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창의 항해’라는 멋진 신세계
12월 14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에서 79일간의 <구본창의 항해> 전시가 열린다. 국공립 미술관에서 한국 사진가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리는 건 이례적이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구본창의 분당 작업실은 전시 준비가 한창이다. 지난해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언커머셜: 한국 상업사진, 1984년 이후> 전시의 참여 작가와 기획자로 만나 수차례 방문한 그의 작업실은 한국 사진은 물론 한국 패션의 역사가 담긴 하나의 작은 박물관이었다. 1985년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화가 김점선의 작업실이 있던 경기도 구리에서 10년을 보내고 줄곧 이곳에서 작업을 해왔다. 조선 백자의 담백한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린 ‘백자’ 연작(2004~), 천마총에서 출토된 황금 유물을 담은 근작 ‘황금’ 연작이 벽과 바닥을 차지하고, 햇살이 비치는 유리문에는 나비 수집가가 모은 나비와 잠자리를 촬영한 필름이 바느질로 이어져 붙어 있다. ‘탈’ 연작의 출발을 짐작게 하는 조선 연희극 가면이 놓인 선반 한쪽에는 2002년 <보그>와 촬영한 가산오광대 화보 사진도 있다. 진귀한 유물과 하찮은 비누를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는 사진가는 묻히거나 잊힌 것들, 사라지거나 사그라드는 사물에 마음을 쓰는 천성 탓에 무엇 하나 허투루 버리지 못하고 이곳에 지난 기록을 모조리 쌓아두었다.
오는 12월 14일부터 내년 3월 10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에서 열리는 <구본창의 항해>에서는 작가의 그런 습벽이 빛을 발한다. 이번 전시는 국공립 미술관에서 이례적으로 개최되는 한국 사진가의 개인전이자 대규모 회고전으로 구본창의 작품과 그의 지나온 행보를 통해 한국 현대사진의 시작과 전개를 검토한다. 그가 기획자이자 작가로 참여한 <사진, 새 시좌(視座)>전(1988. 5. 18~6. 17, 워커힐미술관)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같은 ‘스트레이트 포토(Straight Photo)’가 주류를 이루던 한국 사진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메이킹 포토(Making Photo, 연출 사진)’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기록이라는 사진의 전통적 역할을 예술의 한 분야로 확장한 이 전시는 작품 표현뿐 아니라 전시 방식에서도 설치미술을 혼합한 획기적인 시도를 보여주며 한국 사진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그뿐 아니라 구본창은 패션 사진가로도 활약하며 1980년대부터 논노, 에스콰이아, 한섬 등의 의류 광고를 촬영했다. 그는 자신이 촬영한 거의 모든 광고 카탈로그와 영화 포스터, 음반 사진은 물론 한국 최초의 기성복 브랜드인 논노의 명동 사옥에 걸려 있던 광고 현수막 사진까지 어제 일처럼 깨끗하게 보관하고 있다. 아쉽게도 이번 전시에서 그의 패션 사진은 볼 수 없다. 하지만 섬유업을 하던 아버지와 얽힌 유년 시절의 기억과 사진 작업 초기 영감의 원천이 된 감각적인 외국 패션 잡지, 그리고 한복과 같은 복식의 재료가 그의 작업에 미친 영향은 고스란히 작품 속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인터뷰에 앞서 작가는 색색의 실이 묶인 종이와 철 지난 달력 그리고 오래된 LP 음반을 보여줬다. “너무 멋지지 않나요? 1974년 일본 염료 회사(Ciba Geigy)와 무역 회사(Ataka & Co. Ltd)의 달력을 모아둔 건데, 어린 시절 집에서 보며 동경하던 것들이에요. 이렇게 색이 퍼진 양모의 패턴 북도 아름다웠고, 사진이 멋있어서 좋아하던 음반도 여기 있어요.” 그 유명한 사이먼 앤 가펑클의 1968년 음반 표지 사진을 리처드 아베돈이 찍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될 것이다. 음반 뒷면에 선명하게 새겨진 리처드 아베돈의 이름을 보며 그가 말했다. “사진가의 이름은 몰랐어도 멋진 사진은 알아본 거죠.” 밥 딜런의 옛 음반 안에는 ‘아이 러브 뉴욕(I♥NY)’을 만든 그래픽 디자이너 밀튼 글레이저가 디자인한 그림 형태의 포스터가 부록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이 포스터의 그림을 따라 밥 딜런의 그것처럼 자신의 그림자를 촬영한 습작 사진도 이번 전시에서 공개한다. 중학생 때 촬영한 최초의 ‘자화상’(1968)을 포함한 작가의 자화상 연작은 구본창의 작품과 관련 자료를 포함한 600여 점이 전시되는 <구본창의 항해>의 주요 구성 중 하나다. 79일간 이어지는 전시는 그야말로 신대륙을 찾는 항해처럼 파란만장하던 그의 여정을 한자리에서 펼쳐 보인다. 그의 항해는 한국 현대사의 시작과 함께 ‘현대’라는 신세계에 도착한다. 멋진 사람들과 훌륭한 물건으로 가득한 오늘의 한국과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곳. 화려한 폭죽도 덧칠된 낭만도 없이 그저 조용한 ‘익명’의 시선으로 지나간 것들을 붙드는 구본창의 사진은 폭풍우가 걷힌 땅의 낯설고 아름다운 발견처럼 늘 새롭고 놀라운 자극에 중독된 우리에게 진정한 ‘새로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작업실 건물 현판과 작품 서명에 쓰인 ‘구본창’이라는 각인은 언제 만든 건가요?
독일 유학 중이던 1982년 잠시 귀국했을 때 청계천을 지나다 좌판의 상인들 틈에서 우연히 고무 도장 파는 분을 보았어요. 가나다 글자 조각을 사다 직접 조립했는데 그때부터 계속 쓰고 있네요. ‘언제 내 로고가 붙은 걸 사람들이 좋아하는 날이 있을까?’ 꿈꾸면서 이걸 만들었습니다.
그 꿈은 이미 이루셨죠. 국공립 미술관에서 한국 사진가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리는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제 삶의 큰 정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감사합니다. 그냥 흐지부지 떠날 수도 있었는데 적당한 때에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게 되어 복 받았다고 생각해요. 이것저것 작품을 꺼내다 보니 초기작만으로도 1층 전시장이 꽉 차서 ‘백자’ 연작부터 최근작이나 연극/무용 포스터는 2층으로 올라갔어요. 패션 사진도 자료가 꽤 많고 제가 굉장히 애정을 갖고 있어 다음에 꼭 보여줄 기회가 있었으면 해요.
1985년 2월 한국에 돌아왔을 때와 지금 한국 사진계를 비교해보면 어떤가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몇 배의 확장이죠. 그땐 활동하는 사진가의 수도 적었어요. 순수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모든 분야에서 수가 적었고, 매체도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죠.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1985년에는 사보조차도 없었으니까요.
언론기본법이 1987년에 폐지되고 ‘88 올림픽’ 전후로 광고 시장 개방과 함께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사진 전문 매체와 라이선스 잡지가 생겨났죠. 오늘날 한국 현대사진의 새 장으로 평가받는 <사진, 새 시좌(視座)>전도 그 무렵입니다.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나요?
한국에 들어온 후 2~3년 동안 너무 갈증이 난 거죠. 외국에서 제가 본 건 다양한 소재와 표현 방법이었는데, 우리는 매일 풍경 사진 아니면 틀에 박힌 사진밖에 보이는 게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오거나 아직 일본에 있던 젊은 사진가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하고 뭘 해보면 좋겠다 생각했죠. 엉뚱한 얘기지만 그때 제가 무용 사진도 찍고 하면서 인쇄소에 드나들었어요. 그러던 찰나에 워커힐미술관 카탈로그를 인쇄하는 과장님이 거기 와 계셨던 거예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금 추세는 사진이다” 하며 전시 고문을 맡고 있던 홍사중(b. 1931, 문화 평론가/ 전 <조선일보> <중앙일보> 논설위원) 선생님과의 연결을 부탁드렸죠. 워커힐은 당시 굉장히 중요한 미술관이었어요.
서울 광진구에 있는 그 워커힐 말씀이시죠?
맞아요. W호텔이 있는… 당시에는 루이즈 부르주아 같은 유명한 해외 작가 위주로 전시를 했는데 공간도 엄청 넓었어요. 다행히 기회를 얻어 열흘간 전시를 열었는데 사람들이 물밀듯 밀려와 미술관은 물론 저도 깜짝 놀랐어요. 지금도 워커힐이 멀지만 그땐 답십리 지나서 저 바깥이니 자가용 타는 부잣집 사람들 아니면 구경 오기도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학생들이 지방에서 버스 타고 올라오고 난리가 난 거죠. 그래서 연달아 사진전을 세 번 더 했어요.
사진 평론가 진동선의 기록에 따르면 <사진, 새 시좌(視座)>의 전시 서문을 육명심 작가가 썼어요. 신인, 원로 할 것 없이 한국 사진계 전체가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짐작되는데요.
전부는 아니었어요. 육명심 선생님은 그때 제가 수업한 서울예전의 교수이기도 해 글을 잘 써주셨지만 약간 거부감을 갖는 분들도 계셨죠. 왜냐하면 그해 졸업 전시에 출품한 학생들의 사진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거예요.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쪽으로 말입니다. ‘이게 무슨 사진이냐’ 하면서 그러한 반발로 <한국사진의 수평전>(1991, 1992, 1994)이라고 김승곤(b. 1940, 사진 평론가) 선생님과 젊은 사진가들이 합심해서 장흥 토탈미술관을 비롯, 세 군데서 전시회를 열었고요. 1996년에는 <사진은 사진이다>라는 전시가 기획되기도 했고요.
직접 사진전을 기획한 건 당시 그런 기획자가 없었기 때문이겠죠?
거의 없었죠. 김승곤 선생님이 이제 막 일본에서 사진 평론을 배우고 돌아왔을 때니까. 여기, 전시 전경 사진과 카탈로그를 한번 보시죠. 회화는 몰라도 관객이 이렇게 큰 대형 사진을 마주한 건 처음이었을 거예요. 설치 작업도 있고요. 사진 테크닉도 다양하게 보여줬죠. 필름을 살짝 태운다든지, 장 노출로 흔들리게 한다든지, 지금은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당시로서는 색다른 표현 방식이었고 내용 면에서도 작가의 개인적인 감성을 많이 드러낸 사진이었죠.
이번 <구본창의 항해>는 중학교 때 찍은 ‘자화상’을 포함한 초기 사진과 명화를 모사한 습작, 영감의 자료를 모은 ‘호기심의 방’으로 시작됩니다. 사진을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첫 자화상은 사진을 시작했다기보다 관심이 생겨 집에 있던 카메라로 기록한 거죠. 사진가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어떻게 이런 앵글로 셀프 포트레이트를 찍을 생각을 했나, 저도 참 신기합니다. 문득문득 그런 순간들이 있어요. 대학(연세대 경영학 전공) 때는 ‘화우회’라는 미술 동아리에서 들어가 미술책을 펴놓고 열심히 명화를 그렸고요. 실제로 사진을 하게 된 건 독일로 유학을 떠나고 난 후, 그러니까 1980년부터입니다.
1979년에 어쩌다 독일 유학을 가게 된 건가요? 관광 목적의 해외여행은 1983년에야 제한적인 자유화 조치가 이뤄져 50세 이상의 사람이 200만원의 예치금을 내고 3개월 내에 귀국하겠다는 서약서를 써야 가능했어요. 유학 자체가 쉽지 않았죠.
그땐 외국에 가려면 수출 회사에 들어가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이었어요. 그래서 대우실업에 들어갔는데 몇 달 다녀보니 이렇게 평생 살 수는 없겠더군요. 하고 싶던 미술은커녕 아침 8시 출근, 저녁 8시 퇴근. 아주 끔찍했어요. 말단 사원이 외국 지사로 파견을 나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이미 형이 미국 유학을 간 상태라 집안의 지원을 받기도 어려웠어요. 그런데 수소문을 해보니 독일이 학비가 싸고 가능성이 있어 보이더라고요. 마침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했기 때문에 독일 주재원을 뽑는 조그마한 회사로 이직을 해서 그렇게 떠난 거죠. 저에겐 함부르크 거리 쇼윈도의 물건들이며 잡지, 시각적인 자극이 굉장했어요. 처음엔 그래픽 쪽을 공부하다 그다음 해에 국립대학(함부르크 조형미술대학, 사진디자인 전공)에 입학한 거죠. 사진이 재미있었고 결과가 빨리 나오는 게 흥미롭기도 했어요.
유학 시절 제작한 ‘초기 유럽’(1979~1985) 연작의 도시 풍경 사진은 어떤 카메라를 썼나요?
그건 전부 니콘 카메라로 찍었습니다. 니콘 FM. 그 사진은 엽서로 만들어 팔기도 했죠.
한국에 돌아와 시작한 첫 작업은 무엇이었나요?
서울의 길거리를 컬러와 흑백으로 찍은 스냅사진(‘긴 오후의 미행’과 ‘열두 번의 한숨’ 연작)이에요. 답답한 내 심정을 기록한 건데 쉬지 않고 찍으면서 위로를 받은 거죠. 이걸 발표할 거라는 생각은 없었어요. 간결한 풍경을 찍던 독일과는 너무 다른 낯설고 엉뚱한 1980년대 한국의 모습이 키치하게 남아 있어요. 썰렁한 거리에 새로 생긴 현대식 건물과 한복을 입은 아주머니… 한국 상황과 나의 답답함을 찍는 동시에 셀프 포트레이트도 많이 찍었어요. 그게 발전해서 ‘태초에’(1991~2004)가 나온 거죠.
로댕갤러리에서 열린 <구본창 사진전>(2001. 5. 4~6. 24)을 통해 ‘태초에’가 유명해졌는데, 신체를 찍은 여러 장의 인화지를 실과 바늘을 이용해 이어 붙인 그 작업이 디자이너 이신우의 오리지날리 광고사진으로도 제작되었다는 걸 아는 이는 별로 없어요. 패션 사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맨 처음엔 안도일을 모델로 한 알렉시오 카탈로그(1987)였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논노를 찍게 됐어요. 어느 날 하용수 씨가 연락이 온 겁니다. 논노 사진을 의뢰한 김선옥 씨처럼 아마 잡지에 내 사진이 나온 걸 보았거나 ‘해외에서 온 누가 있다더라’ 소문을 듣고 연락해온 거겠죠.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여러 잡지에 내가 소개가 됐어요. <월간 디자인> <레이디경향> <라벨르>… (기사를 스크랩한 파일을 넘기며) 귀국하자마자 <월간 멋>에서 ‘1인자를 꿈꾼다’ 이렇게 나오기도 했군요. 참, 이게 1985년 기사인데 여기까지 왔네요.
패션에는 원래 관심이 있었나요?
아버지가 섬유업을 하셨으니 패브릭에 대한 관심은 옛날부터 있었죠. 지금도 골방 하나를 열면 배경으로 쓰기 위한 천이 한가득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 중에 섬유를 다룬 작가가 있었어요. ‘섬유로 이렇게 작품을 만들 수도 있구나’ 싶어 항상 관심 있게 봤죠. 독일에서 공부할 때도 패션을 전공한 학생들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서 무대 뒤, 아수라장 같은 비하인드 신을 포착한 재미있는 사진이 있고요. 나중에 보니 윌리엄 클라인 사진과 비슷하던데 그건 제가 먼저 찍었어요. 함부르크에 질 샌더 매장이 생겼을 땐 구경도 갔고. 패션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돈나(Donna)>, <몬도 우오모(Mondo Uomo)> 이런 패션 잡지 한 권씩 사 모으는 게 낙이었을 정도니 관심이 매우 많았다고 봐야죠. 한국에 와서 처음 패션 일을 할 때도 제 머릿속엔 그 이미지들이 남아 있었어요. 지금 봐도 아주 멋있잖아요?
독일에서의 경험이나 당시 일본과 서구의 선진 문화가 초기 사진 작업에 큰 영향을 주었음에도 구본창의 사진에는 늘 ‘한국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닙니다. 단지 조선 백자나 탈, 신라 금관이 사진 소재이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귀국 전, 평소 제가 좋아하던 독일 사진가 안드레 겔프케에게 제 포트폴리오를 평가받고 싶어 연락을 했어요.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무작정 뒤셀도르프까지 찾아간 거죠. “잘 찍었지만 넌 한국에서 왔는데, 이건 그냥 유럽인이 찍은 사진처럼 보인다. 한국 유학생으로서 너 자신을 표현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에겐 굉장한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그 전까지는 조형적으로 완벽히 아름다운 사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나 로버트 프랭크 같은 사진가를 흉내 내고 있었던 거죠. 내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걸 깨닫고 그때 탄생한 작업이 ‘1분간의 독백’이에요. 유학 시절의 경험을 사진 에세이처럼 연작으로 묶어 낸 건데, 이것 역시 이번 전시에서 공개합니다.
해외에서도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1985년 ‘일본의 하루(A Day in the Life of Japan)’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덕분에 국제적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죠. 전 세계에서 온 사진가 100명이 일본 전역을 다니며 정해진 단 하루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전시하고 책을 출간하는 행사였어요. 이 역시 안드레 겔프케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가 일본의 사진 에이전시 PPS(Pacific Press Service)와 일하던 친구를 소개해줬고, 그분이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PPS의 사장 로버트 킬슘바움(Robert Kirschenbaum)을 만나보라고 한 겁니다. 어차피 당시엔 직항이 없어 도쿄를 경유해야만 서울에 올 수 있었기 때문에 포트폴리오를 들고 갔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대표로 절 부른 거예요.
한국 작가는 단 한 명이었나요?
네. 국제적으로 그때 전 촌사람이나 다름없었죠.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이 신주쿠의 비싼 호텔에서 잠을 자고, 세계적인 작가들 틈에 끼어 있으려니 처음엔 주눅이 들었죠. 그런데 호텔 로비에서 다른 작가들이 각자의 슬라이드를 발표하는 걸 보니 자신감이 조금씩 생기더군요. 전 엑스포가 열리던 쓰쿠바를 찍었는데, 제 발표가 끝나고 난 후 반응이 좋았어요. 뉴욕에서 온 한 사진가는 “너 미국 오면 우리 다 굶겠다” 농담도 건넸고요. 한국에선 형이나 누나들에게 1만원, 2만원씩 돈 꾸러 다니며 절망 속에 살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용기를 얻었죠. 그 경험이 이후의 작품 활동에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해외에서 전시를 기획하는 데도 연습이 되었어요.
2000년 휴스턴에서 열린 미국 최초의 한국 현대사진전 <포토페스트(FotoFest)>의 공동 기획자로 본인을 포함한 한국 사진가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김아타, 이갑철, 이정진 등 한국 사진계의 주요 작가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더군요.
여파가 컸어요. 한국 사진에 대해 전혀 몰랐다가 이렇게 특별한 한국 작가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2009년에도 휴스턴 박물관과 함께 여러 한국 작가를 모아 사진 전시를 했어요. 제목이 <혼돈의 하모니(Chaotic Harmony)>예요. 샌타바버라에서 순회전을 하고 작품도 팔리면서 한국 작가들이 많이 알려지게 되었죠. 살다 보니 참, 인연이 그렇게 중요해요. 인연과 만남에 따라 조금씩 발전해온 것 같아요.
<보그>와의 인연도 깊죠. 2002년부터 <보그>를 통해 인상적인 패션 화보를 남겨왔습니다. 얼마 전에는 김완선 씨와 인터뷰를 하며 <애수> 음반 사진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어요.
아, 그 사진! 보랏빛이 감도는 그 음반 사진은 나도 무척 좋아해요. 그렇지 않아도 김완선 씨의 인스타그램을 보니 내가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더군요. 정말 순수한 얼굴이었어요. 언제 기회 되면 다시 보고 싶군요. <보그>는 언제든 불러주시면 내가 합니다.
작가의 작품과 전 생애를 총망라한 이번 전시는 최근작 ‘익명자’(1996~)까지 이어집니다. 빼앗기고 잊힌 유물이나 희미하고 사소한 사물을 ‘이름 없는 존재’로 볼 수 있을까요?
한국 문화, 우리 식민 문화의 역사에 대한 생각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혹은 익명자는 투명인간처럼 돌아다니며 관찰하는 저 자신일 수도 있겠죠. 피아니스트가 매일 연습을 하는 것처럼 저 역시 렌즈를 통해 끊임없이 대상을 바라보고 기록합니다. 그중 어떤 것은 작품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계속 찍어나가는 행위 자체입니다.
자화상에서 시작되어 익명자로 끝을 맺는군요.
요즘도 제가 즐기고 있는 스냅사진들이죠. 앞으로 남은 2~3주 동안 더 엮어보려고 합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제가 하고 있는 것, 아마도 이런 증명의 방이 전시의 마지막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군요. (VK)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이미혜
- 포토그래퍼
- 서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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