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과 하이패션이 만나면
패션과 무용, 서로를 바라보는 몸
“빈 공간을 누군가 가로질러 걸어가고 다른 누군가가 이를 바라본다면 그곳은 극장이 된다.” ─ 피터 브룩
영국의 연출가 피터 브룩(Peter Brook)이 정의한 극장이다. 여기서 극장을 연극, 공연으로 대체해도 의미는 동일하다. 특정 장소에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모여 행위를 하는 퍼포머를 보는 것은 공연과 패션쇼의 공통된 형식이다. 패션은 미래를 주도하고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항상 시제가 앞에 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운동성을 소재와 색감으로 조명하며 시대적 성향과 갈망을 미의 기준에서 드러내고 상용화하는 지점에서 패션쇼는 문화의 선두에 있다. 여기에 관객은 현재에 기반해 미래를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패션 언어를 창출하고 감각한다. 공연의 시제는 좀 더 공간과 맞물려 있다. 현실 세계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낯설게 바라보는’ 행위는 그리스의 극장 위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가파른 돌산 중턱에 극장을 지었고, 현실의 사건을 무대로 갖고 올라가 재연했다. 관객은 산 아래 자신이 살고 있는 일상 공간을 무대배경 삼아 바라보았다. 현실을 멀리서 바라본다는 시점에서 공연은 초현실이 된다. 현실의 문제를 물리적으로 먼 곳으로 분리해 재연함으로써 반성과 각성, 진실이 드러나는 공연의 시간은 공간에 맞물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연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라는 말이 있듯 무언가 너머, 다른 공간, 다른 세계, 즉 여기와 저기라는 세계 사이에 경계를 인정한다. 공연 시작 전 암전이 되는 것도 일종의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는 사인이니 말이다. 이런 극장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197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건축가 알도 로시(Aldo Rossi)가 선보인 ‘세계 극장(Teatro del Mondo)’이 있다. 수상 극장은 관객이 입장해 공연을 보는 동안 강을 따라 이동했고 극장을 나설 때 관객은 전혀 다른 곳에 내릴 수 있었다. 극장에 들어가기 전과 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것, 공연이란 사라지는 것으로, 개개인에게 유일한 기억으로 영원히 남는다는 극장의 본질을 따라 ‘세계 극장’은 비엔날레 종료와 함께 불태워진다. 예술의 경험, 공연은 세계를 다시 다른 눈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데 있고 극장 자체는 세계가 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패션쇼의 관객층은 미래의 바이어, VIP, 관계자, 언론 등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패션쇼의 목적이 산업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패션 세계를 드러내는 명장면을 잊을 수 없다. 편집장 미란다가 패션 세계를 가볍게 바라보는 직원 앤드리아에게 그녀가 할인 매장에서 사서 입었을 법한 스웨터 컬러의 탄생 배경과 산업 흐름을 이야기하며 그녀의 눈을 뜨게 해주는 장면이다. 패션은 시즌마다 봄이면 F/W 시즌을, 가을이면 다음 해 S/S 시즌을 발표하며 두 시즌 앞으로 빠른 시간을 살고 있다. 이에 반해 극장은 특정 대상에 한정하지 않고 모두에게 열려 있다. 극장의 시초가 광장이었듯 우연히 만나고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싸울 수도 있으며 사랑을 나눌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대상이 누가 되었든, 패션쇼와 공연은 특정한 공간에 불특정 다수가 모여 공동의 경험을 하게 되는 공동체성을 부과한다. 여기에 파티, 커뮤니티, 살롱 문화가 함께 딸려온다.
패션쇼에서 연출이 부각되기 시작한 시대를 찾아보니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20세기 초반에 발레 뤼스(Ballets Russes)의 <봄의 제전>을 관람한 가브리엘 샤넬이 이후 발레단의 발레 의상을 디자인하며 시작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션을 비롯한 예술이 전통과의 단절, 탈구축, 해체를 일으키며 형식을 벗어난 다양한 실험과 즉흥, 추상이 떠오르던 1960년대가 되어 본격적인 협업이 시작된다. 바야흐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패션쇼가 아니라 패션과 무용이 만나는 ‘몸’에 시선을 집중해볼 수 있다. 보통 무용 콩쿠르나 공연을 시작할 때 무용수가 무대에 등장하면 ‘걷는 것만 봐도’ 춤의 전개가 판가름 난다. 여기서 춤의 기본은 걷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바닥이 땅에 어떻게 착지해 있는지, 발에 실린 몸의 무게는 어떻게 분산되어 있는지, 천천히 걸을 때 나의 무게가 어떻게 이동하는지, 발 위로 놓인 자기 몸을 인지하는 것은 무용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패션쇼에서 마네킹에 옷을 입혀놓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델이 입고 걷는다는 것은 옷과 함께 살아 있는 존재를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옷은 모델이 걸을 때 질감, 무게, 형태 등 자신이 연출해낼 수 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반면에 무대에서 나체의 몸이 서 있다고 상상해보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발산하는 에너지, 무게감, 감정 등에 따라 공간의 분위기는 바뀔 수 있다. 몸을 혹은 음악을 역동적으로 사용하지 않아도 몸의 질량과 분위기만으로 전체 공간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힘은 몸에 있다. 몸과 옷 사이에는 매우 사적인 공간이 존재한다. 몸의 움직임과 옷 안팎의 온도, 습도에 따라 이 사적인 공간은 계속 움직인다.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있는 공간이 있다면 바람이 통과하는 길이 있다. 타이트하게 긴장시키는 접점이 있다면 풀어주는 선과 흐름에서 발생하는 에너지가 있다. 동선에 따른 공간 설계와 빛의 조도, 각도 등을 포함한 건축의 생태와도 유사하다. 바우하우스에서는 의상과 공간을 몸의 연장선으로 바라보았으니, 패션은 종합예술이다. 그래서 옷을 입고 걷는다는 것은 공간과의 소통이자 사회와의 관계 맺기다. 옷의 구김도 부서짐도 날림도 몸과 함께 소통하며 개인과 사회와 시대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다시 쇼로 돌아가보겠다. 무용과 협업한 패션쇼를 단순하게는 모델이 일직선으로 걷는 전통으로부터 탈피해 모델의 움직임을 역동적이고 리드미컬한 동작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故 앙드레 김이 드레스 속 보이지 않는 스타킹도 모델에게 갈아 신도록 하는 것은 모델의 태도를 위한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의상에 맞는 상태로 모델의 몸을 만드는 것이 고도의 협업이겠다.
최초의 안무는 책이었다. 안무 ‘코레오그래피(Choreography)’는 춤과 기록의 합성어다. 스승의 춤을 제자가 기록해 계승하기 위한 용도로 시작되었다가 귀족을 대상으로 무보를 그려 발표함으로써 과거의 기록이 아닌 새로운 안무를 제시하는 미래지향적 특징으로 바뀌었다. 그런 면에서 앞의 공연과 달리 안무는 패션의 시제와 동일하게 미래를 향해 있다. 그러나 동시대 안무는 신체 중심으로 이뤄지던 과거를 뒤로하고 1990년대 이후부터 주변과의 관계 맺기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안무가가 제시하는 순서를 무용수는 더 이상 수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안무는 안무가와 무용수의 최소한의 약속 아래 무용수가 주체가 되어 안무를 해석해 움직인다. 따라서 무용수에 따라 작품이 달라지기도 한다. 여기서 안무의 영역은 신체뿐 아니라 주변의 오브제, 공간 등도 내포하며 안무가는 개별성을 인정하고 각 속성을 리서치해 연결하고 관계 맺기를 하는 가운데 확장하고 있다. 춤이 빠진 안무, 부재의 논리 속에서 안무는 광범위하게 확장된다. 런던의 스튜디오에서 만난 건축가 토머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은 ‘베슬(Vessel)’을 설계하기 전에 안무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일반인이 평균의 속도와 높이로 경험하는 공간을 무용수는 다른 속도와 높낮이, 역동적인 방향의 커넥션을 통해 공간을 다차원적으로 경험한다는 점에서 자기 작품 속에서 일반인이 걷는 것만으로 그것을 경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 또한 무용수에서 안무가로, 작가에서 매체의 편집장을 거쳐 기획을 하고 있다. 무용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건축을 전공하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질문을 받을 때 상상할 수 없었던 틈에서 다양한 대화와 기획, 연구가 이뤄진다. 안무의 연장이다. 안무가들은 무브먼트 디렉터(Movement Director)라는 명칭으로 연극, 뮤지컬, 영화에서도 배우들의 움직임을 디렉팅한다. 패션도 예외는 아니다. 유럽을 비롯해 패션쇼의 무브먼트 디렉터로 활동하는 다수의 안무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세이 미야케와 라시드 우람단(Rachid Ouramdane)의 2023 S/S, 알렉산더 맥퀸과 웨인 맥그리거(Wayne McGregor)의 2010 S/S, 피비 파일로와 스티븐 갤러웨이(Stephen Galloway)의 2014 S/S. 패션 현장에 들어온 무용이다.
몸, 패브릭, 오브제, 형태, 공간, 문화 등 다양한 재료가 여기에 있다. 어떻게 관계 맺기를 하여 관객에게 어떤 경험을 하도록 해야 할까? 하나의 쇼로 다수가 이뤄내는 공동의 아상블라주. 패션은 몸과 사회가 만나는 시대의 언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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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토그래퍼
- 장덕화
- 패션 에디터
- 손기호, 신은지
- 글
- 양은혜(무용 음성 해설가, 공연 기획사 '스튜디오그레이스' 대표)
- 모델
- 정은지, 정은영, 황유빈, 김별, 조연재(국립발레단)
- 헤어
- 조미연
- 메이크업
- 유혜수
- 세트
- 최서윤(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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