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조각가 1세대, 김윤신의 삶과 예술
한국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으며 살아남은 여성 조각가 1세대. 지구 반대편 이국에서 지난 40년 동안 예술적 삶을 꾸려온 미술가. 오직 작업을 향한 벅찬 열정을 여전히 겸허하게 다듬고 있는 구순의 작가. 우리에게는 김윤신이라는 예술가가 있다.
강원도 양구에 마련된 임시 작업장, 작업복을 갖춰 입은 김윤신 작가가 전기톱을 들고 나무를 잘라낸다. 장정 두 명이 양쪽에서 들어야 할 만한 기다란 나무가 금세 두 동강 난다. 맹렬하게 굉음을 내는 전기톱을 갖다 대어 순식간에 나무에 선을 만들어 긋는다. 수십 년 손에 익은 듯한 끌과 망치로 나무를 살살 다듬자 토막 일부가 툭 떨어져 나가면서 그 속살이 드러나고 없던 면이 생겨난다. 그 와중에도 작가는 작업을 쉼 없이 해왔기 때문인지 전기톱이 손처럼 익숙하다, 곧은 나무보다는 다소 굴곡 있는 나무가 더 좋다, 저 나무가 탐난다는 등의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 영상 촬영이 끝났는데도 작업을 멈추지 않던 그녀는 몇 번의 재촉 끝에야 면장갑으로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낸다. “나는 나이 상관없이 그냥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주변에서, 그 나이에 일을 하다니, 저렇게 무거운 톱을 들다니, 그래요. 거기서는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똑같이 일하거든요. 새삼 내가 나이를 이렇게 먹었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나는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일하면서 살고 싶어요. 열심히 작업하다가 딱 가는 거, 그게 내 소원이에요.”
1935년생, 구순을 바라보는 예술가 김윤신은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지만, 예술가의 나이는 그들 스스로가 치열하게 일구어온 혁신적 삶의 이정표가 된다. 이를테면 93세에 프랑스 디종의 르 콩소르시움에서 전시를 예정한 이사벨라 두크로트(Isabella Ducrot)나 97세에 미국 헌팅턴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98세의 흑인 작가 베티 사르(Betye Saar) 등은 여전히 왕성히 활동하며 미술사를 새로 쓰고 있다. 101세에도 붓을 들었던 쿠바 미니멀리즘의 거장 카르멘 에레라(Carmen Herrera), 80세 넘어 그림을 시작한 호주 원주민 예술가 샐리 가보리(Sally Gabori) 등은 이미 작고했으나 여전히 회자된다. 역사에 길이 남은 여성 노장 예술가의 공통점이라면 이들의 작품이 예술적 성취 이면에 오로지 예술가로 살고자 분투했던 삶을 필연적으로 품고 있다는 것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여성이자 예술가 그리고 여성 예술가였던 이들의 삶과 예술을 분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김윤신과 대화를 나눌 때, 이 작가가 시장과 담론으로 첨예한 현대미술계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오히려 내가 오래도록 순수하게 신봉해온 동시에 스스로의 환상이 만들어낸 신화가 아닐까 종종 의심해온 예술가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작가구나 싶다. 그동안 나는 예술가란 모든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을 극복하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사람이라 믿었고, “예술은 삶이고, 삶은 예술”이라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하지만 김윤신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만큼 이 문장에 완벽히 부합하는 이를 그간 만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예술가의 사전적 의미를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삶으로 삼는 사람’으로 바꾸어놓은 예술가. 김윤신과 그녀의 오랜 제자이자 수양딸인 김란 관장(전(前) 김윤신 미술관)은 지난 40년 동안 머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 서울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갤러리로 걸음했다.
돌아올 결심
“한국에 돌아올 계획은 없었어요. 아르헨티나에서 작업하며 살다가 때가 되면 떠나겠다 했고, 그래서 멋진 공동묘지에 한 자리 예약도 해두었어요.” 2023년 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이 생각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번 한국행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일 수 있겠다 하고 왔는데, 놀랄 만큼 많은 분이 와주신 거예요. 한국에서도 내 작품에 이렇게 관심 가져주시는구나 싶어 기분이 나쁘지 않았어요.” <더하고 나누며, 하나>라는 이 개인전은 지난해 단연 ‘한국 미술계의 발견’이라 할 만했다. 우리에게 김윤신이라는 작가가 있음을 알게 된 건 관람객만이 아니었다. 이 전시는 국제갤러리, 리만머핀 갤러리와 인연을 맺는 또 다른 기회로 연결되었다. 그 사이에 베니스 비엔날레의 메인 무대인 본 전시에 참가해달라는 초청도 받았다. “한국에서 더 열심히 일해보라는 신의 뜻인가 했지요.” 김란 관장에 따르면, 아르헨티나는 미술 작품이 들고 나는 데 매우 엄격하고 까다롭다. 즉 돌아오겠다는 결심은 앞으로 작업 및 전시 활동을 더 활발하게 꾸려가겠다는 작가 의지의 발현인 셈이다. 40년 묵은 짐과 1,000여 점의 작품을 한국행 배에 실어 보내는 데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행히 배는 며칠 전 항구를 떠났다고 했다.
한국에 아예 돌아올 작정이었던 김윤신은 그러나 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돌연 마음을 바꾸었다. 지난 40년간 삶의 터전이었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무작정 떠날 수는 없었다. 현지에서도 꾸준히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사비로 짓고 운영한 김윤신 미술관은 정리하되, 집과 작업실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한동안 작가는 1년에 4개월 정도는 아르헨티나에서, 나머지는 한국에서 지내며 본격적인 노마드 예술가로 살아볼 작정이다. 한국의 번다한 일정과는 달리 그곳에서의 삶은 꽤 평온했다. “나는 더운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작업을 해요. 쉬어도 작업장에서 쉬지요.” 김란 관장은 “뜨거운 여름, 남자 러닝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 차림으로 작업하는 게 작가님의 진짜 모습”이라며 웃는다. 동네 아이들은 그녀를 ‘왕할머니’ 내지는 ‘조각 할머니’라 불렀는데, 이 조각 할머니는 어린이뿐 아니라 그곳의 다양한 동식물을 보살피는 데도 능수능란했다.
돌연 한국행을 선택하고, 그럼에도 지구 반대편의 작업실을 남기기로 한 결정은 그 결과의 무게에 비하면 꽤 즉흥적이지만, 한국을 떠날 때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1983년 말, 당시 상명여대 조소과 교수였던 48세의 김윤신은 조카가 살던 아르헨티나에 초청받았다. “가보니까, 하늘과 땅이 붙어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거예요. 끝도 없이 넓은 뜰에 농작물이 자라고, 한쪽에는 소 떼, 양 떼, 말 무리가 노닐었어요. 특히 나무가 좋았어요. 아름드리나무가 여기저기 서 있었지요. 너무 부럽더라고요.” 이곳에서 전시를 해보고 싶은 마음에 무턱대고 대사관을 찾아갔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현대미술관을 소개받았다. 작품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김윤신은 현지에서 구입한 전기톱을 난생처음 써가며 동네에서 주운 나무로 두 달 동안 두 점의 작업을 완성했다. 관장은 “나무껍질을 남긴 채로 속살을 드러내며 공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목조각은 처음 봤다”며 기뻐했다. 방학은 이미 끝났지만, 떠날 수가 없었다. 속전속결로 예정된 1년 후의 미술관 전시를 준비해야 했다. 우편으로 학교에 사직서를 보낸 김윤신은 그 후 40년을 아르헨티나인으로 살았다.
“선택을 해야 했죠. 낯선 이국땅에서 예술가로 살 건가, 고국에서 편안하게 교수로 지낼 건가. 아니다, 그래도 나는 예술가로 남을 것이다 했죠. 한국에서는 전시해준다는 미술관도 없었고 누가 나를 인정해주지도 않았는데, 그 나라에서 기회를 준 거니까요. 여기저기서 초청받은 전시가 이미 3년 치 밀려 있었어요.” 미니스커트에 부츠를 신고 강단에 섰던 ‘신여성’ 김윤신은 1960년대에 파리 유학을 다녀왔고, “프랑스와는 달리 활동을 못하는 한국 여성 예술가들이 아까워” 한국여류조각가회를 앞장서 창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어떻게, 얼마나 활발히 활동했든, 당시 한국은 여성에게도, 여성 예술가에게도 녹록지 않은 곳이었을 것이다. 밤을 꼴딱 새우며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는 ‘천국’을 떠날 재간도,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돌아온 김윤신이 말한다. “내가 그 사람들을 닮아가더라고요. 급할 거 없이, 하고 싶은 대로 작업을 한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은 끝까지 이방인이군요.(웃음)”
좋은 재료를 찾아서
김윤신을 매료해 정착시킨 이국의 나무들은 곧 대표작으로 거듭났다. 남서울미술관 전시장에서도 원목 나무조각이 대지처럼 넘실거리며 장관을 이루었다. 절단되고 깎여 제 모양을 갖춘 나무들은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방사형의 사선을 내뿜는 그리는 조각, 동글동글한 형태가 탑을 쌓은 조각, 껍질이 붙은 채로 속살을 드러낸 조각, 하늘을 향해 팔 벌리고 선 조각 등은 모두 형태와 색, 구도의 삼위일체를 이루며 각자의 자리에서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냈다. 자연의 일부를 옮겨온 무기교의 조각, 거칠고 투박하며 단단한 나무에 내재된 토속성과 원시성은 예술의 추상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를 능가한다. “김윤신은 한국인이기도 하면서 아르헨티나인이기에, 그녀의 작품에는 섬세하게 정돈된 수천 년 역사의 동양적 사고와 남미대륙의 강인한 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김윤신을 가장 먼저 알아본 후 절친이 된 전(前)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현대미술관장 로베르토 델 비야노(Roberto del Villano)는 이렇게 썼다.
“나무를 자르다 보면 그 안에 뼈가 있고 혈관이 있고 생명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썩은 게 아니라면 잘라놔도 호흡을 하죠. 특히 나는 알가로보(Algarrobo)라는 나무를 좋아해요. 단단하고 묵직하고 구수하죠. 알가로보는 자갈이 많은 단단한 땅에서 자라는데, 가지가 위에서 넓게 쫙 퍼져요. 그 나무 아래에서 옛날 원주민이 살았대요. 열매의 기름을 짜서 먹기도 하고, 이파리도 먹고 하면서. 또 바티칸에서는 알가로보로 만든 상자에 새로 신부가 되는 분들의 손톱, 발톱, 머리카락을 넣어 보관하는 의식을 치르는데, 그러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해요. 그만큼 생명력 있는 나무죠. 작품도 작품이지만, 재료 자체가 자연 그대로 살아 있어야 해요.”
김윤신은 “새로운 재료가 있는 곳이라면 거침없이, 배가 고파도 망설이지 않고” 달려갔다. “조각은 산꼭대기에서 내던져도 깨지지 않는 게 원칙이니, 좋은 재료로 튼튼하게 작업하라”는 대학 시절 스승의 가르침도 한몫했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는 멕시코 테칼리라는 마을에서 오닉스 작업에 매진했다. 멀건 밀가루 부침개에 매운 고추를 싼 타코, 선인장 죽, 마당에 난 풀을 구워 먹으며 1년 중 몇 달을 보냈다. 한편 2001년부터 1~2년을 지낸 브라질의 솔레다데는 차로 6시간을 달려야 당도할 수 있는 산꼭대기의 작은 마을이었다. “손에 잡힐 듯 구름이 가까이 있는” 이곳 고지대에서 준보석을 활용한 작업에 또 수개월을 보냈다. 엄청난 강도의 광물을 다루기 위해서는 도구의 종류도, 쓰는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작업은 고행이라 해도 좋을 만큼 지난했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돌을 잘라낼 때마다 김윤신은 어려움을 감수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목격하지 못했을 풍경, 지구의 시간과 우주의 질서를 응축한 환상적인 돌의 내부를 선물처럼 마주할 수 있었다. 거친 표면과 찬연한 내면이 대비되는 돌조각은 우리가 평소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비경을 품고 있다.
전통 조각에서 신성한 힘이 느껴진다면, 그건 오롯이 재료에 집중하는 조각가의 몸 그리고 그의 노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김윤신의 조각하는 몸 역시 노동하는 몸이다. 여기에 더해, 그녀에게 조각이란 온 정성을 다해 재료의 본성을 입체적으로 되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자연과 닮은 나무와 돌은 가장 아름답고 강인한 재료지만, 그렇기에 더한 헌신과 수행을 요구했다. “혼자 작업하다 보면 힘들 때가 많아요. 통나무를 이쪽저쪽으로 눕히면서 잘랐는데, 이걸 세울 수가 없는 거야. 변해가는 형태를 보면서 작업해야 하는데. 그래서 작업장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다가 지나는 사람에게 부탁하죠. 좀 도와달라고. 작업할 때면 기도가 절로 나와요. 하느님, 당신은 아시죠?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몰라.(웃음)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남미에 왔으니 이곳만의 재료를 가지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하자, 그 마음밖에 없었거든요.”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지금도 김윤신은 별도의 스케치 혹은 구상 작업을 하지 않는다. 며칠이고 그저 재료를 바라볼 뿐이다. 요컨대 무겁고 큰 통나무를 보고 또 보면서, 나무의 존재와 성질을 탐구한다. 생김새, 껍질과 속살의 차이, 나무의 결, 속에서 진동하는 소리나 향기까지 느껴본다. 그러고는 어느 순간, 느낌과 정신이 하나가 되었을 때 톱을 들어 작업을 해나간다. 이렇게 재료와 내가 하나가 되고(合), 하나가 되기 위해 나무를 절단해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分). 이 명료한 개념의 중심에는 동양철학, 음양 사상의 원천이자 세상의 근본인 ‘합’과 ‘분’의 원리가 있다. 1970년대 중반 김윤신은 작업 원리를 내포하는 철학이자 일종의 시각적 조형 언어인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을 고안했고, 모든 조각의 공통 제목으로 삼았다. ‘서로 다른 둘이 만나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가 되고, 그 합이 다시 둘로 나뉘어 각각 또 다른 하나가 된다’는 의미의 이 연작은 나무에 자신의 정신을 더하고 공간을 나눠가며 온전한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는 조각의 과정 자체를 상징한다. “그래서 예술이라는 건 작가가 직접 해야 한다고 봐요. 한 번도 누구의 손을 거쳐본 적이 없어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하는 거예요. 그렇게 새롭게 생겨난 분(分)을 나 혼자 보는 게 아니에요. 내가 만들어놓으면 만인이 자유롭게 보고 느끼고 감상하고 헤아릴 수 있어요. 그게 진정한 분(分)이에요. 그래서 내 작품은 우주적이다, 감히 그렇게 얘기해요. 수축도 되고, 팽창도 되고, 또는 그것이 공간을 끌어당기면서 또 내가 느끼는 것. 우주 만물이 그렇거든요.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들이 또 하나의 형태로 생명을 잉태하는 거니까. 그처럼 내 작품도 하나의 생명을 갖고 태어난다고 여겨요. 당연히 생명력을 가진 재료를 좋아할 수밖에 없지요.”
옥편을 찾아보며 만든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라는 확고한 문장으로 작업 세계가 수렴되기 전에도, 당연히 김윤신의 조각은 존재했다. 1950년대 후반 홍익대 조소과 졸업 이후에는 줄곧 철조각을 시도했고, 1960년대 유학 시절에는 3차원 조각을 2차원의 평면으로 해석하는 판화를 배웠다. 1970년대 초·중반에는 한국 나무를 쌓아 올린 형상의 ‘기원쌓기’ 연작을 선보였는데, 남서울미술관 전시 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기원쌓기’는 우주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인간 본연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민간신앙으로서의 장승이나 돌 쌓기 풍습 등 한국의 토테미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80년대에 아르헨티나에서 몰두한 원목 조각 작업은 1990년대에 이르러 초월적 존재에 닿고자 하는 종교적 염원을 담은 수직 형태의 조각, 팔을 벌리고 축복을 비는 듯한 T자 형상의 조각 등으로 이어졌다.
“우리 집은 딸 다섯에 아들이 하나였어요. 오빠가 식민 시대에 독립운동을 해서 생사를 몰랐어요. 그래서 늘 엄마는 하나뿐인 귀한 아들을 걱정하셨지요. 항상 엄마는 산비탈에서 새 물을 떠와서는 장독대에 두셨어요. 막내인 저는 돌을 하나씩 가져다놓았고요. 그리고 초를 켜고는 두 손을 모으고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 크고 나서야 엄마가 자식이 살아 있기를, 건강하게 잘 있기를 소원하면서 기도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예술 공부를 하면서 미술이 단순히 형태가 아니라 엄마의 보이지 않는 세계, 정신과 혼이 드러나는 것임을 깨달았지요. 이런 기억을 토대로 ‘기원쌓기’가 탄생했고, 다시 나무를 쌓아 올린 형태나 T자 모양의 작업으로 이어지게 된 거죠. 우리 각자가 가진 염원, 영적 세계가 나의 생명력과 합이 되는 것이 참된 예술이 아닐까 하면서요.”
김윤신 작업을 설명하는 ‘합이합일 분이분일’은 작가의 재료를 대하는 태도와 믿음, 관람객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모두 담아내고 있다. 3월 19일부터 4월 28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처음 열리는 개인전에서 김윤신이 작업뿐 아니라 삶까지 지탱해준 ‘합이합일 분이분일’의 개념을, ‘합’과 ‘분’의 세계를 가장 보여주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김윤신 나무조각의 원형이자 수행적 작업의 출발점 ‘기원쌓기’ 연작도 선보인다.
살아남은 아이
“북한의 원산에서 태어났고, 안변이라는 곳에서도 살았어요. 제2차 세계대전 후 해방이 되었을 때, 오빠가 남쪽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가 내 손을 이끌고 삼팔선을 넘었어요. 밤새도록 산을 걸어서, 쪽배를 타고 한탄강을 건넜지요. 캄캄한 밤, 강물이 시커멓게 보이고 물소리만 들리더라고요. 북에서 집도 땅도 다 빼앗긴 사람들이 하도 많이 내려오니, 인민군이 이들을 향해 따발총을 쐈어요. 누가 죽어나갈지 모르는 거죠. 그 틈에 겨우 서울로 왔는데, 얼마 후 한국전쟁이 났어요. 서울 시내로 탱크가 밀려오고, 군인들 시신이 곳곳에 쌓였지요. 그때 엄마가 부산으로 피란 가면서 열 몇 살이던 저에게 오빠 행방을 확인한 후 따라오라 했어요.(웃음) 파리에서는 68혁명과 동백림 사건을 아주 가까이서 겪었고요. 그게 내 인생이에요.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잖아요.(웃음) 그런 것들이 오늘날 내 작품에서 원초적으로 표현돼요. 부러 의도한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했던 그 시절의 절박함이, 이 작업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겠다는 예술가로서의 간절함으로 이어진 거죠. 나는 반질반질한 형태로 곱게 작업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더 중요한 건 내 안에 그렇게 살아남은 투박한 것들을 살아 있는 재료로 어떻게 표현할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가장 본질적인 것을 순수하게 느끼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 찰나의 예술
김윤신 작업의 고유한 생동감은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어낸 삶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료의 에너지에 기반한 조각도 그렇거니와, 특히 회화는 또 다른 역동성으로 원시적 생명력을 발산한다. 아르헨티나의 대지 혹은 나무를 연상시키기도, 고향과 이상향을 향한 그리움을 담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흐름이나 바람을 기하학무늬로 표현하거나, 깊숙한 기억을 복기한 듯한 작품도 있다. 어떤 표면은 정돈된 반면, 두꺼운 마티에르로 거칠게 숨 쉬는 그림도 있다. 형식도, 내용도 다채로운 김윤신의 회화는 모두 일관된 추상성으로 삶과 자연을 향한 근원적 감각을 일깨운다. 세상의 모든 색을 취하겠다는 담대한 포부와 무엇이든 표현하겠다는 용기로 견고해진 그림은 한없이 뜨겁다. 전통 오방색과 이국적인 남미 토속의 색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색의 향연은 문화적 간극을 뛰어넘고, 수많은 선과 면이 야기하는 감각의 파장은 실로 조화롭다. 보통 조각가의 회화는 화가의 그것보다 깊은 공간감을 지니기 마련인데, 김윤신은 선과 면, 색과 구성의 황금 조화로 이를 현실화한다.
“나는 조각가야 혹은 나는 화가야, 이런 계산 없이 늘 가능한 작업을 해오셨어요. 좁은 작업실에 머물 땐 작은 크기의 회화나 판화, 콜라주 작업을 하셨고,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1984년부터 1997년 즈음까지는 나무에 완전히 빠져서 밤낮없이 조각 작업에 몰두하셨죠. 제가 1997년에 그곳 현지에서 미술 학원을 시작했어요. 그림 그리는 걸 보시더니 나도 할래, 하면서 옆에서 그리시더라고요. 종이와 캔버스를 여기저기 막 펼쳐두시는 통에 난감한 적도 많았어요.(웃음)” 김란 관장의 말에 김윤신 작가가 받아친다. “한 가지에 집중할 땐 아무 소리도 못 들어요. 그런데 집중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림과 하나가 되는 작업과 그냥 그릴 때의 결과물은 완전히 다르지 않을까 싶어요. 내 안의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다 나와요.”
알렉산더 칼더는 정교한 모빌 작업을 하다 지치면 자리를 옮겨 즉흥적인 드로잉 작업에 집중하면서 스스로 균형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윤신은 여름에는 야외에서 조각 작업에, 겨울에는 실내에서 회화 작업에 매진했다는 것 외에는 두 작업의 차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조각과 그림은 떨어질 수 없어요. 그림을 해야지 조각을 하고, 또 조각을 함으로써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캔버스를 살아 있게 만드는 색색의 선과 면은 화면 밖으로 끝없이 확장되는데, 이는 더하고 나누며 하나가 된다는 ‘합이합일 분이분일’의 철학이 조각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공히 적용되고 있음을 일깨운다. 캔버스 앞에서도 작가의 몸짓은 크고 힘차다. 다만 조각을 통해서 재료의 본성을 살리고 내재한 생명력을 찾아낸다면, 회화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직시해 솔직하게, 시각적으로 표출하는 작업에 가깝다. 회화 대부분이 ‘내 영혼의 노래’ ‘지금 이 순간(찰나)’ ‘이루어지다’ ‘진동’ 같은 제목이라는 점이 일종의 단서이고, 이들은 이번 개인전에서도 소개된다.
“사람들은 저에게 작업할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요. 하지만 전 무언가를 염두에 두면서 작업하지 않아요. 순간에 뭔가가 떠올라야지, 그러지 않으면 나도 몰라요.(웃음) 이런 걸 하겠다고 하면 벌써 그 순간은 지나가는 거예요. 조금 전에 내가 말한 것도 이미 지나갔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도, 우주 만물도 찰나예요. 예술은 새로운 걸 창작하면서 계속 나아가는 거잖아요. 순간순간, 찰나에 이루어지는 거고, 그건 우리의 삶과 같아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절대 알 수 없고, 계획대로 되지도 않지요.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고, 어딘가로 가게 되면 또 거기서 최선을 다하고. 그래서 회화 제목도 ‘지금 이 순간(찰나)’인 거예요. 예술은 다른 특별한 게 아니라 삶 자체가 아닐까, 삶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게 아닐까 해요. 물론 젊었을 땐 그저 남 보기에 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심에, 어쩌면 유명해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작업했지요. 근래에 와서야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죠.”
회화 조각이라는 신세계
지난 2월 마지막 날, 박수근 미술관에서 소담한 전시가 열렸다. 레지던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업을 모은 자리였다. 김윤신은 지난해 한국에서 머문 4개월 동안 50여 점의 작품을 만들었다. 한국 나무는 아르헨티나 나무에 비해 강도가 다소 약하지만, 그중 느티나무, 박달나무, 참죽나무, 소나무는 작가의 큰 사랑을 받았다. 이날 김윤신은 조각에 채색하는 장면을 시연해 보였다. 초록색과 파란색 물감을 팔레트에 풀고, 나무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유심히 살펴보며 색을 칠했다. 사실 김윤신은 지난 2000년대부터 나무조각에 채색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파타고니아 지방에 사는 아메리카 원주민 마푸체(Mapuche)의 존재를 알게 된 후 남미 토테미즘에 크게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색 목조각에 공존하는 보편성과 지역성은 한국의 양구라는 마을에 놓였을 때 확실히 다른 느낌을 발한다. 회화와 조각이 더해지고 나뉘어 하나가 된 듯한, 오직 이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국적 불명의 이 조각을, 김윤신은 ‘회화 조각’이라고 부른다.
김윤신의 작업 세계는 예술가의 열망과 결핍이 만들어낸 길이나 다름없다. 스스로를 늘 작업하는 상태에 두었고, 어떤 경우에든 가능성을 찾아내 예술로 이끌었다.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살아남기 위해 숱한 삶의 변수에 의연히 대처했고, 그 과정의 편린이 작품으로 거듭났다. 이번에 선보일 또 다른 ‘회화 조각’도 그렇게 탄생했다. 2000년대의 회화 조각이 원목 조각의 면을 색으로 나누는 작업이라면, 최근의 회화 조각은 정반대로 나뭇조각을 붙여 완성하는 작업이다. 지난 팬데믹 시절, 아르헨티나에서는 외출조차 힘들었고 재료를 구하기는 더 불가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짓고 남은 조각난 나무들이 문득 작가의 눈에 들어왔다. 나무를 자르고 채색해서 조합해보았다. 이렇게 회화를 입은 색색의 조각을 모아 어엿한 조각으로 완성할 수 있었던 건,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향하던 작가가 전 세계가 멈춘 후 비로소 어린 시절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기존의 원목 조각이 늠름하고 의젓하다면, 그래서 회화 조각에서는 순수한 동심이 느껴진다.
“어릴 때 친구가 없었어요. 산골 마을에서 종일 혼자 심심하니까 울타리에서 빼낸 수수깡을 잘라 안경과 소도 만들고, 깨진 병 조각으로 만화경도 만들고, 초를 녹여 물감 비슷한 걸 만들어서 그림도 그리곤 했지요. 수십 년 후, 손발이 다 묶인 상황에서 이 작은 나뭇조각을 보는 순간 무슨 연유에서인지 어린 시절이 생각난 거예요. 밤에 하늘을 향해 웅크리고 누워서 별과 이야기하기도 하고 하늘로 날아가고 싶었던 그때가 그렇게 그리웠어요. 그 기억을 시작으로 작은 나뭇조각에 색을 칠하고 그림을 그렸어요. 다시, 예술이라는 건 어디서 갑자기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팬데믹은 끝났지만, 회화 조각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회화 조각 역시 나만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여겨요. 김윤신만의 회화 조각을 세상에, 세계 미술사에 남기고 싶다, 그게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싶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한국에 머물 때 이렇게 원목을 채색하거나, 조각을 이어 붙인 회화 조각을 더 본격적으로 연구해보려고 해요.”
내 마음의 색을 찾아서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배고프면 배고픈 대로, 나는 내 작업만 할 수 있으면 돼요. 어디를 가든.” 김윤신의 작업은 지난 70여 년 동안 밤낮으로 자신만의 영토를 일구어온 고집스러운 예술가의 삶을 증언하고 있다. 세상을 감동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춘 조각도, 회화도, 회화 조각도 모두 주류 미술계는 물론 시대의 부침에도 흔들림 없이 제 길을 걷던 김윤신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파리 유학 시절 어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세계가 요구하고 내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는 그것을 찾아나가자.” 여학생이 겨우 두 명이었던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해 처음 조각을 배울 때부터 구순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평생 예술을 향한 벅찬 열정을 겸허히 다듬어오는 과정에서도 김윤신은 “어떤 외부의 영향을 받는 것도 원치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는 진실을 되새기곤 했다. 삶을 관통한 화두, 바로 ‘나 자신’을 관조해야 할 이유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란길에 대구의 어느 절에 들렀어요. 그곳에서 만난 어떤 스님이 ‘그 이름으로는 명이 짧다’고 하시면서 이름을 새로 지어주셨지요. 진실 윤(允), 믿을 신(信). 이 이름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때 스님이 해주신 말씀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네가 무엇을 하든 죽을 때까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 색깔인지, 그걸 찾으면서 살거라. 나는 그 말씀을 한 번도 잊은 적 없어요. 내 마음이 제대로 있는가, 흔들리고 있는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보지 않고 있는가, 그 정신과 마음속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 걸까, 나의 혼이 진정한 내가 아닐까… 오늘날도 찾고 있지만, 답을 모르겠어요. 예술에는 완성이 없으니, 그저 내 일을 해야겠지요. 그래도 이런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은 남겨야 하는데, 아직 멀었어요.(웃음) 다 못하고 갈까 봐 초조해지기도 해요. 한 5개월 정도 작업을 못하고 보니 얼른 다시 작업하고 싶어요.”
‘내가 할 수 있는 한 계속 작업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믿음으로, 김윤신의 우주는 계속 진화 중이다. 그렇게 평생 나무를 바라보다 그 성정을 닮아버린 예술가는 박력 있지만 온화하고, 따뜻하지만 확고하다. 며칠 만에 다시 만난 그녀는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다사다난한 삶의 한가운데서도 있는 힘껏 진실하게, 예술적인 태도로 살고자 염원한 사람의 손은 그 세월을 닮았다. 온전히 이 두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들고, 보살피고, 어루만지고, 부지런히 자기 마음의 색을 찾으며 살아온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물성과 온기가 이내 온 마음을 끌어안았다. 살아 있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VK)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포토
- 이우정,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윤혜정(국제갤러리 이사,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인생, 예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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