 말했다. 천천히 시간을 갖는 것이 알라이아의 강점이라면 이를 런웨이에서 기념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시계에 대해 생각하자 뮐리에는 단추가 떠올랐다. “옷을 입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고, 벗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단추를 채우는 순간이 정체성을 완성하고 스스로 힘을 부여하는 순간이라면, 단추를 푸는 것은 에로틱한 시간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는 옷과 신체의 물리적 특성에 집중하는 것 자체가 매우 알라이아답다고 생각했다. 쇼의 초대 패키지는 독특했다. 게스트에게 다리 세 개짜리 접이식 의자를 보내면서 쇼에 가져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제 패션계 거물급 인사들이 다리를 따라 임시 좌석에 줄지어 앉았다. 일시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사용에 대한 선언이면서 민주화를 위한 당돌한 제스처인 듯 보인다. “패션 피플이 캠핑 의자를 들고 파리의 부르주아 동네를 걷는다는 아이디어가 좋아요.”
산들바람이 불자 옷이 춤을 췄다. 가을 코트와 후드, 모자와 매치된 얇은 비닐 스커트와 드레스. 반투명한 블랙 플리세 피스와 아름답게 재단된 화이트 룩. 노란빛이 도는 핑크, 블루와 어스 톤 컬러, 하이칼라와 날카로운 컷아웃이 있는 블라우스, 코르셋, 레깅스, 알라이아 실루엣의 팬츠, 랩 부츠, 가죽 서스펜더, 앰버 컬러 비닐 오버 코트. 알라이아는 레디 투 웨어와 꾸뛰르를 하나의 리테일 컬렉션으로 녹여내는 것을 중요시하며, 알라이아의 의상은 독특한 제작 방식으로 유명하다. 패턴 테이블이나 마네킹이 아니라 인체에 직접 디자인하고, 독점적인 다이내믹 테일러링 기법으로 집처럼 안쪽부터 바깥쪽으로 제작한다. 알라이아를 입어본 많은 사람은 눈을 감고도 알라이아 드레스의 느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옷이 안아주는 것 같아요.” 크롬베즈의 설명에 뮐리에도 동의했다. “몸을 감싸줘요. 그냥 걸친 게 아니고요. 프랑스어로 ‘테뉘(Tenu)’라고 하는데, 잡혔다는 뜻이에요.” 알라이아의 독보적인 테일러링은 뮐리에가 생각하는 하우스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4인으로 구성된 디자인 팀과 테일러링, 드레이핑, 니트웨어, 가죽을 다루는 아틀리에를 운영하는 이유다.
작곡가 귀스타브 루드만(Gustave Rudman)의 저음 클라리넷 오스티나토가 깔린 런웨이에 마지막으로 크롬베즈가 등장해 쇼를 마무리했다. 친밀함에서 나온 선택이었다. 크롬베즈와 뮐리에는 거의 같은 나이에 플랑드르 방언을 쓰며 자랐다. 그녀는 엉덩이 부분에 잔잔하고 가느다란 러플 밴드가 달린 블랙 하이넥 반투명 드레스와 발가락 부분에 A자 모양 컷아웃이 있는 블랙 힐, 광택 나는 골드 벨트를 착용했다. 볼테르 제방 길을 지나던 행인들이 강변의 높은 둑에 올라와 쇼를 감상했다. 쇼는 파리의 한가로운 일요일 저녁으로 흘러들어 자리에 앉은 패션 피플뿐 아니라 지나가던 파리 시민과 관광객에게도 장관을 선사했다. 그들은 잠시 멈춰 서서 구경한 후 런웨이 모델처럼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며칠 후 뮐리에는 중간중간 떠나 있긴 했지만 20년 동안 살고 있는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왔고, 기분이 좋았다. “기가 막혀요!”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그가 말했다. “이 사람은 가장 보기 싫은 장소에 레스토랑을 차렸어요.” 레스토랑 ‘베란다(Veranda)’는 콘크리트 고가 철로를 마주하고 있다. 설립자는 뮐리에의 친구인 셰프 데비 셸레만스(Davy Schellemans)로, 뮐리에의 부탁으로 알라이아의 귀빈에게 여러 차례 요리를 대접했다. 뮐리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에 숨어 있는 놀라운 것들, 드러내지 않지만 시간을 내 찾아주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훌륭한 것들을 좋아한다. 그는 레스토랑 직원들의 이름도 다 알고 있다. 그중 한 명이 여름 토마토로 맛을 낸 시원한 맑은 수프가 담긴 작은 머그잔과 벨기에산 새우를 곁들인 수제 콜리플라워 라비올리, 병아리콩 크림과 발효 꿀 소스를 곁들인 현지 닭고기를 가져다주었다.
뮐리에가 닭고기를 먹으며 설명했다. 그가 보기에 알라이아의 황금기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로, 아제딘이 여성의 곡선을 드러내면서도 신비롭게 만드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던 시기였다. 아제딘은 가볍고 고전적인 여성스러운 소재를 가죽 같은 거친 소재와 혼합했다. 재킷처럼 재단된 니트웨어는 단정하고 프로페셔널하면서도 관능적인 느낌을 주었는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였으며 198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일 중 하나였다. “아제딘은 재단사였어요.” 뮐리에는 이 사실이 여성스러움과 강인함이 조화를 이룬 작품의 비결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섹스어필에 편안함을 더했어요. 놀라운 일이죠.” 이 관능은 타협 없는 프랑스식 관능이었다.
뮐리에는 아제딘의 삶이 끝날 무렵 꿀맛이 시큼하게 변했다고 생각한다. “알라이아가 부르주아 의복이 되어버렸어요.” 그가 말했다. “아트 페어에 가면 모든 갤러리스트가 알라이아를 입고 있었던 기억이 나요. 다 같은 드레스에 같은 신발을 신고 있었죠. ‘좋은 취향’의 대명사가 되는 것은 절대 좋지 않아요.” 알라이아는 젊은 세대를 잃었다. “젊은 사람들은 알라이아를 잘 몰랐어요. 엄마는 입었지만 딸은 입지 않았어요.” 뮐리에의 임무는 알라이아가 쌓아온 꽉 막힌 부와 올바름의 향기를 지우고, 아제딘이 혁신적이고 센세이셔널했던 이유인 젊고 대담한 정신을 되찾는 것이었다. 브랜드의 강점을 파악한 뮐리에는 약점을 찾아 수정하기 시작했다. 어깨와 팔이 현대 여성에게 너무 타이트하게 재단된 것을 고려해 이를 조절했고, 재킷은 편안하다기보다 조각품처럼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라인을 개방하고 현대화했다. 수영복, 아이웨어, 속옷 등 저렴한 가격대의 제품 카테고리를 추가해 젊은 소비자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섹시함을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뮐리에는 “끝내주는군요!”라고 칭찬한 딸기 소르베를 깨작거리고는 밖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그를 태워주는 검은색 미니밴 뒷좌석에 올라탔다(최근 1978년형 포르쉐 911을 구입했지만, 밴을 타고 다니면 모든 사람이 그의 번호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울리는 왓츠앱을 확인할 수 있다). 뮐리에는 보통 주중에는 파리로 출근하고 주말에는 기차나 자동차로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온다. 알라이아 작업을 위해 밴을 빌리면 운전기사는 뒷좌석에 큰 재떨이를 준비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뮐리에는 대규모 보수 공사를 거친 벨기에 왕립 미술관에 들러 플랑드르 회화를 감상했다. 그가 가끔 하곤 하는 일이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이거예요.” 루벤스 세 폭 제단화 ‘니콜라스 로콕스와 아내 아드리아나 페레스의 비문(Epitaph of Nicolaas Rockox and His Wife Adriana Perez)’ 앞에서 뮐리에가 말했다. 좋아하는 이유는? “작잖아요. 전 루벤스의 작은 작품이 좋더라고요.”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시실에는 제임스 엔소르(James Ensor)의 생생하고 몽환적인 표현주의 작품이 가득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중 한 명이에요.” 뮐리에가 해골이 화가의 모습을 한 ‘해골 화가(The Skeleton Painter)’ 앞에서 발걸음을 늦췄다. 그러면서 대뜸 덧붙였다. “저랑 같은 곳에서 태어났어요.”
뮐리에는 벨기에 서부의 해변 휴양지 오스탕드(Ostend)에서 자랐다. 그는 그곳을 초현실적이라고 묘사했다. “오스탕드 사람들은 매우 창의적이고 조금은 미쳤다고들 해요.” 그의 대가족은 브루게 출신인데, 아버지는 의사였고 오스탕드에는 건강관리 시설과 카지노가 많아 인력이 필요했다. 뮐리에는 형과 여동생이 있고, 자신을 다재다능한 재능은 없었지만 “아주 사교적이고 아주 순한 아이였다”고 설명했다. “형은 축구, 테니스, 럭비 등 구기 종목이라면 다 잘했어요. 저는 그런 재능이 없어서 아버지가 아쉬워하셨죠.” 대신 뮐리에는 공예, 그림, 피아노, 연극 등에 마음이 갔다. 그리고 벨기에 왕실의 위탁을 받는 셔츠 제작자로서 재봉사 300명을 관리하던 외할아버지를 존경했다. “항상 할아버지가 사업가라기보다 예술가라고 느꼈어요.” 뮐리에가 말했다. “7개 국어를 구사하셨고, 현대식 주택에서 사셨어요.” 어린 뮐리에에게 이 멋진 셔츠 제작자 할아버지는 예술과 큰 꿈으로 가득 찬 세계적 교양의 정점으로 보였다. “인생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할아버지께 배웠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를 따라 의류업계에 뛰어들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열한 살 뮐리에는 브루게 외곽에 있는 베네딕트회 교육기관 제벵케르컨 수도원 학교(Abdijschool van Zevenkerken)에 입학했다(뮐리에의 삼촌은 가톨릭 주교였다). 그는 학교를 “영화 <해리 포터> 같은 곳”이라고 묘사했다. 평일에는 학교에 기숙하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우고 예술 감상의 기초를 익혔으며,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만났다. 이 시기에 자신은 매우 전형적이었으며, 만족스럽고 올바른 미래를 가진 북유럽 지방의 학생이었다고 설명했다. 19세까지 보이스카우트에 속해 있었고, 그 무렵 부모님의 권유로 루뱅에 있는 법대에 진학해 기숙학교 출신 친구들과 함께 지냈다. 하지만 법학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그는 건축학에 흥미를 느꼈다(알바로 시자(Álvaro Siza),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 이토 도요(Toyo Ito), 렘 콜하스(Rem Koolhaas) 등 미니멀리스트를 좋아했다). 2년 후, 브뤼셀에 있는 생뤼크 인스티튜트(Institut Saint-Luc)의 건축학교에 들어갔고, 이는 뮐리에에게 큰 깨달음을 안겼다. 브뤼셀은 지금까지 살던 도시 중에서 가장 대도시였고, 그곳에서 만난 대담하고 창의적인 사람들은 그를 짜릿하게 만들었다.
“제 세계가 더 넓어지기 시작했어요.” 뮐리에가 말했다. 당시 뮐리에의 세련된 여자 친구는 그의 취향을 넓혀주기 위해 노력하며 뮐리에를 예술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녀는 저를 모든 갤러리, 박물관, 패션 매장에 데려갔어요.” 당시 살아 있는 디자이너 가운데 뮐리에가 들어본 사람은 드리스 반 노튼이 전부였지만, 여자 친구의 집에는 라프 시몬스의 최신 컬렉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둘 다 학생이었다. 한 디자인 수업에서 ‘생존’을 주제로 최종 프로젝트를 제출해야 했다. 시몬스는 평가 위원 중 한 명이었다. “많은 학생이 길거리에서 공격받으면 사람을 쓰러뜨리는 데 쓸 수 있는 반지 같은 것들을 만들었어요.” 시몬스가 회상했다. 뮐리에는 주제를 전혀 다르게 해석해 어떤 면접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보디수트를 입고 나타났다. 셔츠가 빠져나오거나 바지 지퍼가 열릴 걱정이 없는 원피스형 옷은 입사 지원자의 의도치 않은 실수를 방지한다는 발상이었다. 시몬스는 깜짝 놀라 다시 살펴봤다.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었어요.”
뮐리에의 기억에 따르면 시험이 끝난 후 시몬스가 명함을 건넸다. “제가 건축가가 아니라 패션 디자이너인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그가 회상했다. “전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는데, 그는 맞는 것 같다고 했어요.” 시몬스는 안트베르펜에 있는 자신의 아틀리에를 방문할 것을 제안했고, 뮐리에는 정중한 무관심으로 답했다고 떠올렸다. “그런데 여자 친구가 저보고 꼭 가야 한다고 했어요.” 3개월 후, 패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던 뮐리에는 안트베르펜에 도착해 자신의 인생을 바꾼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가 있는 안트베르펜은 인간적인 규모인 동시에 광활하다. 구시가에는 화려한 플랑드르 양식의 타운 하우스가 늘어선 광장이 여럿 있고, 최근 재건축된 지역은 산업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곳곳에 녹지가 조성되어 있다. 2014년 뮐리에는 리버사이드 타워(Riverside Tower)의 펜트하우스를 매입했다. 레옹 스티넨(Léon Stynen)과 폴 드 메예르(Paul de Meyer)가 설계하고 1972년에 완공된 모더니즘의 상징적 콘크리트 건물로, 공원 같은 주거용 평지 ‘왼쪽 강둑’에 있다. 이 지역은 르 코르뷔지에가 한때 이상적인 동네로 계획한 곳이기도 하다. 뮐리에는 드 메예르의 집이었던 아파트를 건축가 글렌 세스티그(Glenn Sestig)와 조경가 마르탱 위르츠(Martin Wirtz)의 도움을 받아 2년간 수리했다. 위르츠는 담쟁이덩굴, 붓꽃, 풀과 나무를 기반으로 독특한 옥상정원을 디자인했고, 뮐리에는 팀 브로이어(Tim Breuer), 벤트 아이커만스(Bendt Eyckermans), 스티븐 시어러(Steven Shearer) 등의 예술 작품으로 채웠다(그는 “패션을 하는 사람보다 예술가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들의 작품에는 더 직접적인 무언가가 있거든요”라고 말했다). 뮐리에는 ‘극단적’이라는 단어를 가장 좋아하는데, 안트베르펜의 시내와 강변이 모두 내다보이는 이 펜트하우스가 바로 그렇다. 그는 정원에 있는 식물이 모두 히로시마 원폭에서 살아남은 종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 어느 추운 날, 이곳에서 알라이아 쇼를 열었을 때 모델들은 뮐리에의 서재와 사무실, 침실을 런웨이 삼아 걸었다. “여기는 섬 같아요. 아주 높잖아요.” 뮐리에는 건물 아래 펼쳐진 강과 도시를 만족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세상 밖의 작은 세상이에요.”
집에 있으면 뮐리에는 새벽 6시 45분에 일어난다(침실의 커다란 사다리꼴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없다). 아침을 먹고 침실로 돌아와 함께 자는 반려견 존존(John John)을 깨운다. 근처 숲에서 1시간 동안 같이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뒤 이메일을 확인한다. 근무하는 날이면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나 9시 정도까지 일한 후 존존과 또 산책한다. 그리고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거나 좋아하는 음식을 요리해 먹고, 밤 11시나 12시쯤 잠자리에 든다. “사실 제 하루는 꽤 전형적이에요.” 그가 방금 떠오른 생각인 것처럼 말했다(뮐리에식 표현에서 ‘전형적’이란 극단적이지 않은 것을 뜻한다). 줌은 팬데믹에서 얻은 최고의 수확이었다. 시몬스, 16년 동안 파트너였던 디자이너 마티유 블라지와 함께 캘빈클라인을 떠난 후, 뮐리에는 뉴욕에 발을 디딘 적이 없다. “뉴욕에서 정말 행복했어요. 돌아간다면 가슴이 아플 것 같아요.”
한가한 주말에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갤러리를 돌아다니고, 운동을 하거나 집에서 친구들을 위해 요리를 하기도 한다. 일요일에는 오스탕드 근처에 사는 형과 동생 집을 방문한다. “아이들을 정말 좋아해요.” 뮐리에가 말했다. “항상 아이를 원했어요. 이런 분야에서 일하면 아이는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잡아주거든요. 하지만 혼자서는 절대 키우지 않을 거예요.” 그는 안트베르펜을 좋아하지만 언제나 약간 사회적 거리를 두고 이 도시를 경험했다고 말했다. 라프 시몬스에서 일한 첫해, 비주류 예술계를 통해 이 도시에 접근하는 법을 가르쳐준 시몬스에게서 얻은 교훈인 것 같다는 것이다. 그 첫해는 패턴 제작과 계약 관리 같은 기본 기술을 배웠고 “창의적인 면에서는 완전히 길을 잃은” 시기였다. “법대에서 건축학교로 갔다가 마른 남자애들 옷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잖아요? 라프의 첫 쇼를 보고 이게 뭐지 싶었어요. 아버지는 사진을 보시고 ‘그게 네가 하는 일이냐”고 물어보셨죠.”
하지만 뮐리에는 시몬스의 레이블에서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1년 동안 아카이브 아래 매트리스에서 잠을 자며 사무실에서 생활했다. 시몬스는 또 다른 젊은 디자이너 블라지를 영입했고, 시간이 지나 뮐리에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면서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다. 둘은 벨기에의 조용한 도시에서 예술과 디자인에 몰두하며 몇 시간씩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전 패션계를 열광시키는 작품을 만드는 의욕 넘치는 팀의 일원이 된 것이 좋았다. “라프는 프리즈 아트 페어와 아트 바젤에 우리를 데려가서, 솔직히 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작품을 보여주며 그것들이 왜 중요한지 설명해주곤 했어요.” 뮐리에가 떠올렸다. “교수님이나 부모님, 삼촌처럼 누구나 인생에서 그런 사람이 한 명쯤 있다고 생각해요. 집이나 학교엔 그런 사람이 없었지만, 라프가 그런 사람이 되어주었어요. 모든 것이 바뀔 정도로 나를 익숙한 영역에서 아주 멀리 끌어내주는 사람 말이에요.” 시몬스가 밀라노로 출퇴근하며 질 샌더에서 일할 때, 브랜드의 신발과 액세서리 담당이던 뮐리에는 그의 오른팔로 통했다. “정말 흥미로운 조합이었어요.” 현재 보테가 베네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블라지가 말했다. “라프는 개념적으로 접근하는 반면, 피터는 곧장 볼륨, 색상, 제품 등 건축가로서 생각했거든요.” 뮐리에는 디자인할 때 옆모습을 그렸고(“옷의 볼륨을 볼 수 있었다”고 말한 블라지는 이 방법을 습득했다), 신발조차 건물을 설계하듯 밑창부터 차곡차곡 쌓으며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뮐리에는 여성복 디자인을 꿈꿨다. 30대에 접어든 지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꿈에 가장 근접한 것은 여성용 신발을 만드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종의 위기감을 느끼고 여성복 라인을 직접 론칭하기로 결심했다. 2010년 컬렉션을 늘려가던 중 아버지가 위독해졌고 뮐리에는 작업을 중단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6~7개월 동안 병간호를 했어요.” 그 무렵 시몬스는 디올로 자리를 옮기면서 뮐리에에게 합류를 권했다. 이번에는 꾸뛰르를 포함한 여성복 작업을 맡게 될 거라 말했고, 뮐리에는 이 제안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디올에서 일한 지 일주일 만에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디올에서 컬러, 볼륨감, 구조 등 옷의 물질적 특성에 대한 뮐리에의 조용한 천재성이 빛을 발했다. “기술적인 부분에 흥미와 도전 정신을 느꼈어요.” 시몬스가 말했다. 알라이아처럼 디올은 테일러링을 기반으로 하는 하우스였고, 뮐리에는 샤넬의 박스형, 디올의 모래시계형, 추후 알라이아에서 마스터하게 될 긴 모래시계형 등 눈에 띄는 실루엣의 힘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디올은 무엇보다 꿈을 파는 법을 배운 곳이다. “곡선에 관한 것이었고, 태도에 관한 것이었어요.” 뮐리에가 말했다. 이 교훈은 2016년 그와 블라지가 뉴욕에서 시몬스와 함께 캘빈클라인의 디자인을 이끌게 되었을 때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이름을 올리고 보수도 받게 된 뮐리에에게 도약이자 글로벌 커머스와 속옷(그는 진지하게 말했다)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창구였다. 안트베르펜 삼인조는 야심 찬 꿈을 꿨다. 품격 있고 대담한 하이패션을 전 세계에 선보이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열정으로 가득 찬 경험이면서도 뮐리에를 지치게 했다. 그는 유럽, 미국, 아시아를 거의 쉬지 않고 오가야 했다. “아침에 암스테르담에 도착하면 24시간 동안 50명과 일하면서 그들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어야 했어요.” 뮐리에가 설명했다. “일을 정리하고 떠났다가 3주마다 돌아와서 또 그렇게 해야 했죠.” 프로젝트가 끝날 때쯤, 그는 “지칠 대로 지쳤다”고 표현했다.
뮐리에는 1년 동안 자신에게 들어오는 일자리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다 팬데믹 시기에 점점 불안해졌고, 스위스 가구 회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고려해봤다. “아, 가구는 참 평온하구나 여겼어요.” 이때 알라이아가 눈에 들어왔다. “피터가 알라이아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라프 시몬스와 캘빈클라인에서 뮐리에와 함께 일한 클레망드 부르주뱅 블라크만(Clémande Burgevin Blachman)이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제딘의 친한 친구였고, 부르주뱅 블라크만은 뮐리에에게서 과거의 정신을 통해 하우스를 다시 살려낼 디자이너를 보았다고 가늠했다. “건축가라는 배경 때문인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그만의 시각과 문화와 예술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뮐리에에게 지원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설득했어요.”
지원 절차는 꼬박 1년이 걸렸다. “연애 중이었죠.” 뮐리에가 농담조로 말했다. “바람피우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말했어요.” 그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먼저 알라이아가 지닌 가치를 발견했다. 라프 시몬스의 친밀함과 독특함, 디올의 품위 있는 아틀리에와 환상을 선사하는 능력, 캘빈클라인의 대중성과 개방성이 결합된 하우스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뮐리에는 이 일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확신했다. 12개월 동안 건축가가 프랑스 대성당을 연구하듯 빈티지 알라이아 의상을 주문해 구조를 연구하며 옷감에 대한 아제딘의 언어를 배웠다.
뮐리에와 블라지는 안트베르펜에서 함께 살 때, 아파트 근처에 있는 가족적 분위기의 선술집 스타일 레스토랑 드 제스터(De Zeester)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오늘 밤 뮐리에는 둥근 테이블에 앉아 회색 새우 크로켓, 홍합, 고블릿 볼처럼 생긴 볼레케에 현지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이곳에서도 그는 직원 이름을 알고 있다. “우리 개가 이 직원을 아주 좋아해요.” 뮐리에가 말했다. 블라지와 헤어진 후, 둘은 존존의 양육권을 나눠 가졌다. 존존은 파리, 밀라노, 안트베르펜을 오가는 길에 차 뒷좌석에서 잠을 잔다. 곁에 없으면 뮐리에는 존존을 몹시 그리워한다. “제 하루는 존존을 중심으로 돌아가요.” 그가 말했다. “존존은 항상 알라이아에 있어요. 아틀리에에, 아래층에, 스튜디오에. 동물은 팀원들에게 평온함을 가져다줘요.” 블라지보다 자기가 존존을 더 많이 데리고 있어서 이것이 공정한지 걱정하기도 하지만, 존존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오로지 존존을 보려고 밀라노에 간 적도 있어요. 그 정도예요.”
운이 좋거나 나쁘게, 뮐리에와 블라지에게 각자가 믿었던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를 이끌 일생일대의 기회가 거의 동시에 찾아왔다. 수년 동안 둘은 삼각형의 두 아래쪽 모서리에 해당하는 부관의 자리를 함께했다. 그러다 하룻밤 사이 각자 자신만의 왕국을 맡게 되었다.
두 도시에서 두 개의 스케줄을 따르며, 드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애쓰는 둘의 새로운 역할의 무게는 하나의 관계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일단 그 자리를 얻으면 주변의 모든 것을 잠식하기 때문에 인생에서 몇 가지 선택을 해야 해요.” 뮐리에는 알라이아를, 블라지는 보테가 베네타를 선택했고, 나머지는 묻어두었다. 지금도 여전히 두 사람은 서로의 쇼에 가장 열광적인 팬이다. “피터의 작업 방식에서 제가 좋아하는 점은 그가 시류를 거스르고 위험을 감수하지만 충격을 주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자신이 가장 믿는 것을 추구할 뿐이죠.” 블라지가 말했다. 하지만 둘은 여전히 헤어진 상태다. “그것만을 기반으로는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어요. 그저 일에만 말이죠.”
상실은 엄청난 성공으로 돌아왔다. 알라이아에서 뮐리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비전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첫 번째 컬렉션만으로도 하우스의 운명이 바뀌었다. 그레이스 존스가 착용한 초기 알라이아 후드를 새롭게 해석한 제품은 불티나게 팔리며 출시하자마자 패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알라이아를 상징하는 아이템이죠. 모든 대형 하우스가 모방했어요.” 뮐리에가 말했다. “다른 브랜드에서 알라이아를 다시 보게 만들었죠.”
2년이 지난 지금도 알라이아는 계속 주목받고, 후드는 여전히 눈부신 판매율을 기록 중이다. 적어도 뮐리에가 보기에 성공은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작은 회사예요.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20년 동안 적절한 기회를 위해 때를 기다렸기 때문에 서둘지 않고 기회를 붙잡는 데 익숙해졌다. 이제 그에게는 과거의 그 모든 경험과 미래가 있다. “저는 참을성이 많아요.” (VK)
- 사진
- Anton Corbijn
- 글
- Nathan He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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