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라는 모험

머릿속에는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막상 그 책을 언제, 어떻게, 왜 읽은 거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영 곤란한 경우가 종종 있다. 어린 시절 읽은 세계 명작 시리즈가 대표적일 것이다. 한글을 채 떼기도 전에, 유치원이며 학교를 오가는 사이에, 제대로 각을 잡고 앉아서가 아니라 이불 속에 들어가 배를 깔고 누워서, 책장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놀며 뒹굴며 읽은 것인지 본 것인지 모를 동화책들이 떠오른다. 어린이 필독서라기에, 책장에 꽂혀 있으니까 읽고 봤을 뿐, 책의 의미 같은 건 스스로도 전혀 설명되지 않는 책. 어쩌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읽기와 보기의 경험을 안겨준 것일지도 모를 책. 그러한 명작 동화는 종종 애니메이션이나 실사 더빙판으로 TV에서 방영하곤 했는데, 그러면 나는 만사를 뒤로하고 TV 앞으로 달려가 한참을 넋 놓고 그 세계에 빠져 즐거워하곤 했다.
어릴 때 읽은 동화책을 훗날 다시 읽게 되거나 동화 작가의 다른 작품을 뒤늦게 접할 때면 생각지도 못하게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어른들이 읽어도 좋을 만큼 기품 있고 아름다운 이야기였다는 사실에 새삼스러워하기도 하며, 어른들만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끔찍하고 잔혹한 이야기가 거침없이 전개되기도 하니까. 창작의 언어와 그 세계란 무릇 나이로 경계를 나눌 수 없는 것일 텐데, 그것을 애써 구분하겠다고 달려드는 어른들의 옹졸함이 도리어 한계처럼 느껴지곤 한다. 선택한 단어나 묘사의 방식이야 다를 수 있겠으나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세상 이치와 인간 탐구의 정수란 동화든 아니든 그것이 무엇이든 크게 다르지 않음을 뒤늦게 깨닫곤 한다.

내 어린 시절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말괄량이 삐삐>의 작가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라는 것은 한참 뒤에 알았다. 그로부터 또 한참 뒤에서야 그녀의 장편 동화 <사자왕 형제의 모험>(1983, 창비)을 읽었다. 이 작품은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일격이었다. 그건 이 동화의 심부(深部) 때문인데 그중 하나는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병약한 동생 칼은 잘생기고 멋지며 무엇보다 용감한 형 요나탄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다. 삶의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데 좌절한 칼에게 요나탄은 죽음 뒤에도 아름답고 즐거운 세계가 있다고, 그곳의 이름은 ‘낭기열라’라고, 그곳에서 만나자고 다정히 말한다. 하지만 요나탄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동생을 구하다 세상을 떠나고, 동생보다 먼저 낭기열라로 가버린다. 슬픔을 가누지 못하던 칼 역시 곧이어 낭기열라에 이르고 형제는 기쁘게 재회한다. 이 모든 게 동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지는 일이다. 예비된 죽음의 그림자, 느닷없는 사고, 사후 세계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개는 과감하다 못해 잔혹하기도 하다. 하지만 말했듯이 이러한 급격한 전개는 동화의 초입에 불과하며, 그 뒤부터는 본격적인 판타지 모험극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것으로만 가득할 줄 알았던 낭기열라, 하지만 그곳은 사람들의 자유를 위협하는 독재자, 악당, 괴물의 존재로 위태롭다. 요나탄은 자신이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위험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런 바람을 이루기 위해 일종의 반군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오르바르를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서기로 마음먹는다. 칼은 형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주어진 조건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은가, 위협적인 상황을 못 본 척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어쩌자고 고난의 길을 자처하는가.’ ‘아무리 위험해도 반드시 해내야 되는 일이 있다’(85쪽)는 게 요나탄의 입장이다. “어째서 그래?” 칼이 묻는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지.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와 다를 게 없으니까.”(86쪽) 요나탄의 대답. 이것은 시종 변치 않으며 이것이야말로 요나탄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는 요나탄의 말은 일종의 소명과도 같은 것일까. 그것은 인간다움을 잃지 않겠다는 저항의 의지, 최소한의 태도, 하지만 가장 큰 힘을 지닌 울림의 말이다.
그리고 이 동화의 끝에서 우리는 또 한 번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사악한 무리와의 기나긴 대결 끝에 형제는 얼마간의 승리와 성취를 거둔다. 하지만 칼은 마냥 기쁘지 않다. 다행스럽게 사랑하는 소피아 아주머니를 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마을의 배신자 요시가 강물에 빠져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목격한다.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린 자는 참을 수 없지만 누군가의 죽음은 언제나 슬프다는 것을 칼은 잘 알고 있다. 요나탄도 마찬가지다. 악의 무리에 맞서고 있지만 그에게는 하나의 대원칙이 있다. “하지만 나는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아무튼 목숨을 빼앗는 것만은 못하겠어요.”(294쪽) 자신이 위험에 처하더라도, 갈등이 계속되더라도,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몰면서 자신이 살 수는 없다고, 그것으로 갈등이 끝나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두 형제, 나아가 이 동화가 품고 있는 휴머니티일 것이다.

이 동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형제에게 찾아올 비극을 또 한 번 유예하더니 또 다른 사후 세계인 ‘낭길리마’로 이들을 데려간다. 형제는 죽음과 영원한 이별 대신 함께 또 다른 죽음의 세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동화라는 틀거리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이토록 전위적인 이야기를 본 적 있던가. 사랑과 용기의 힘으로, 선과 악, 현실과 판타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이야기 자체의 힘으로 끝없이 밀어붙이는 동화를 만난 적이 있던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열어준 유례 없이 새로운 길이 아닐 수 없다. 너무도 과감하고 신선해 혀를 내두르게 되는 놀라운 모험극이 아닐 수 없다. 잊고 있던 동화, 환상으로 빚은 동심을 가만히 들춰보면 어떨까. 무시무시하고 생생하며 치열하고 치밀한 이야기가 꿈틀대고 새록새록 피어나고 있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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