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침공하는 사이버 혁명가, 슈리칭
슈리칭은 넷 아트의 선구자다. 살해당한 트랜스젠더를 웹상에서 되살려낸 구겐하임 영구 소장품을 시작으로 30여 년간 인종차별, 환경 등의 사회문제를 디지털 언어로 제기해왔다.
지난 4월 2일 <보그>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사전에 엄격하게 통제한 촬영 장비를 들고 전시장에 들어섰다. LG 구겐하임 어워드의 시상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는 기술을 활용해 혁신적인 작품 활동을 펼치는 아티스트를 대상으로 하며, 지난해에 AI를 기반으로 한 아티스트, 스테파니 딘킨스(Stephanie Dinkins)가 첫 번째로 수상했다.
밤 9시, 삭발에 가깝게 짧은 금색 머리를 하고 광택이 감도는 은색 수트를 입은 슈리칭(Shu Lea Cheang)이 상을 받기 위해 자리했다. 슈리칭은 넷 아트(Net Art) 분야의 선구자로, 설치미술과 영화 제작 등 여러 매체를 활용한다. 넷 아트는 인터넷을 무대로 펼쳐지는 디지털 아트의 일종이다. 구겐하임 측이 말한 시상 이유처럼 “특정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기술로 디지털 시대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온” 작가다. 슈리칭은 1954년 대만 출생으로, 현재 파리에 거주하며 유럽, 영미권에서 주로 활동해왔다. 그렇기에 이민자, 여성, 인종, 성 소수자 등의 안건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스며들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1990년대 넷 아트의 태동기부터 활동해온 그야말로 선구자다. 구겐하임 미술관 최초로 영구 소장한 웹 기반 작품은 그녀의 대표작인 ‘브랜든(Brandon)’(1998-1999)이다. 이는 2017년 디지털로 복원됐다. 현재 뉴욕의 모마와 휘트니 미술관, 파리 퐁피두 센터 등이 슈리칭의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있다.
2019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대만관에서 여성 작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감시 사회를 빗댄 감옥 형태의 미디어 설치 작품 ‘3×3×6’(2019)을 선보였다. 한국에선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뉴미디어 여성 작가들과 단체전을 열었고, 2018년에는 광주 비엔날레로 방한했다. 당시 선보인 ‘UKI 바이러스 라이징(UKI Virus Rising)’(2018)을 최근 그녀의 유튜브 채널 ‘Shulea Cheang’에서 보고 철저히 현실에 기반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 전개에 놀랐다. 슈리칭의 예술 세계는 언제나 문제의식을 가진다. 여전히 살해당하는 트랜스젠더, 늘 감시당하고 추적되고 돈에 풀리는 우리 사회, 인종차별과 환경문제 등. 슈리칭은 넷 아트로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중이다.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 이후 5월에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작품을 소개하는 행사를 갖는다. 수상이 남긴 의미는?
어워드를 통해 40년에 걸친 나의 다양한 작품이 인정받아서 기쁘다. 내 예술 활동의 또 다른 주기로 들어서는 획기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영구 소장한 ‘브랜든’은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다. ‘브랜든’은 억울하게 강간 살해당한 브랜든이란 사람을 모티브로 한다. 이 내용을 알고 브랜든 웹사이트에 접속해 체험하니,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당시 구겐하임과의 첫 번째 넷 아트 프로젝트에 왜 브랜든이라는 실화 주인공을 떠올렸나?
‘브랜든’은 1년(1998-1999) 동안 웹상에서 진행된 내러티브 프로젝트로, 공공장소와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나는 젠더 융합과 테크노보디 문제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사이버 공간의 다양한 영역을 여행한다고 비유하는 이 프로젝트는 네브래스카주 폴스 시티의 트랜스젠더 브랜든 티나(Brandon Teena)가 1993년 강간 살해당한 유명 사건에서 파생됐다. 그 사이 사이버 공간 채팅방에서 사이버 성폭행이 벌어진다는 신고 사례도 있었다. 나는 브랜든이란 일시적인 존재가 유명한 성적 학대 사건과 교차되고, 범죄와 처벌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촉발한 사이버 공간에 ‘브랜든’을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1990년대 초반은 작가들이 이제 막 인터넷·웹을 매개로 넷 아트라는 장르를 만들기 시작한 때다. ‘브랜든’은 인종, 성별, 계급을 사이버 공간의 논쟁적인 영역으로 가져오면서 넷 아트 환경에 잘 자리 잡았다.
디지털 아트가 낯선 분야일 때부터 관련 작업을 시작했다. 첫 번째 주요 설치 작품은 인터랙티브 3채널 비디오 설치 작품인 ‘컬러 스킴스(Color Schemes)’다.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를 다룬 작품으로 1990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전시했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넷 아트를 시작했다. 이전 인터뷰를 보면 1994년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안토니 문타다스(Antoni Muntadas)의 작품 ‘파일 룸(The File Room)’을 통해 넷 아트와 처음 만났다고 회상했다. 어떤 점이 당신을 넷 아트로 이끌었나?
1994년 ‘에코사이버노이아(Eco-cybernoia)’ 영화라고 일컫는 장편영화 <프레시 킬(Fresh Kill)>(1994)을 완성한 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최초의 웹 브라우저인 ‘모자이크’를 이용한 문타다스의 ‘파일 룸’을 접했다. 충격적이었다. 그때 사이버 공간으로 향하는 초고속도로에 올라타기로 결정했다. 사이버 네트워크 연결의 가능성을 느낄 수 있었다.
1990년대만 해도 사회 전반에 넷 아트에 대한 이해와 지원이 부족했을 텐데?
인터넷 접근성의 문제, 넷 아트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대역폭과 속도의 문제가 있었다. 넷 매체로 작업하는 것은 자칫 엘리트주의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 초고속도로를 ‘달리기’ 위해 코딩을 조금 독학했는데, 2001년 무렵 이미 ‘넷 아트는 죽었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 나는 작품 주기에서 ‘포스트넷크래시(Post-netcrash)’로 후퇴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경제 붕괴 이후 발생하는 것들을 의미하는 ‘Post-crash‘를 응용해 말하고 있다.)
기술 제약과 발전에 따라 구현할 수 있는 넷 아트도 달라진다. 기술이 당신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예를 들어달라.
기술은 업데이트와 업그레이드를 뒤좇으며 더 강력하고 빠른 대역폭과 속도를 추구한다. 2009년 무렵, 나는 전자 쓰레기와 불필요한 사이보그를 주요 연구 분야로 삼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디지털 전염을 연구했다.
미디어 아트는 사진의 발명 이후 TV, 비디오 등의 매체를 바탕으로 확장되어왔다. 넷 아트는 기술이 예술의 행보를 이끈 대표 사례다. 바야흐로 AI의 시대다. 지금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기술 혁신은?
AI 머신 러닝의 빠른 발전과 과감한 활용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AI 정렬 문제, AI 알고리즘의 성별과 인종 문제를 파헤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뉴미디어 여성 작가들과 단체전을 열었다. 당시 선보인 ‘욕망의 들뜬 대상들(Those Fluttering Objects of Desire)’(1992)이란 60분짜리 비디오는 인종과 성에 대한 관념을 풀어낸 작품이다. 여성, 인종, 이민자라는 코드는 당신 예술과 굉장히 밀접하다. 당신이 곧 여성이면서 아시안으로 프랑스에 거주하는 미국 아티스트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출생과 삶이 예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나?
나는 1990년대 뉴욕에서 아시아인이자 여성, 퀴어라는 삼중 소수자로서 내 위치를 자각했다. ‘욕망의 들뜬 대상들’은 다양한 인종의 여성 작가 16인을 한데 모아 남성의 시선을 ‘뒤집은’ 작품이다. AI 자화상으로 묘사한 나의 최근 설치 작품 ‘어터(Utter)’(2023)는 기술이 가하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도전한다.
2018년에는 광주 비엔날레를 위해 방한했다. 당시 ‘UKI 바이러스 라이징’을 선보였는데, 유튜브 채널 ‘Shulea Cheang’에서 볼 수 있었다. 작품은 사이버 섹스와 젠더의 구분이 없어진 사회에서 오르가즘 섹스의 실험 대상을 찾아 떠나는 복제 인간의 이야기다. ‘젠더와 인종, 기존 권력에 대한 저항’이란 주제 아래 놀라운 상상력의 이야기를 전개했는데, 스토리텔링 과정이 궁금하다.
‘UKI 바이러스 라이징’은 당시 제작 중이던 장편영화에서 파생된 컨셉의 3채널 설치 작품이다. <UKI>는 게놈 코퍼레이션(Genome Co.)이 이트래시빌(Etrashville)에 폐기한 복제 인간의 사례를 들려준다. 유전자 변형 생물과의 만남으로 인한 그들의 변화와 UKI 바이러스가 되는 궁극의 바이러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작품의 컨셉은 2009년 바르셀로나의 앙가르(Hangar) 미디어 랩에서 창작 스튜디오를 하는 동안 구상했다. <UKI>가 마침내 장편영화로 제작되기 전에 이곳 앙가르에서 공연자 17명과 함께 라이브 시네마 퍼포먼스 버전을 개발했다.
2019년에는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대만관에서 여성 작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작품 ‘3×3×6’은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의 팬옵티콘(Panopticon)에서 영감을 받았다. ‘브랜든’을 만들 당시 ‘성적 일탈자’를 수용하는 장소로 팬옵티콘을 떠올린 것이 시작이다. 작품은 카메라 6대로 끊임없이 감시되는 감옥을 구현한다. 이는 SNS와 CCTV 등으로 항상 감시당하는 현대사회를 빗대고 있다. 정말 우리는 감시 사회에 놓여 있다. 기술 발전으로, 내가 “00을 갖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인터넷이 감지해 관련 상품을 인터넷 화면에 띄운다. 이런 감시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3×3×6’은 벤담의 전방위 교도소 감시 장치를 ‘중앙’에서 감시 카메라가 모니터링되는 현 사회의 디지털 팬옵티콘으로 확장한다. 우리는 감시당하고, 추적되고, 돈에 팔린다. 탈출구를 찾는 것이 궁극의 과제이고, 여전히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중이다.
작품이 사회문제와 밀접하다. 예술가로서 갖는 사명감이나 의무감은?
내 작품이 ‘인터랙티브’한 장치와 디자인을 적용하면서 대중을 ‘활성화’하기를 바란다. 내 예술은 다양한 공동체와 상호작용하는 삶을 사는 데서 비롯된다. 당연히 이는 특정 사회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을 반영한다.
현재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트랜스젠더들이 살해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재생 토지 이용에 관심이 크다. 가을에는 최근 리마스터링한 <프레시 킬>의 35mm 필름을 가지고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영원히 지속되는 환경과 인종차별 문제를 비롯해 사회문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영화 상영회와 타운 홀 미팅을 열 것이다.
금발로 염색한 삭발 스타일을 오래 유지하고 있다. 이를 고수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1990년대에 도쿄에서 꽤 오래 살았는데 미용실 가는 데 비용이 많이 들어서 직접 머리를 깎곤 했다. 지금 내 모습은 셀프 관리가 가능한 스타일이랄까. 머리 염색은 내가 1980년대와 1990년대 뉴욕에 살던 시절 펑크 세대 ‘스타일’ 선언의 일부다.
올해 예정된 주요 프로젝트 혹은 전시는?
퇴비 제조와 에너지, 토지를 생산·분해·재생하는 자급자족 식량 생산 주기에 대한 DIY 기술 혁신을 포함하는 괴짜 농업 장르를 정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또 다른 과제는 ‘로커 베이비 프로젝트(Locker Baby Project)’(2001-2012) 시리즈의 ME(Memory and Emotion, 기억과 감정) 데이터를 업데이트하기 위한 AI 데이터 세트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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