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착륙지점’은 어디인가?
연초이기 때문일까요. 다양한 작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그룹전이 유독 눈에 띕니다. 얼마 전 소개한 <송은미술대상전>이 미술계의 역량 있는 작가들을 발굴해 알리고 후원하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자리라면, 각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그룹전은 자신들과 함께 일하는(혹은 일하고 싶은) 작가들, 그중에서도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한눈에 망라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현실적으로 젊은 작가들은 탄탄한 경력을 가진 중견 작가에 비해 어디서든 개인전을 열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게 사실이니까요. 어쨌든 덕분에 저 같은 관객은 요즘 미술 시장에서 주목하는 젊은 작가들이 누구이며, 어떤 스타일의 작품이 인기인지를 일괄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게 됩니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러 갈 땐 마음도, 발걸음도 무척 가볍습니다. 어느 평일 오후, 안국역 근처 아라리오 갤러리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짐짓 설렌 건 이날 내린 함박눈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각기 다른 배경과 경력을 지닌 작가들의 작품을 하나로 묶어내는 건 <착륙지점>이라는 전시 제목입니다. 한참 활발하게 활동하는 혈기 왕성한 작가들이 어딘가에 ‘착륙’한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생각해보면 자신들의 작업 세계에 막 ‘착륙’해 한창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기도 하니 꽤 절묘한 단어죠. 또한 이번이 회화 작가만 모은 전시임을 고려한다면, 회화라는 매체 그리고 캔버스 자체가 한 사람의 작업 인생과 기법, 시선과 철학이 모두 점철된 ‘착륙지점’이라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노련함보다는 신선함이 이들의 ‘착륙지점’을 지배합니다.
총 4개 층에서는 보이지 않는 주제가 각 공간의 작품을 묶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거리의 조율: 경유하는 몸’, ‘감각의 발견: 내밀한 시선’, ‘인식의 방식: 확장된 시선’, ‘자아의 투영: 주관적 세계’ 등의 주제어는 결국 요즘 회화가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죠. 회화야말로 화가의 몸을 통해 발현되는 예술의 장인 동시에, 시선에 따라 너비와 깊이, 안팎의 정도가 달라지는 일종의 무한한 우주입니다. 예컨대 가장 밀접한 거리의 미지를 탐구하는 좌혜선, 보통의 시선으로 일상의 풍경을 실물 크기에 가깝도록 그리는 임노식, 재해로 무너진 세계 곳곳의 보도사진을 재료로 삼는 안경수, 바다와 땅의 경계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빙하의 유동성을 담은 엄유정, 도시와 자연, 그 중간 지대 풍경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는 코헤이 야마다, 신화적 자연의 생태계를 묘사하는 임수범 등이 자리합니다. 저마다의 시선으로, 시각으로, 태도로 우리가 발 붙인 세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회화 작가들은 현미경을 꺼내기도 하고, 망원경을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작품 속 세계는 극히 일부이기도, 전부이기도 하죠. 말 없는 그림 앞에서, 그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어떤 세계에서 잠시 쉬어 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연륜 있는 작가가 평생 일군 작업도 물론 의미 있지만, 자기 작업에 몰두하며 치열하게 고민하는 젊은 작가들의 힘찬 행보를 함께하는 것도 충분히 즐거움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림만 보고 있어도, 이들이 얼마나 큰 용기를 내고 있을지, 막다른 골목에서 어떤 어려움에 봉착해 있을지, 계속 그려나갈 힘을 어떻게 얻을지 기대가 됩니다. 나오는 길, 최근 어느 책에서 읽은 로만 오팔카의 말이 생각나더군요.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정직한 평가다.” 젊은 작가들이야말로, 매일매일 스스로를 누구보다 정직하게 평가함으로써 예술의 이상향에 한발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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