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훈과 한효주, 저항하거나 지배하거나
모호한 선택은 없다. 드라마 〈지배종〉의 주지훈과 한효주는 주저하는 법을 모른다. 확고한 자취를 따라 완성된 둘만의 세계가 서늘한 푸른빛으로 아른거렸다.
굽히지 않는 마음, 주지훈
아침부터 비상사태였다. 환절기 탓인지 난데없는 알레르기가 주지훈의 눈을 강타했고, <보그> 촬영의 향방은 미궁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는 다행히도 시간에 맞춰 무탈하게 스튜디오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제야 안도감이 찾아왔다. 누구보다 신경이 날카로운 것은 자기 자신일 텐데도 돌발 상황에 순응해 침착하게 움직이는 주지훈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어찌어찌해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 지나간 일에는 미련을 두지 않아요. 돌파구를 찾는 게 중요하죠.” 주지훈이 빠른 템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해 촬영을 마친 차기작 <지배종>에 관한 모든 질문 앞에서 그는 지금 당면한 일을 논하듯 거침없었다. 그 속도감만 보더라도 그가 평소 얼마나 다양한 생각과 고민을 거듭하는지 감지됐다. 디즈니+ 시리즈 <지배종>은 인공 배양육의 시대를 연 생명공학 기업의 대표 윤자유(한효주)와 사람과 산업에 대한 의혹을 품고 그녀의 경호원이 된 우채운(주지훈)을 둘러싼 서스펜스 스릴러다. “인공 배양육이라는 소재 자체는 생소할 수 있지만 무거운 작품은 아니에요. 친구들끼리 모이면 왜 그런 얘기 하잖아요. ‘200살까지 살 수 있다면 어떡할래?’ 이 드라마가 가까운 미래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주지훈이 연기하는 우채운은 퇴역 장교 출신으로 완벽한 스펙을 자랑하는 우직하고 진중한 성격의 인물이다. 영화 <젠틀맨>(2022)과 <비공식작전>(2023) 등 최근작에서 유독 빛을 발한 그의 자신만만하고 능글맞은 연기와 대비되는, 주지훈의 데뷔작 <궁>(2006)과 <킹덤>(2019)이 매력적으로 묘사한 주지훈의 날 선 카리스마가 반갑게 상기되는 역할이기도 하다. “경호원이니까 기본적으로 부여된 캐릭터가 있어요. 액션이 아니라 리액션 위주죠. 판단하는 게 아니라 공감하는 역할이고요. 그러다 보니 자칫하면 연기가 너무 지루해질 수 있다는 것이 조금 고민이 됐어요.”
디테일에 강한 배우인 주지훈은 동료와의 격의 없는 대화에서 해답을 찾는다. 드라마 <지리산> 촬영에 돌입하기 전, 그가 방구석에 틀어박힌 김은희 작가와 몇몇 스태프를 이끌고 3박 4일간 지리산 답사를 주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혼자 씨름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갈피를 못 잡겠으면 선배든 감독님이든 작가님이든 저와 다른 시선과 시야를 지닌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는 편이에요. 인터뷰에서 편의상 그걸 ‘회의한다’고 표현해왔는데요. 지금처럼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는 자리라고 보면 돼요. 농담도 주고받고, 허심탄회하게 술잔을 나누며 사는 이야기도 하고. 개인사와 일이 다 녹아 들어가는 그런 시간을 좋아하거든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서로에 대해 잘 알수록 현장에서 확실히 편해지는 게 있더라고요. 반드시 서로에 대해 투명하게 다 알고 시작하자, 그런 전략적인 선택은 아니고요.”
<지배종>의 박철환 감독은 주지훈을 “연기를 하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잘 간파하는 영리한 배우”라 표현했다. 극 중에서 묘한 케미스트리로 얽혀 있는 한효주 역시 비슷한 논지의 이야기를 했다. “오빠는 노련한 배우예요. 자기가 맡은 역할뿐 아니라 작품 전체를 조망하며 촬영장을 누비죠. 불합리한 일이 생기거나 진행 상황이 삐걱거릴 때 주저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주고요. 동료 입장에서는 그렇게 해주는 동료가 있다는 게 사실 되게 든든하거든요. 저는 그럴 때 적극적으로 말을 꺼내는 사람은 아니라서 마음속으로 참 고마웠어요.” 주지훈의 강점은 솔직함이다. 이를 무기로 배우로서 빠르게 인정받았고, 주변의 호감을 쉽게 산다.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비겁하게 뒤로 물러서지 않는 그는 유망한 모델에서 스타 배우가 된 후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평가와 책임을 기꺼이 떠안으며 여기까지 왔다. “데뷔 초에 ‘겁이 없다’ ‘굳이 왜 그렇게까지’라는 말을 자주 들었죠. 남의 말에 귀는 기울이지만 자아는 확고했어요. <궁>이 방영됐을 때가 20대 중반이었는데 이미 어느 정도 성숙한 상태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주지훈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가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길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안으로 파고들기보다 언제나 바깥을 향해 돌진한다. 덩달아 질문은 많아지고 시야는 넓어진다. “어릴 때 ‘넌 프로듀서형 배우야’라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그땐 그 말이 참 싫었던 게 기억나요. 배우에는 배우형 배우와 프로듀서형 배우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감정이 이해되지 않으면 힘들어하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저는 확실히 상황이 그려지지 않을 때 더 힘들더라고요. 위에서 뭔가 떨어져서 놀라는 연기를 해야 할 때 저는 감독님이 수긍하는 놀람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기술과 편집이 더해지는지 묻는 사람이에요. 앞뒤에 어떤 장면이 붙을지도 궁금하고요. 제가 느끼는 연기의 즐거움은 그런 거예요. 나 혼자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 서로 다르게 여기는 지점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를 채워가는 재미가 있죠. 그 과정 자체가 아주 즐거워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머리와 마음을 맞대고 함께 만들어나가는 느낌도 좋고요.”
해가 저물고,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다행히 그의 눈은 많이 가라앉았고, 주지훈은 절친한 사진가 김영준과 함께 고민하며 무리 없이 촬영을 마무리했다. 다양한 의상과 소품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재빠르게 ‘오케이’ 사인을 만들어내는 주지훈을 바라보며 나는 그의 탁월한 이해력과 임기응변 능력은 모델로 커리어를 시작한 덕분에 터득한 습성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타고난 센스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어릴 때 많이 맞아서 그래요”라며 겸손한 너스레를 떨다가도 이내 “<아수라>(2016) 김성수 감독님은 살면서 만난 사람 중에 제가 눈치를 제일 잘 본다고 했었죠”라고 수긍하며 호탕하게 미소 지었다. 수두룩한 주변의 증언처럼 주지훈은 탁월한 균형 감각을 갖췄다. 그래서인지 큰 키와 날카로운 눈매 등 눈에 띄는 인상에도 불구하고 어떤 환경에든 능숙하게 스며들어 유영한다. 그리고 <신과함께-죄와 벌>(2017)의 저승사자, <암수살인>(2018)의 사이코패스 살인마, <킹덤>의 버림받은 왕세자 등 독특한 세계관으로 무장했으면서도 흐름과 이야기를 앞서지 않는 그의 균형 잡힌 연기에 관객은 여지없이 설득당하곤 한다.
<신과 함께> <공작> <암수살인> 등으로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증명한 결과 유난히 상복이 가득했던 2018년, 수상 소감을 표하는 수많은 자리에서 그는 함께한 동료에게 담백한 감사를 건넸을 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정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죠. 하지만 뭐든 과해지지 않도록 경계해요. 칭찬을 듣든, 성과가 좋든 어깨가 올라갈 필요도 없고, 그 반대의 경우라고 해서 위축될 이유도 없죠.” 주지훈의 필모그래피 역시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다. <지배종> 이후 그는 아주 오랜만에 로맨스로 돌아올 예정이며 차기작 중엔 의학 드라마(<중증외상센터>)도 한 편 포함돼 있다. “심플한 거예요. 두 끼를 연달아 같은 음식을 먹으면 다음엔 다른 메뉴에 눈이 가잖아요.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재미가 있어야 되거든요. 두 작품 연속으로 다소 젠틀한 역할을 맡았다면 그다음엔 몸을 좀 쓰고 싶은 거죠.” 누군가에겐 그토록 어려운 ‘선’을 지키는 일이 주지훈에겐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가 언제나 빠르고 명쾌한 결정을 내리는 비결이다.
물론 20년 가까이 한길을 걸어온 직업인에게 위기와 침체기가 없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지나간 시련에 관해 묻지 않았다. 주지훈의 관심이 집요하게 현재에 머물러 있어 어떻게 운을 떼도 자꾸만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그 현실감각이야말로 주지훈의 내공이었다. 그리고 그 내공은 그가 아끼는 주변 사람들까지 땅에 단단히 발붙일 수 있도록 지탱하는 데서도 무럭무럭 발휘된다. 하정우, 민호, 여진구와 함께한 로드 트립 예능 프로그램 <두발로 티켓팅>에서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멈춰 선 민호에게 “괜찮아. 힘들면 쉬어가면 되잖아”라고 무심코 건넨 응원처럼. “배우로 살면서 주변 형들에게서 좋은 말을 너무 많이 들었거든요. (하)정우 형은 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액땜했다, 지훈아. 너 엄청 잘될 건가 보다’라며 긍정적인 격려를 보내줬어요. 별거 아닐지 모르지만 저에겐 많은 힘이 됐죠. (정)우성이 형과 (황)정민이 형은 조언도 정말 매너 있게 하는 사람들이에요. 제가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라며 반대 논리를 펴도 ‘그럴 수 있지. 난 그냥 내 생각을 이야기한 거야’라며 제 입장을 헤아려주죠. 특히 우성이 형과 이야기하면 뭔가 정화되는 느낌이 있어요. 연기도 연기지만 삶 전반에 대한 많은 것들을 배우죠. 이런 훌륭한 형들을 곁에 뒀다는 게 정말 너무 큰 행운이에요.” 줄지어 대기 중인 차기작 덕분에 주지훈은 의도치 않게 올 한 해 유튜브에서 열띤 활약을 이어가게 됐는데 그를 아끼는 ‘형들’의 화답으로 성사된 만남이다. “(정)재형이 형, (성)시경이 형, (신)동엽이 형 채널에 출연했는데 어째 다 술 방송이긴 하군요.(웃음) 몸 관리도 중요하지만 만나기만 하면 너무 반가워서 녹화가 끝나도 자리를 못 뜨겠더라고요. 계획대로 된다면 올해 다섯 작품이 공개되는데 작품마다 두어 채널에만 출연한다고 해도 올해 내내 유튜브에 얼굴을 비치게 되겠군요. 어린 친구들은 저를 유튜버로 여길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결정이 본능적인 동시에 운명적이다. 크고 작은 화두를 오가며 막힘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그의 꽉 찬 필모그래피처럼 켜켜이 쌓인 주지훈의 진심과 소신, 상식과 철학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아직도 한두 시간 더 인터뷰할 수 있어요. 할 얘기는 많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건강한 대화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요. 조롱과 비난, 솔직함을 가장한 무례함을 제외하고 유의미한 비평을 나누는 시간이 우리에게 더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경험상 누구 한 명이 총대 메면 가능하더라고요.(웃음) 무리 중 절반이 그런 저를 달가워하고, 남은 절반은 절 싫어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할 말은 하고 살아야죠.”
지배하는, 한효주
예리한 시선을 가진 주지훈의 말에 따르면 한효주는 이런 배우다. “관객으로 지켜봤을 때도, 촬영장에서 가깝게 마주했을 때도 참 단단한 사람인 것 같다고 느꼈어요. 저보다 훨씬 단단한 것 같아요. 가까이에서 본 지 6개월밖에 안 된 사이라 아주 신빙성 있는 증언이라고는 장담 못하겠지만요. 예를 들면 인터뷰할 때 저는 이렇게 등도 좀 구부리고 다리도 꼬고 헐렁하게 앉아 있다면 효주 씨는 안 그럴걸요? 술을 먹더라도 저는 ‘먹으면 안 되는데…’ ‘한 잔만 마실까’ 하다가 컨트롤을 잃는 스타일이라면 효주 씨는 ‘이날은 술 좀 마셔도 된다’고 마음먹은 다음 확실하게 몸을 움직이는 쪽이죠.” 놀랍게도 <보그> 촬영이 끝난 뒤 고요해진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위해 마주한 한효주는 꼿꼿한 자세로 나를 마주 봤다.
지금 모습 그대로, 한효주가 연기하는 윤자유는 인공 배양육이라는 유망한 산업을 이끄는 대기업의 총수다운 빈틈없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첫 화의 첫 장면을 장식했다. 뛰어난 능력치를 지닌 또 다른 캐릭터, <무빙>(2023)의 이미현과도 다르다. 윤자유에겐 사랑이라는 약점도 없으니까. “촬영하는 내내 참 외로웠습니다.(웃음) 메마른 나뭇잎처럼 바스락거리는 인물을 연기하느라 현장에서 까불거릴 수도 없었어요. 하루 종일 촬영하다 보면 한효주보다 윤자유로 지내는 시간이 훨씬 많은데 감정을 억누르는 삶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게 되더라고요. 촬영이 끝나면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여 있다가 풀려난 느낌이 들더군요. 원래는 촬영 기간에 술을 자제하는데 <지배종> 촬영하면서는 퇴근하고 숙소에 도착하면 답답하고 허한 마음을 달래려 포트 와인을 한 잔씩 마시고 잠들곤 했어요.” 한효주가 극 중에서 자신과 긴장 관계를 이루는 대한민국 국무총리 선우재(이희준) 역할에 대해 부러움을 표한 것 역시 그런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제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인 반면 희준 오빠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혼자 아주 변화무쌍해요. 옆에서 봐도 참 재미있게 연기하는 것 같더라고요.” 의외의 즐거움은 기업 대표를 연기하며 다채로운 스타일링에 도전하는 일에서 찾아왔다. <지배종>에서 칼같이 자른 단발머리로 등장해 서늘한 매력을 뽐내는 한효주는 우아한 트위드 드레스부터 시크한 수트까지 다양한 스타일을 소화하며 변신의 재미를 누렸다. “<무빙>도 그렇고, <독전>에서도 거의 단벌 신사로 등장했잖아요.(웃음) 윤자유는 오랜만에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는 캐릭터였어요. CEO다 보니 최근 맡은 역할 중 옷을 가장 잘 차려입을 수 있어 좋았죠. 영화 <쎄시봉>(2015)과 <무빙>에 이어 호흡을 맞춘 최경화 의상 팀과 하루에 옷을 몇십 벌씩 피팅하며 즐겁게 연출했어요.”
윤자유의 곁에는 ‘든든한 네 편’을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물론 그중 누가 진짜 그녀의 편인지는 시종일관 불투명하다. 크고 작은 판단을 종용하는 주변인들 가운데서 윤자유는 투명한 창문을 고요히 응시하며 끊임없이 되뇐다. “활용해야 될 자원일까, 멀리하는 게 상책일까.” 실제 한효주는 연예계라는 비밀스러운 세상에서 타인을 곧잘 믿는 편이다. “상처받을 수 있지만, 그래서 뭐든 깊이 믿지는 않으려 노력하지만, 결국 잘 믿는 편이에요. 특히 한번 친해진 사람에게는 마음을 여과 없이 주죠.” 한효주의 인스타그램에는 친구에 진한 애정이 듬뿍 담긴 게시물이 심심치 않게 업로드된다. BH엔터테인먼트 동료 배우들과 함께 촬영한 화보, 중학교 친구들과 찍은 스냅사진, 오랜 인연을 간직한 일본인 친구를 위한 생일 축하 사진 등등. “마음만 맞으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어요. 문숙 선생님이랑도 오랜만에 만나면 한 번에 8시간씩 수다 떨고 그러니까요. 우정을 포함한 소중한 관계는 지금 제 인생에서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인 것 같아요.” 지난 20년 동안 일을 1순위로 두고 살면서 한효주는 놓친 것이 많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제 곁을 지켜줬어요. 지금부터라도 제가 놓쳤던 사소한 행복, 그러나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그것들을 꼭 붙잡고 살고 싶어요.” 몇 달 전 진행한 <보그> 인터뷰에서 순간의 기쁨을 사수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할애하겠노라 다짐했던 한효주는 여전히 그 마음을 지켜가는 중이다. 덕분에 애틋한 추억도 많이 쌓였다. 그녀는 <지배종>의 촬영 현장을 다소 쓸쓸한 풍경으로 회상했지만 돌이켜보면 화보 작업까지 함께 한 주지훈 배우를 포함해 새로운 인연도 많이 얻었다. “윤자유의 최측근인 온산 역의 (이)무생 오빠와는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좀 더 긴 호흡으로 다른 작품에서 다시 만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배우더라고요. 카리스마 있지만 동시에 주변 사람들을 아주 편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어요. (주)지훈 오빠의 경호원 동기로 등장하는 강이안이라는 신인 배우가 지닌 선한 기운도 너무 좋았죠. 제가 아주 친절한 사람은 아닌데 저도 모르게 이안이를 챙기고 있더라고요. 데려가서 연극도 보여주고요.” <비밀의 숲>을 쓴 이수연 작가와 디테일한 연출의 대가라고 느낀 박철환 감독, 영화 <골든슬럼버>(2018)에 이어 오랜만에 반갑게 재회한 베테랑 촬영감독 김태성 등 믿음직한 제작진도 결코 잊지 못할 얼굴들이다. 지난해 제51회 국제 에미상 시상식에서 시상자로 나서며 한효주는 배우의 삶에서 단단한 관계가 주는 힘을 다시 실감했다. “다들 똑같더라고요. 같은 작품으로 만난 팀끼리 으쌰으쌰하는 모습이요. 하나의 목표를 위해 혼신을 다하다 보면 생기는 끈끈한 팀워크가 정말 고맙고 소중한 거라고 다시 한번 느꼈어요.”
그리고 단단한 관계는 언제나 추진력을 더해줬다. 드라마 <봄의 왈츠>(2006), <하늘만큼 땅만큼>(2007), <찬란한 유산>(2009), <동이>(2010) 등으로 주지훈과 마찬가지로 데뷔하자마자 주목받은 한효주는 이후 영화계에서 멜로 강자의 입지를 다졌으나 액션물과 해외 드라마 등으로 꾸준히 도전을 넓혀갔다. 고등학생 아들을 둔 히어로로 변신한 <무빙> 역시 새로운 마일스톤이었다. 다행히 대중의 너그러운 평가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저는 늘 새로운 역할을 추구해왔어요. 30대를 기점으로 더 다양한 캐릭터와 작품 제의가 들어오는 요즘인데 그게 배우의 입장에서 나이 드는 것의 가장 좋은 점 같아요.” 대중의 찬사 혹은 수상의 영광을 몰고 온 수많은 출연작 가운데 그녀가 스스로 거머쥔 기회였던 미국 드라마 <트레드스톤>(2019)을 꾸준히 자신의 터닝 포인트 작품으로 꼽는 것은 그런 갈망의 방증일 것이다. “주변 이야기를 아예 신경 안 쓴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내 선택과 행보를 객관적으로 보려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러면서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작품보다 진짜 하고 싶은 작품을 고르는 용기가 생겼죠. 그러다 보니 결과에 순응할 수 있게 되고요. <무빙>으로 호평받은 다음 곧바로 <독전 2>에서 혹평을 받긴 했지만 대중의 마음을 읽기는 언제나 어려웠으니 체력이 닿는 한 마음이 이끌리는 환경에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자는 생각입니다.” 지난가을 공개된 한효주에 관한 기사에서 나는 도입부를 다음과 같이 썼다. “그녀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한효주도 마찬가지였다. 도전을 거듭하며 그녀 역시 스스로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고 있다. “촬영 중인 작품이 일본 드라마라 지난 1월부터 일본에서 주로 생활하고 있어요. 역마살인지 환경을 바꾸는 데서 오는 리프레시가 있더라고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생기는 에너지가 분명 있어요. 그런 라이프스타일로부터 원동력을 많이 얻는 사람이어서 지난해에는 여행도 많이 다니고, 소소하게 해보고 싶었던 일에도 도전하면서 최대한 즐겁게 지냈습니다.” 어느 순간 한효주는 확실히 달라졌다. 30대 초반까지도 행복을 불행의 전조로 여기며 은근한 불안에 떨었다는 그녀는 이제 순간을 느긋하게 음미하는 법을 안다.
<지배종>을 촬영하며 낯선 희열을 느낀 순간도 많았다. “일단 연기하는 재미가 있는 대본이었어요. 5분 정도의 긴 호흡으로 담아내는 장면을 촬영할 땐 간만에 연기하는 재미를 느꼈죠. 요즘은 한 신이 아무리 길어도 1분을 넘기는 경우가 거의 없거든요.” 소재 역시 흥미로웠다. “촬영하는 동안 ‘왜 이제까지 이런 이야기가 없었지?’ 싶었을 정도로 동시대적인 이야기예요. 배양육 화두를 선점했다는 게 행운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지배종>은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흥미로운 생각을 나누게 하는 작품입니다.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가늠해보는 기회가 될 거예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배양육의 장밋빛 미래를 선언하는 윤자유처럼 한효주가 명징한 호흡으로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만남의 이유, 주지훈과 한효주가 이루는 묘한 관계성 역시 흥미로운 관람 포인트다. 주지훈 역시 멜로와 전우애를 오가는 윤자유와 우채운의 케미스트리가 이 작품의 매력이 될 거라 공언했다. 한효주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로맨스는 분명 아닌데 촬영장에서 지훈 오빠와 대사를 주고받다 보면 이게 지금 사랑싸움인지 뭔지 저도 모르겠더라고요. 이 둘의 관계는 사랑일까요?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헷갈렸어요. 보는 입장에서도 이 부분을 재미있게 느끼실 것 같아요.”
일본을 기점으로 생활하고 있는 한효주는 서울에서 진행된 <보그> 촬영 내내 자신만만하게 카메라 앞을 배회하며 순간을 즐겼다. 많은 것을 억누르고 절제하며 살아가는 윤자유의 외피를 완전히 벗어 던진 모습이었다. 지금 그 모습 그대로 한효주가 윤자유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을 때, 그녀는 주저 없이 답했다. “그래도 살아.” 그리고 덧붙였다. “윤자유는 생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어 보여요. 자기 목숨은 물론 생명에 대한 애착이 약하죠. 그래서 연민이 가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다 보면 예상치 않은 순간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도 할 테니 계속 살아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VK)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포토그래퍼
- 김영준
- 컨트리뷰팅 패션 에디터
- 사공효은
- 스타일리스트
- 양유정(주지훈), 박만현·김경선(한효주)
- 헤어
- 임해경(주지훈), 조미연(한효주)
- 메이크업
- 임해경(주지훈), 정수연(한효주)
- 세트
- 유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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