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봄이 왔던가, 봄이던가, 봄이 가는가. 부산스럽게 지나가는 봄의 한가운데서 오랜만에 시를 읽는다. 헛헛하고 불안한 마음은 떠나온 곳에 최대한 멀찍이 두고 싶다. 기차에 올랐다. 다행히 만석이 아니다. 띄엄띄엄 사람들이 보인다. 비교적 조용하다. 창으로 볕이 적당히 들이친다. 하늘이 맑다. 푸르다. 구름이 소란스럽지 않게 조금씩 피어오른다. 시를 읽을 생각을 하니 좋다. 일과 일의 틈새, 막간의 환기가 절실하다. 시가 숨구멍이 돼줄 것이다. 박연준의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2024, 문학동네)을 펼쳤다. 사랑의 안부가 아니라 사랑의 생사라니. 그런 걸 보고 올 수 있을까? 보고 와도 괜찮을까? 사랑… 살았는가, 죽었는가? 표제작 ‘불사조’다.
당신에게 부딪혀 이마가 깨져도 되나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날았고/ 이마가 깨졌다// 이마 사이로, 냇물이 흘렀다… 이곳에서는 깨진 것들을 사랑의 얼굴이라 부른다/ 깨지면서 태어나 휘발되는 것/ 부화를 증오하는 것/ 날아가는 속도로 죽는 것…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며칠째 미동도 않잖아.”// 내가 말하자 날아가는 조약돌// 돌아와서는/ 아직이요—, 한다// 아직?// 아직 -시 ‘불사조’ 중
깨진 것, 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벌어진 틈, 깨져야 비로소 태어나는 무엇. 그런 것이 사랑의 얼굴이라는데, 깨져야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가능성이라 말해도 될까. 그런 게 불사조라니. 죽음 없는 영생의 새가 아니라 죽어야만 사는 새, 죽어가며 되살아나는 새가 아니던가. 그런 게 사랑의 얼굴과 닮았다니. 사랑. 영영 죽지는 않을 테니 다행일까. 사랑. 유예된 죽음, 마땅한 생환인가. 아직이라… 이 말이 괜스레 밉고 오히려 불안해지고 그런데 또 다행스럽다. 이 마음은 무엇인가.
시 ‘유월 정원’을 읽다가 한참 머문다. 이 시집과 만나게 된 게 ‘유월 정원’을 읽기 위함이었을까.
…보이는 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않은 채/ 실재를 감지하기로 한다/ 행운도 불행도 왜곡하지 않기로 한다/ 두려움에 진저리 치다/ 귀신이 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한다/ 마음을 김밥처럼 둘둘 말아 바닥에 두지 않기로 한다/ 먹이가 되어 먹이를 주는 일,/ 본색을 탈색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한다/ 부수는 건 겁쟁이들의 일,/ 집을 부수는 대신 창문을 열기로 한다… 그리고 시는 이렇게 끝난다. “작은 것에만 복무하기로 한다.”
“작은 것에만 복무하기로 한다”는 다짐. 이 작은 선언은 근래의 내가 자주 읊조리는 마음의 소리이기도 하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 보이는 존재와 잘 마주하기. 내 앞의 당신을 찬찬히, 오래도록, 잘 보고 듣기. 다른 짐작과 섣부른 판단으로 괜한 오해와 오독의 늪에 빠지지 않기.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조금 알 것 같다. 내 시선을 벗어나 저 너머에 있는 것, 시선조차 닿지 않는 것, 알 수 없는 미지를 무작정 좇는 일에 저당 잡히지 않기를, 눈앞 존재의 귀함을 잊지 않기를. 작디작은 것에 충실히 복무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가장 넓고 깊게 보는 법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작은 것. 시인은 유독 작은 것과 작은 존재에 시선을 둔다. 진눈깨비(‘진눈깨비’, ‘이월 아침’), 작은 돼지, 작은 나, 작은 죽음, 다음에 도착할 작은 것들(‘작은 돼지가 달구지를 타고 갈 때’), 작은 사람, 작은 혼, 작은 이름(‘초록유령을 위한 제(祭)—2022-10-29’), 작은 뱀과 작은 고양이(‘파양’)… 이때 ‘작은’이란 순하고 여린 상태, 그런 성질과 기질의 존재이다. 또한 이때의 ‘작은’이란 세계니, 우주니 하는 거창하고 거대한 보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 존재,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까지 품는 존재의 개별성을 잊지 않는 시인의 태도이다.(‘안녕, 지구인’) 이것은 작은 데로, 작은 것에 먼저, 오래도록 마음을 두는 시인의 기질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시라고 나는 이해한다, 받아들인다, 느낀다.
5./ 좋았던 일.// 작은 일./ 아주 작은 일.// 햇볕을 쬐며 강가에 앉아// 돌멩이가 조는 걸 바라본 일.// 잠자리가 날아오른 일.// 손목에 앉은 일.// 다시, 날아간 일.// 기다린 일./ 기다린 일.// 지구가 젖는 것을 바라보다 내가 우산이 된 일. -시 ‘안녕, 지구인’ 중
‘그래, 좋았던 일, 작은 일, 아주 작은 일을 하나씩 나열해 보자…’
그런 생각을 할 때쯤 기차가 도착역의 플랫폼에 멈춰 섰다. 창밖은 여전히 5월의 정중앙. 볕이 시리다. 바람이 분다. 아, 좋았던, 아주 작은 일을 ‘아직’ 떠올리지 못했던가… 기차에서 내리면 또다시 분주하고 불안하고 막막함이 밀려올까. 조금, 아주 조금은 나아질까. 시의 틈새에 조금만 더 머물고 싶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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