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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에서 만나게 될 현실과 환상과 시네아스트, 알리체 로르바케르

2024.05.27

by 정지혜

    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에서 만나게 될 현실과 환상과 시네아스트, 알리체 로르바케르

    해마다 6월 초면 무주로 떠난다. 6월 5일부터 9일까지 덕유산 자락에서 펼쳐지는 무주산골영화제를 찾는 게 어느덧 연례행사가 되었다. 무주산골영화제는 국내외 최신 독립 예술 영화부터 고전 영화까지 두루 상영할 뿐만 아니라 음악 공연까지 더해져 알찬 프로그램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 가운데서 특히 ‘동시대 시네아스트’ 섹션을 좀 더 소개해보고 싶다.

    이 섹션은 전 세계 동시대 영화감독 가운데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하는 감독 1인을 선정해 그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상영하고 관련한 영화 비평과 영화에 관한 에세이를 담은 책자를 발간하며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2018년 영국의 안드레아 아놀드를 시작으로 스웨덴의 루벤 외스틀룬드, 미국의 켈리 라이카트, 브라질의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일본의 하마구치 류스케, 프랑스의 미아 한센-러브를 주목했고 올해는 이탈리아의 여성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가 주인공이다. 2018년 칸국제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행복한 라짜로>(2018)와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키메라>(2023)의 국내 개봉으로 한국의 관객들에게도 잘 알려진 감독이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 스틸 컷
    영화 ‘키메라’ 스틸 컷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에솔레에서 양봉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알리체는 지금도 움브리아주의 고요한 시골 마을에서 살며 영화를 만든다. 대도시를 지향하거나 영화 산업의 중심으로 눈을 돌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의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잊지 않고 잃지 않으며 그것을 더 깊은 내면의 눈으로 지긋이 오래도록 바라보는 삶의 자세를 견지하는데 그것이야말로 그의 영화적 토대다. 그의 영화는 자신이 발붙이고 사는 지역의 토착성, 마을 공동체, 이웃과 무리,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사와 습속과 깊이 연결돼 있다. 우리가 익히 봐온 이탈리아 영화 속 화려한 도시나 세련됨, 글레머러스함은 알리체 영화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장편 극영화 데뷔작인 <천상의 육체>(2011)는 이탈리아 남단에 위치한 레조 칼라브리아를, <더 원더스>(2014)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시골 마을을, <행복한 라짜로>는 가상의 도시로 고립된 채 살아가는 농촌 사회 ‘인비올라타’를, <키메라>는 리파르벨라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은 하나같이 정돈되지 않은 이탈리아의 외곽, 주변부, 농촌 사회이며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보다 과거의 세계처럼 보인다.

    알리체의 영화가 주는 놀라움은 이 구체적이고 세속적인 세상 한가운데로 부지불식간에, 불현듯 신화적이고 우화적인 요소, 비범한 인물, 꿈결 같은 환상, 같은 사물을 다르게 보는 발견과 발굴의 시선과 접근을 들여놓는다는 데 있다. 그의 영화를 마술적 리얼리즘의 전통에 두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영화제에서 감독의 초기작부터 근작까지,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부터 장단편 극영화 작업까지를 두루 볼 수 있다. 그 궤적을 좇다 보면 현실과 환상이 맞붙어 있는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영화가 자연스레 당신의 눈앞에, 마음에 홀연히 자리할 것이다.

    <현실과 환상의 시네아스트: 알리체 로르바케르>(2024, 무주산골문화재단)

    여기에 더해 소책자 <현실과 환상의 시네아스트: 알리체 로르바케르>를 함께 읽어보기를 권한다. 평론가, 감독, 기자, 시인 등 7명의 필자가 참여해 알리체의 영화로 진입하려는 독자들에게 친절하고 믿음직한 안내자가 돼준다. 필자 역시 이 책에 참여해 <행복한 라짜로>에 관한 에세이를 썼다. 무언가를 계속 응시하는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의 ‘보기’에 관해 생각하며 쓴 글이다. <행복한 라짜로>는 어딘지 모를 곳을 가만히 바라보는 라짜로와 그런 그를 흔들어 깨우는 소리로 시작한다. 그리고 라짜로가 자신에게 우정을 전한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를 비롯해 가난과 착취와 몰락과 파탄에 이른 세상을 응시하는 여정을 그린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라짜로의 이러한 ‘보기’는 마치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의 눈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다. 이때의 사랑이란 성애적 사랑이나 연인들의 친밀한 관계로서의 그것으로 국한할 게 아니라 자기 앞의 타자, 타자라는 하나의 세상과 마주하는 일 전반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우리 앞의 상대와 대상을 가만히 잘 응시할 수만 있다면, 뭔가가 일어나고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그곳에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사랑이지 않겠는가, 라짜로의 응시가 질문해 오는 것만 같다. 마치 그것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는 겁니다”라고 했던 <클레어의 카메라>(홍상수, 2017)의 클레어의 보기 같은 것이랄까. 마치 그것은 ‘…보이는 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않은 채/ 실재를 감지하기로 한다/ 행운도 불행도 왜곡하지 않기로 한다’라고 한 어느 시인의 시와 같은 것이랄까(<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박연준, 2024)의 시 ‘유월 정원’ 중).

    근래 보고 읽은 영화와 책을 통해 갖게 된 생각과 심상이 서로서로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6월 무주에서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영화를 다시 본다면, 그때는 또 어떤 마음이 일어날까. 나는 눈은 그곳을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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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산골영화제,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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