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다카시는 행복하다
아트 바젤 홍콩에서 해맑은 ‘꽃’ 모자를 쓴 무라카미 다카시와 마주쳤다. 62세의 나이로 일주일에 3개국을 오가는 고단한 예술 여정에도 그는 두 손을 활짝 펴고 스스로 꽃이 되었다. 목표를 정했다면 치열하게 순응하는 것. 그것이 해학적인 예술가 무라카미의 행복론이다.
아트 바젤 홍콩 기간에 열린 신로 오타케와의 대담을 마치고 그랜드 하얏트 홍콩 호텔에서 마주한 무라카미 다카시(Takashi Murakami)의 컨디션은 다행히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의 ‘꽃(Flower)’ 캐릭터를 형상화한 무지개색 모자도 쓰고 있었다. 홍콩 컨벤션 센터와 페리 선착장에 안착한 화제의 팀랩 전시 광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객실에는 그의 팬임을 자처하는 총괄 매니저와 호텔 직원들이 계속 찾아왔다.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그에게 “오늘 컨디션은 어때요?”라고 물었다. 무라카미는 팬데믹 시기 60대에 접어들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진과 함께 “몸도 마음도 지친다” “17시간 비행이 벌써부터 두렵다”는 글이 자주 업로드되고 있었으니 안부부터 묻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홍콩 일정 역시 쉴 틈이 없었다. 교토와 토론토에 얼마간 머물다가 스트리트 컬처 행사 콤플렉스콘(ComplexCon)과 아트 바젤을 위해 홍콩을 찾은 그는 <보그>와 만난 직후 곧바로 대만으로 이동해야 했다. “팬데믹 이후 내가 늙었다는 사실을 하루하루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요. 기력도 금세 소진되고요. 이러다가는 머지않아 정말 죽고 말 겁니다.(웃음)” 전부터 무라카미는 죽음에 관해 자주 이야기해왔다. 교토시 교세라 미술관에서 9월 1일까지 열리는 그의 대규모 개인전 <무라카미 다카시 모노노케 교토(Takashi Murakami Mononoke Kyoto)>에서도 여지없이 죽음의 키워드가 눈에 띈다. 전시명에 포함된 ‘모노노케’는 일본 민간신앙에서 사람에게 씌어 병에 걸리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귀신, 혼령, 요괴 등을 일컫는 단어. 극적인 감정과 묘사로 가득한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서 느끼는 현대인의 공허와 무라카미의 귀여운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한 미소, 피의 역사를 간직한 교토가 품은 어두운 분위기는 모두 엇비슷한 정서로 엉켜 있었다.
그런 위기의식 때문일까. 무라카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에너지로 전 세계를 다니며 왕성한 예술혼을 발휘하고 있다. 이번 교토 전시를 채운 170여 점의 작품 중 무려 160여 점이 신작으로 그중에는 너비가 무려 10m가 넘는 대형 회화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무라카미의 비전을 구체화하는 공방 겸 디자인 회사 ‘카이카이 키키’는 파산 위기에 처했던 팬데믹 시기에 NFT에서 돌파구를 찾은 뒤 오히려 더 바빠졌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트렌드와 신기술에 언제나 민감하게 반응해온 무라카미는 정신없이 비행기에 몸을 싣는 와중에도 CGI 영화 <젤리피쉬 아이즈 파트 2>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CGI 영화를 만들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매 순간 회사가 파산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어요. 정말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해맑게 웃는 이유는 단지 그 때문이에요. 스튜디오에서는 늘 얼굴이 회색빛이죠.”
하루가 다르게 뜨거워지는 홍콩의 햇살 아래 그와 1시간 남짓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무라카미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예술의 정령처럼 느껴졌다. 목표가 분명한 삶은 멈추는 법이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또한 생에 대한 강렬한 애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홍콩에서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보그> 인터뷰를 시작하기 직전 그가 스태프에게 유일하게 요구한 것은 불고기버거였다. 그가 그랜드 하얏트 홍콩에 머물 때마다 찾는다는 앙증맞은 햄버거가 도착하자 그는 잠시나마 과장된 웃음기를 거두고 허기를 달래는 데 집중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또 다른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식욕을 재빠르게 충족한 무라카미가 지금 시대에 관해, 삶과 예술에 관해 논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생애 마지막인 것처럼 혼신을 다하여.
<보그> 인터뷰에 앞서 진행한 아티스트 신로 오타케와의 대담은 잘 마쳤나? 약 200명의 대중 앞에서 도쿄라는 도시가 각자의 예술에 미친 영향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신로 오타케는 당신을 현대미술의 세계로 이끈 주인공이다. 어떤 시간이었나?
대학에서 니혼가(일본화)를 공부하며 장래를 고민하던 시절, 1987년 도쿄에서 열린 그의 전시를 보고 현대미술에 입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마 그런 예술가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신로 오타케는 지금의 일본 미술 학도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슈퍼스타니까! 그와 비교하면 일본 예술계에서 내 입지는 아주 불안정하다. 훨씬 더 서구화되었고, 상업적이다.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주로 해외에서 활동한 나와 달리 신로 오타케는 도쿄에서 데뷔하고 도쿄를 기반으로 활동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훨씬 많았다.
신로 오타케와의 만남 외에 아트 바젤 홍콩 기간에 있었던 만남 혹은 사건 중 인상적인 것은?
홍콩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오프갓(Offgod)을 만났다. 그는 지금의 예술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다. 맨 처음 SNS에 일러스트 작업을 업로드하며 이름을 알린 후 패션 디자인, 디지털 조소 등 미술계의 기존 규칙과 온갖 경계를 허물며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발 빠른 퍼렐 윌리엄스가 몇 달 전 홍콩에서 열린 루이 비통의 2024 프리폴 패션쇼에서 오프갓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만 봐도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오프갓의 활약에서 증명하듯 홍콩 예술계는 정말 다채롭다. 순수 회화 외에도 디자인, 스니커즈 문화 등 다양한 서브컬처가 공존한다. 아티스트에겐 기회의 땅이다. 그런 예술가들이 아트 바젤이라는 단단한 기회를 통해 파인 아트 세계로 빠르게 진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비엔날레와 프리즈 등 전 세계 아트 페어에 즐겨 참여하는 편인가?
모든 것은 타이밍과 컨디션에 달렸다. 건강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늘은 활력이 느껴진다.(웃음)
컬러풀한 모자와 의상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패션에 대해서는 어떤 철학을 갖고 있나?
스타일링에서는 스트리트 패션의 대가인 ‘체리 상(체리 이시다)’의 도움에 의지한다. 벌써 6년째 함께하고 있다. 그보다 먼저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드래곤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 그가 특이한 ‘X’ 로고가 거대하게 그려진 옷을 자주 입고 다니길래 유심히 보다가 궁금해서 DM을 보냈다. 그땐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다행히 바로 답장이 왔다. 그렇게 오프화이트라는 브랜드를 알게 됐다. 당시 지드래곤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무라카미 다카시가 이 브랜드를 모르면 안 되죠!”
인터뷰는 물론 다양한 대담과 행사, 팬들의 ‘셀카’ 요청에도 언제나 기꺼이 응하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올 초 당신 작품을 친절하게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까지 개설했는데 이런 대중 친화적인 행보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회사가 파산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웃음)
이렇게 유명한데도 돈 걱정을 해야 하나?
당연하다! CGI 영화도 만들고 있기 때문에 돈은 끊임없이 필요하다. NFT 아트와 최근에 집중하는 ‘트레이딩 카드(Trading Card)’ 신사업을 위해서도 새로운 인력을 많이 충원했다. 그러다 보니 파산 위기였던 팬데믹 때 직원을 100명 정도 잃었는데 어느새 다시 이전 규모로 돌아왔다. 현재 디자이너 약 10명, 화가 약 40명, 물류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직원을 포함한 약 300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이들을 떠올리면 책임감이 막중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직원들을 거느리려면 상당한 리더십이 필요할 것 같다. 직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모르거나 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끙끙대지 말고 바로 물어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빠른 소통이 제일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SNS에 하루 19시간씩 할애한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정말인가?
아이폰이 알려준 ‘팩트’인걸.(웃음) 나도 놀랐다. 하지만 나는 너무 늙었고, SNS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많은 정보로부터 소외될 것이다. 게다가 SNS는 체력을 아끼면서 세상을 탐방할 수 있는 아주 편리한 창구 아닌가.
지금 교토에서는 당신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8년 만에 일본에서 열린 전시이자 도쿄 외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전시 <무라카미 다카시 모노노케 교토>가 일본에서의 마지막 전시가 될 거라 말한 사연을 듣고 싶다.
일본 갤러리 정책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도 한결같이 “예산이 없다”고 말하는 그들의 태도에 질려버렸다. 덕분에 20대에 내가 왜 일본을 떠나 뉴욕으로 가겠다고 결심했는지 오랜만에 기억났다. 무엇보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이런 것이다. 전시 기획 단계에서 내가 설치비, 유지비, 인건비를 모두 고려해 “최소 3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면 그들은 처음에는 알겠다고 하지만 막상 계약서를 쓰려고 하면 “죄송합니다, 다카시. 우리가 현재 지원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은 1만5,000달러뿐이군요”라며 태도를 바꾼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되면 움직여야 하는 건 결국 나와 우리 회사다. 친분이 있는 브랜드에 후원을 요청하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궁리하는 것이 전부 우리 일이다. 그 와중에 갤러리는 태연하다. 불만을 이야기하고, 화를 내는 쪽은 항상 우리다.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갤러리와 일본 예술계 사람들은 “다카시, 그래도 당신에겐 좋은 기회잖아요. 오랫동안 일본에서 이런 대규모 전시를 열지 못했으니까요”라는 말로 나를 회유했다. 그게 회유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본 예술계와 척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결국 많은 것을 포기했다. 물론 내가 주로 해외에서 전시를 열어왔기에 눈에 띄는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과 시스템에 대한 아쉬움, 이 모든 과정에서 느끼는 피로감이 너무 커서 지금으로서는 일본에서 다음 전시를 꿈꿀 마음이 크게 생기지 않는다.
당신과 루이 비통이 2003년 함께 만든 ‘멀티컬러 모노그램’을 새긴 루이 비통의 ‘신상’ 트렁크 위에 대형 조각상 ‘Flower Parent and Child’(2020)가 우뚝 서게 된 데는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어 있었나?
자금 마련의 목적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루이 비통 CEO 피에트로 베카리와의 오랜 우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2002년 마크 제이콥스의 제안으로 루이 비통과 ‘멀티컬러 모노그램’을 디자인할 당시 생활용품 제조사에서 근무하던 피에트로와 만났다. 그는 프로 축구 선수 출신으로 아주 미남이었으며 전혀 비즈니스맨처럼 보이지 않았다.(웃음) 하지만 소통에는 아주 능했다. 이후 내가 루이 비통 디자이너로 일하고, 그가 루이 비통 마케팅 및 커뮤니케이션 부회장으로 근무할 때는 특별히 교류가 없다가, 훗날 그가 디올 꾸뛰르 회장이 되어 나를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하면서 인연이 다시 이어졌다. 그러다 피에트로가 지난해 루이 비통 CEO로 돌아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교토 전시에서 선보일 작품을 후원할 마음이 있는지 물었는데 그가 흔쾌히 ‘예스’라고 해줘서 너무 고마웠다.
당신과 루이 비통의 오랜 협업은 패션 브랜드와 예술가 간의 성공적인 협업 사례로 꼽힌다. 이를 통해 당신은 세계적인 현대미술가로 거듭났고, 루이 비통은 통통 튀는 것을 좋아하는 새로운 세대의 마음을 샀다.
여러모로 타이밍이 좋았다. 지금 와서 드는 또 한 가지 생각은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의 선구안과 디렉션이 정말 예리하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도 어디선가 이야기했는데 LVMH 그룹의 창의성은 아르노 회장 그 자체라고 해도 무방하다. 경영 방식과 프로듀싱 능력이 누구보다 탁월하다.
세계적인 작가가 되려면 니혼가, 에도시대의 판화, 우키요에(주로 여인과 명소의 풍경 등 풍속을 소재로 한 목판화), 아니메 등 가장 일본적인 개성으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믿었던 당신의 선구안 역시 대단하기는 마찬가지다. 카이카이 키키를 통해 예술의 브랜딩에 앞장선 결과 ‘동양의 앤디 워홀’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현대 예술가에게 비즈니스 감각은 필수일까?
잘 모르겠다. 그저 내 감을 믿고 움직일 뿐이다. 맨 처음 뉴욕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만약 일본에서 레스토랑을 열려는 미국인 셰프가 있다면 그 역시 나와 똑같은 입장일 것이다. 기존 문화와 방식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생각부터 행동까지. 비즈니스 감각은 다른 게 아니다. 낯선 땅에서의 생존 감각이 결국 비즈니스 감각이다. 새로운 환경에서는 새로운 생활 감각이 필요했다.
예술가의 성공 전략을 분석한 당신의 저서 <예술기업론>(2006)에서 “모든 화가는 기업가다. 예술은 돈과 관계를 맺지 못하면 한순간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강경하게 이야기한 것도 떠오른다. 돈과 예술 사이에서 고뇌하는 예술가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글쎄, 그건 너무 오래된 이야기다.(웃음) 책에 담긴 정보 역시 이제 너무 낡은 것이 돼버렸다. 게다가 그때는 지금보다도 훨씬 돈이 절실했다. 지금은 예술가들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많다. SNS에서 그림을 팔고, 협업을 제안하기도 쉽다.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직접 후원금을 모금할 수도 있다. 지금의 나는 오히려 돈보다 소통 방식을 더 많이 고민한다. SNS를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나 더 적은 힘을 들여서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가 예술가들의 새로운 자산이 되어가고 있음을 자주 목격하는 요즘이다.
다음으로 소통 기술에 대한 책을 써보면 어떤가?
싫다.(웃음) 그 책으로 충분히 비난을 많이 받았다.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
교토 전시에서는 니혼가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계승한 대형 작품도 눈에 띈다. 너비가 13m에 이르는 회화 ‘Rakuchū-Rakugai-zu Byōbu: Iwasa Matabei RIP’(2023-2024)는 아직 직접 보지 못해 아쉽다.
이와사 마타베의 그림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전시를 통해 일본의 전통 화풍을 다시 공부하며 감동을 느꼈다. 컴퓨터 그래픽은 어느새 익숙한 기술로 자리 잡았고, AI 등장 이후 세상은 빠르게 3D화되고 있다. 그런 시대이니 미야자키 하야오가 10년에 걸쳐 수작업으로 완성한 애니메이션의 가치는 점점 더 높아진다. 심지어 이젠 2D 작업에 CGI 작업보다 더 많은 예산이 들기도 한다. 2D와 3D 작품은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며 공생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NFT 아트에 대한 관심이 다소 주춤한 듯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NFT 아트 사업에 공격적으로 몰두하고 있다. 세상의 변화와 신기술에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반응하는 것은 어떤 믿음 때문인가?
항상 트렌드를 의심하기보다 실험하는 편이다. 30년간 이어진 나의 예술은 트렌드를 좇기 위해 발버둥 치는 여정이었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아마 동년배 예술가들의 90% 이상은 진작에 트렌드 좇는 것을 포기하고 가장 자신 있는 분야에 안주한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운동선수처럼,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스스로를 매일매일 트레이닝하며 살고 있다.
일본 전통 회화와 애니메이션이 지닌 평평한 구성을 앞세운 당신의 예술 사조 ‘슈퍼플랫(Superflat)’이라는 용어로 설명된다. 당신이 오타쿠 문화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리며 고급 예술과 하위 예술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가에 동의하는가? 그리고 이는 당신이 바란 일인가?
모든 건 타이밍이 맞아떨어져 생긴 일이다. 특히 팬데믹은 모든 것이 전복되는 시기였다. 사람들은 갑자기 집에만 처박혀 있기 시작했고, 넷플릭스와 아마존 프라임이 부흥했다. 갑자기 인간의 삶에서 엔터테인먼트가 너무나도 중요해졌다. 모든 사람이 콘텐츠를 포식했고, 그런 흐름에서 일본 애니메이션도 각광받았다. 이런 모든 움직임이 서로 미친 영향이 많을 것이다. 서브컬처가 주류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나의 예술이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아주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있을 뿐이다. 내 예술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내가 죽고 나서야 이뤄질 것이다. 사람들이 오직 내 작품을 통해서만 나를 인식하게 되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게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비디오게임을 즐기며 치토스를 다섯 봉지씩 먹던 소년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이자 세계적인 셀러브리티가 되었다. 유명해져서 제일 좋은 점은?
DM을 보냈을 때 사람들이 안심하고 답장을 보내준다는 것.(웃음) 덕분에 협업이 아주 수월해졌다. 빌리 아일리시의 ‘You Should See Me in a Crown’ 뮤직비디오도 그렇게 성사된 작업이다.
‘무라카미 다카시×블랙핑크’ 캡슐 컬렉션에 이어 이번에는 뉴진스와의 협업을 예고하며 화제를 모았다.
6월 26일 도쿄 돔에서 뉴진스의 팬 미팅이 열리는데 거기에서 뭔가 재미있는 것을 공개한다. 지난해 민희진 대표가 카이카이 키키 스튜디오를 방문했을 때 블랙핑크 일로 발이 묶여 있어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는데 다행히 기회가 왔다. 뉴진스와 새로운 캐릭터 협업을 선보이게 되어 무척 기쁘다. 앗, 너무 큰 스포일러인가?
‘뉴진스 토끼’ 모양으로 쿠키까지 만들어 건넨 진심이 통한 모양이다.(웃음) K-팝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나?
일본 아이돌의 음악과 세계관은 지나치게 ‘딥한’ 구석이 있다. 그런 흐름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권태기에 빠진 일본 음악 시장에 K-팝이 아주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온 듯하다.
세상의 어두운 이면을 비판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당신의 예술은 보는 이들을 기분 좋게 한다. 당신도 예술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 사람인가?
난 ‘행복한’ 사람은 아니다. 지금도 머릿속에서 투쟁이 마구 벌어지고 있다. 나는 그 고뇌와 아이러니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백스테이지에서는 예민하게 굴다가 무대 위에서 웃으며 퍼포먼스를 펼치는 가수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때때로 모든 걸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들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소리를 지르며 분노를 해소하는 편도 아니고, 술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어서 스트레스를 풀 곳이 마땅치 않다. 넷플릭스에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며 ‘으하하’ 웃는 것이 나의 유일한 취미다. 최근에는 <장송의 프리렌>을 재미있게 봤는데 너무 좋아서 볼 때마다 울었다.
죽음과 생의 허무는 당신이 가장 꾸준히 탐구해온 주제다. 여전히 죽는 것이 두렵나?
매 순간 남은 날을 세어가며 살고 있다. 정말 머지않아 다가올 것이기 때문에. 3년 전 87세의 나이로 작고한 아버지를 추모하며 죽음에 대한 감각이 다시 또렷해졌다. 택시 운전사였던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정말 치열하게 일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10년 동안 치매를 앓았는데 마지막까지 결코 쉽지 않은 삶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육체적인 죽음이든, 기억의 소멸을 비롯한 정신적인 죽음이든 내일 당장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떠올렸다. 나도 벌써 62세다. 시간이 많지 않다고 느낀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VK)
- 사진
- Alex Lau, Reiko Mit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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