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남결’로 보는 복수의 윤리
<내 남편과 결혼해줘>(이하 <내남결>)는 이 시대 한국 드라마의 성공 법칙을 총망라한 놀라운 드라마다. 회귀 판타지, 재벌, 치정, 살인, 복수, 커리어 우먼 연대기, 화려한 서울의 풍경이 모두 담겼다. 또 숏폼 홍보에 최적화된 짧고 자극적인 에피소드가 회차마다 여러 개 쏟아진다. 이런 바이럴에 이끌려 본편을 보면 전개가 느리게 느껴지기 십상인데 <내남결>은 워낙 자극의 밀도가 높고 흐름이 빨라서 여전히 쾌감의 질주를 만끽할 수 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드라마가 현실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악당들을 분석하고 캐리커처화하는 방식이다. 유해하다 못해 병리적이기까지 한 캐릭터들이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벌이는 전술을 지켜보는 건 <내남결>이 주는 큰 재미 중 하나다.
<내남결>의 메인 악당 정수민(송하윤)은 최근 몇 년간의 정신의학 및 범죄 용어 대중화 흐름에서 가장 인기를 끈 ‘가스라이팅’과 ‘그루밍’이라는 개념의 총체적 요약 같은 캐릭터다. 수민은 중학생 때부터 정서적으로 취약한 동급생 강지원(박민영)에게 접근해 친구 행세를 하며 그루밍을 해왔다. 그는 지원의 의존성, 보호 본능, 죄책감을 그때그때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지원의 사회적 평판을 망치고 자존감을 깎아내림으로써 지원을 고립시키고, 그 결과 지원이 자신에게 더욱 의존하도록 만든다. 지원이 사소하게 자신을 거역할 때는 실수인 척 음식물 퍼붓기, 게임의 일부인 척 폭력 행사하기 등 잘잘못을 따지기 어려운 응징으로 권력의 차이를 과시한다. 마침내 지원이 완강하게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려 하자 수민은 구구절절한 사죄문을 쓰거나 자살 시도를 하거나 드라마틱하게 무너져 내리는 시늉을 함으로써 상대의 연민과 죄책감을 자극한다. 지원이 절교를 선언하자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내가 나빠?”라고 말하는 수민은 중범죄를 저질러놓고 피해자를 탓하는 사이코패스 악당을 연상시킨다. 그 대사를 사용한 방식과 타이밍이 절묘해서 감탄이 나온다.
문제의 ‘남편’ 박민환(이이경) 역시 지원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거나 그루밍함으로써 그에게 지배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지원이 그 통제를 벗어나려 할 때는 폭력성을 표출하고 공포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수민과 결이 다르다. 수민과 민환의 대비를 통해 여성과 남성 심리 조종자의 일반적 특징과 차이가 드러난다. 지원과의 관계에서 포식자였던 수민과 민환이 결혼을 하면서 서로 통제력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모습도 흥미진진하다. 수민은 한국형 인셀 김 과장(김중희)에게 구사하던 애교, 칭찬, 성적 유혹, 희망 고문 전술이 난봉꾼 민환에게 통하지 않자 ‘책임질 필요 없는 쿨한 상대’라는 착각을 심어주려고 노력한다(“나는 말 안 해요”). 민환은 이 덫에도 걸려들지 않는다. 민환이 자신의 재정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민의 결핍(가족)을 건드리고 자기가 원하는 시점에 결혼했으니 이 게임은 일단 민환의 승리로 보인다. 하지만 수민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민환이 어머니에게 야단맞을 때 보호해주거나 노골적으로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등 새로운 전술을 구사한다.
이 심리 조종자들에게 맞서는 주인공 강지원의 태도에서도 흥미로운 포인트가 자주 발견된다. 회사 야유회에서 수민에게 절교를 선언한 지원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분명 자신이 잘한 게 맞는데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인생 2회 차 동지 유지혁(나인우)에게 눈물로 호소한다. 평범한 시청자들은 그 이유를 알 것이다. 비록 악당이라 해도 상대가 슬프거나 아프거나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 연민이 드는 게 보통 인간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복수가 어려운 거고, 그런 마음이 없으니까 악당이 악당인 것이다. 인과응보를 통쾌해하지만 응징의 책임이 본인에게 있을 때는 그것이 충분히 정의롭고 공정한지 자문하고 주저하는 게 보통 인간이고,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이런 심리와 당위를 놀랍도록 잘 그려낸 콘텐츠가 영화 <배심원들>이다. <배심원들>은 사법부의 판결이 왜 자주 인터넷 여론보다 경미한지, 단죄자의 책임감이라는 면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내남결> 시청자들도 배심원 입장에서 단죄의 무게를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예컨대 패션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수민이 조악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우중충한 예식장에 들어설 때 복수의 전의를 상실할 정도로 연민을 느낄 것이다. 송하윤의 뛰어난 연기와 짖궂은 연출의 합작으로 엄청난 대리 수치심이 드는 장면이다. 전생에서 수민이 지원에게 저지른 짓을 애써 떠올리지 않으면 ‘뭘 저렇게까지’라는 마음을 달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지원의 대사로도 설명되듯 (감사하게도!) 이 드라마의 악당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쁜 짓을 해서 복수극의 동력을 제공해준다.
이제 4회를 남긴 드라마는 최종 빌런 오유라(보아)가 등장하면서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그 밖에도 수민의 동기, 회귀 법칙 찾기, 발전 단계의 서브 커플 등 회수할 ‘떡밥’이 많아서 한국 TV 드라마의 고질병인 뒷심 부족은 우려되지 않는다. 당신의 소중한 설 연휴를 믿고 맡겨도 될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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