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수연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 전시의 기획자
〈보그 코리아〉는 1996년 창간 이래 동시대 여성을 지지하고 찬양하며 그들과 함께 걸어왔다. 3월 28일부터 30일까지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VOGUE LEADERS: 2024 WOMAN NOW)’라는 행사를 개최하며 그 역사를 이어간다. 2024년 그 첫 번째 주제는 ‘WOMAN NOW’로, 전통적인 한옥에서 우리가 신뢰하는 여성들이 연사로 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주목받는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특히 이번 전시는 1930년대생부터 1980년대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작가들이 조각, 회화, 사진, 설치미술, 가구공예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참여한다. 이들이 만든 작품, 작가들의 삶에 동지애를 느끼고, 삶의 방향성에 힌트를 얻길 꿈꾼다. 전시작 중 일부만 지면에 담았다. 전시 기획자인 독립 큐레이터 전수연과 참여 작가 윤석남, 차승언, 표영실, 정희승, 황수연, 한상아, 소목장세미, 전현선, 구정아가 〈보그〉 페이지를 빌려 연대의 말을 건넨다.
전수연은 지난 15년간 각종 비엔날레와 아트 페어, 굴지의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의 전시 기획자로 참여해, 동시대 여성을 지지하고 싶은 〈보그〉의 비전에 공감하며 준비에 돌입했다. 당대 대표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그들이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의 전시 취지에 공감한 것보다는 전수연의 기획력과 꾸준함이라는 덕목에 기인한다.
주변에서 어떻게 이들 작가들을 한자리에 모았는지 놀라더군요.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표인 윤석남 작가부터 2024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단독 작가로 선정된 구정아, 직조 회화로서 회화 형식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해온 차승언 등 일일이 언급하기 벅찰 정도의 면면입니다.
작가들이 이번 행사의 취지를 좋아했어요. 국제 여성의 날이 있는 3월에 열리는 동시대 여성, 사람들을 위한 전시라는 점에 매료됐죠. 단체전에서 작가들이 중시하는 것 중 하나가 어떤 작가와 함께하는지, 어느 공간에서 작품을 선보이는지입니다. 덕분에 연락할 때도 이런 작가가 참여하니 함께해보자는 이야기를 꺼냈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낚인 거죠.(웃음) 어느 작가는 이들이 진짜 다 함께하는 거 맞는지 되묻기도 했죠. 중요한 개인전이나 해외 일정도 있을 텐데 다들 일정을 조율해줬습니다.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에 이들 작가들과 함께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시를 보며 감동받은 작가들이라 언젠가는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는 국제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면도 있지만 성 평등을 외치기보다는, 어떤 여성이든 공감대와 배울 점이 있다는 것에 착안해 작가를 찾았어요. 그래서 작품도 해당 작가의 고민과 삶이 담겼기를 바랐죠. 사실 ‘여성’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지 않더라도 그 작업 안에는 한 개인의 입장이 녹아 있을 수밖에 없어요. 남성 작가도 마찬가지죠. 남성으로서 한국 사회에서의 경험이 당연히 작업에 스며들죠. 우리 역시 여자로서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겪어냈고 그 결과물이 내재돼 있어요. 그렇기에 성 평등이나 여성 인권을 직접적으로 논하지 않더라도, 내 어머니와 친구들의 삶 그리고 이들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무언가 느껴질 거라 믿어요.
참여 작가를 예로 들어 설명해주세요.
흔히 현대미술 작가들이 캔버스를 종이, 내 이미지를 그려야 할 부분으로 여기지만 차승언 작가는 다르죠. 씨실과 날실을 짜는 베틀로 캔버스를 만드는 것부터 작품의 시작이에요. 이 베틀을 짜는 행위가 여성이 담당해온 대표 가사 노동의 하나죠. 이것이 여성적인 행위라고 보지 않지만, 여성과 노동, 삶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윤석남 작가는 한국 여성주의 미술을 대표해요. 1939년생인 작가는 어릴 적부터 미술을 좋아했지만 가정 형편이나 사회 분위기 때문에 미대에 갈 수 없었어요. 아이를 낳아 기르다 40대가 돼서 예술을 시작했어요. 그때가 1980년대였는데 미술계는 남성 작가 중심이었죠. 당시 윤석남 작가에 관한 기사가 나면 수식어가 ‘주부 작가’였어요. 미술 전공자도 아닌 40대 애 엄마가 미술을 한다면서 알게 모르게 폄하했죠. 그런 삶 속에서도 작가는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꾸준히 해왔어요. 대놓고 여권신장을 외치지 않더라도 조용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죠. 윤석남 작가처럼 그런 실천이 작업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예가 많아요. 대놓고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화하지 않더라도 나와 주변을 관찰하고, 자기 삶을 열심히 탐구하고 고민해온 모습을 관람객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보그>에 보내온 전시 기획서는 “매일 밤 최승자의 시를 떠올린 날이 있었다”로 시작해요. ‘일찍이 나는’이라는 시구절 ‘영원한 루머’를 가제로 잡았고요.
힘들 때면 이 시를 생각했어요. 시를 읽으면 언뜻 절망적이에요.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마른 빵에 핀 곰팡이와 지린 오줌 자국,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는” 등 자신을 폄하하는 문장처럼 보이지만 화자는 오히려 굉장히 살고 싶었던 것 같았어요. 저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종종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이 자리에 있는 게 맞을까? 당장 내가 없어져도 아무 일도 없겠지?’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누구나 있죠. 성별을 떠나 나의 쓸모에 자괴감이 드는 그런 고민을 하면서 내가 정말 쓸모 있고 싶어 한다는 걸 역으로 느꼈어요. 내 역량을 발휘하고 싶어서 나를 괴롭히는 중이구나. 시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로 끝맺죠. 영원한 루머가 뭘까, 최승자 시인을 찾아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했어요. 루머는 실체가 없는 뜬소문이잖아요.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영원한 루머처럼 육신이 사라져도 누군가의 글이나 이야기로 계속 기억에 남길 바랐는지. 저는 후자 같아요. 지금 전시하는 작가들도, 작품도, 또 관람하는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관람객이 작가들의 삶과 작품에 공감할 거라 믿어요. 이 사회에서 자기 예술을 펼쳐가는 작가들을 보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고요.
기획자로서 가장 순수한 의도는 이 작가가 매력적으로 다가가고, 왜 이걸 했을까 궁금해지고 이해받았으면 좋겠죠. 이는 밑바탕에 깔린 제 생각이고, 이번 전시가 어떻게 보이면 좋을지 가늠해봤어요. ‘나’가 가장 중요하잖아요.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엇으로 나를 증명할 수 있지? 삶의 방향을 어디로 정해야 할까? 누군가는 일을 하면서 답을 구할 수 있죠. 어떤 이는 윤석남 작가처럼 개인사로 시작해 다른 여성을 대변하는 일을 해가면서 자신을 증명할 수도 있고요. 정희승 작가의 이미지는 언뜻 보면 파편적이에요. 인물도 있고 사물과 풍경도 나오고요. 이 작가는 왜 이렇게 중구난방의 이미지를 찍었을까 싶지만, 작가가 자신을 보기 위해 주변 것들을 찍은 거예요. 흔히 자신을 소개할 때 소속된 공동체와 역할을 말하잖아요. 누구의 딸, 어느 학교의 학생, 어느 회사의 직원 같은. 정희승 작가는 ‘내가 누군가’에 대한 질문을 촬영한 주변 것들로 보여주죠. 나는 나오지 않지만 주변이 나옴으로써 그 안에서 내가 비치잖아요. 이 작가는 왜 이 작업을 평생 해왔을까, 왜 저 행위에 집착할까 파고들면 결국 자신을 증명하는 거였어요. 이 매체에 평생 기운을 쏟아서, 나를 찾아가는 거죠. 어쩌면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나를 보는 방법을 발견하거나, 삶의 방향성에 대한 힌트를 얻을지도 몰라요. 작가와 작품 그리고 <보그> 아카이브가 그 길을 열어주는 동화이길 바랍니다.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에서 사흘 연속 열리는 연사들의 강연도 그런 의미가 있어요.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청중과 공감하고 에너지를 주겠죠. 나만 힘들지 않구나, 나도 가능하구나 같은. 처음에 연사들은 나서길 부담스러워했어요. “어떤 얘길 해야 하나요?”라면서요. 우린 그저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어요. 그것이 가장 멋진 주제라고요.
참석하는 연사들 면면이 멋지잖아요. 그들과 한 공간에 앉아 연대하는 것 자체가 낭만이죠.
기획자로서 언젠간 해보고 싶은 꿈의 전시가 있을까요?
전시마다 결과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과정이 즐거웠으면 해요. <보그>와 함께하는 이번 전시도 그랬죠. 우리 모두 즐겁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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