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시에나에서의 한 달

2024.06.03

by 정지혜

    시에나에서의 한 달

    몇 가지 이유로 근래 나의 관심 목록에 이탈리아가 들어왔다. 그런 와중에 히샴 마타르의 <시에나에서의 한 달>(열화당, 2024)을 읽게 된 것이다. (이런 우연이라면 얼마든지!) 그리 많지 않은 분량으로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판형의 책, 하지만 품고 있는 세계는 겹겹의 결로 그 깊이를 쉬이 가늠하기 어렵고 그 지평은 아득하니 멀어 아찔하다. 시에나라…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를 여행해본 적은 있지만, 시에나는 단 한 번도 염두에 둔 적이 없다.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도시, 화려한 지명 사이에서 이 담박하고 수더분한 음가의 도시는 오랫동안 나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이름이 이제야 비로소 눈과 귀를 두드린다. 시에나라고 발음할 때 연속되는 세 음절이 하나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로마, 나폴리,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피사, 시칠리아 같은 강력한 음가와 인장의 면면과 달리 시에나는 마음의 경계를 가뿐히, 소리 소문 없이 누그러뜨리며 내게 이쪽으로 들어서라 한다. 이탈리아 중북부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 에트루리아인이 처음으로 거주한 곳, 피렌체 화파가 압도하기 전인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시에나 화파의 시간이 유유히 흐르던 땅. 나는 그곳을 영화로 먼저 알았다. 이를테면 이 지면에서도 소개한 영화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가 태어난 지역 또한 이곳이며 그녀의 근작 <키메라>(2023)에는 에트루리아인의 유적이 땅속 깊이 잠들어 있다.

    히샴 마타르의 ‘시에나에서의 한 달'(열화당, 2024)

    “시에나는 너무 다채로우면서도 한결같고 너무 작으면서도 무진장해서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하나의 알레고리 또는 마음의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스쳐 가는 모든 영향력과 펼쳐지는 모든 날과 더불어 변화하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대상이기에, 소박하고 특별하지만 결코 완전히 알 수는 없는, 도시로서의 자아였다.”(133쪽)

    작가 히샴 마타르의 글 역시 나로서는 처음이다. 그는 1970년 뉴욕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보냈고 1979년 카다피 독재 정권의 반체제 인사인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를 따라 가족 모두 이집트 카이로로 망명했다. 1986년 런던으로 이주하지만, 1990년 아버지가 카이로에서 납치돼 리비아 교도소에 수감되는 비극을 맞는다. 그곳 교도소에서 정치범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 벌어진 1996년 이후 그는 아버지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 히샴 마타르가 리비아를 다시 찾은 건 그런 사건 이후 그곳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뒤였다. 그 귀환의 여정을 글로 쓴 게 그에게 퓰리처상을 안긴 회고록 <귀환>(돌베개, 2018)이다. 그가 시에나에서 한 달을 보내게 된 건, 3년간 이 책을 쓰고 난 뒤의 일이다. 그가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버지의 행방을 알지 못하게 된 바로 그때부터 그는 매일 내셔널 갤러리로 가 대체로 하나의 그림을 오래도록 보곤 했다고 한다. 새로운 그림으로 옮겨 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새 그림을 마주하면 또 오래도록 바라보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시에나 학파의 그림과 만난 것도 이 시기였고 시에나로 향한 건 시에나 학파의 그림을 직접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히샴 마타르의 ‘귀환'(돌베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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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라보다 보면 그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달라지곤 했다. 나는 그림이 시간을 요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은 다른 그림으로 옮겨 가기까지 서너 달은 기본이고 일 년이 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동안 그 그림은 내 삶의 물리적인 거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거처가 된다… 비잔틴도 아니고 르네상스도 아닌 그 그림들은 오케스트라가 악기를 조율하는 휴식 시간처럼 악장과 악장 사이의 파격으로서 홀로 서 있었다.”(13~14쪽)

    시에나로 들어가기까지, 시에나에서 머문 한 달, 시에나에서 돌아온 이후의 시간까지. 우리는 작가의 이 여정을 함께하며 그가 오랫동안 보고자 자처한 시에나 학파의 그림을 둘러싼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도상학적 상식과 접근법에 충실한 미술사나 그림 해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일종의 대화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예술사에서 가장 매혹적인 대화, 즉 그림이란 무엇인지, 무엇을 겨냥해야 하는지, 낯선 사람과의 사적 계약이라는 개인적인 드라마 속에서 그림이 무엇을 행하고 성취할 수 있는지에 관한 대화를 엿듣는 것이다.”(16쪽) 조금 더 나아가보자면, 이때의 대화란 우리가 누군가의 전망 속으로 들어서는 일과 같다. 대체로 “우리의 견고한 믿음과 열정 탓에 우리 각자가 저만의 전망에 갇혀 살아야 한다”(48쪽)는 걸 알기에 누군가의 전망 안쪽으로 들어선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가당키나 한 일인지 싶어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작가는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과 예술뿐이라 말한다. 절대적으로 수긍하는 바이다. 오직 책 속에서만, 아니면 그림 앞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이의 전망 속으로 들여질 수 있다. 고독한 예술 작품 속에 친밀한 공동의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늘 역설처럼 다가왔다… 창작 행위 안에 내재한 것은 칭송이다. 세계를 발견하고 이름 붙이는 것에 대한, 세계를 알아보는 것에 대한,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칭송 말이다.”(48~49쪽) 좀 더 질문을 이어가보자. 그렇다면, 이때의 칭송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어디를 향하는 것일까. “마침내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는,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어떤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보이기 위해, 인식되기 위해, 다른 누군가로 오인되지 않기 위해, 우리를 제일 잘 아는 이들에게 동일성을 인정받으면서도 계속해서 변화하려는, 인간 정신이 품은 비밀스러운 야망의 작용”(49~50쪽)에 있다. 바로 이를 향한 칭송이 사랑과 예술일 것이요, 우리의 전망이 돼주는 것 또한 사랑과 예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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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기 위함, 알아봐지는 것’이야말로 이 소박하고 큰 책이 마련해둔 매혹이자 이 책의 비범한 야심이라 말하고 싶다. 작가가 시에나에서 본 그림들, 만난 사람들, 그사이 느끼고 생각한 것들, 시에나에서 돌아와 다시 마주한 또 다른 그림 ‘낙원'(조반니 디 파올로), 이 책의 끝에 이르러 전해온 대화 그 모두가 ‘보이기 위함, 알아봐지는 것’을 향해 있다. “그 그림은 이걸 안다. 그 그림은 우리가 제일 바라는 것, 낙원보다 더 바라는 것이 알아봐지는 것임을 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아무리 형태가 변하고 바뀌어도, 우리의 어떤 것이 우리가 그토록 오래 사랑했던 이들에게 지각될 수 있도록 견디어 남는 것 말이다. 아마도 예술사 전체가 이런 야심의 전개이리라. 모든 책, 그림, 교향곡이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을 낱낱이 알려주려는 하나의 시도인 것이다.”(156~158쪽)

    작가가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곁에는 시에나의 그림들이 있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이 그림들 앞으로 그를 데려간 건 그의 아버지일 것이다. 이유조차 모른 채 아버지의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된 상태, 아버지를 기릴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지경, 납득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한 사람의 증발과 실종. 작가는 시에나의 공동묘지에서 다 함께 묘석을 찾아온 어느 가족을 보며 비로소 자신이 왜 이곳 시에나에 왔는지를 깨닫는다. …그 가족이 묘지 없는 애도자인 나를 보지 못했기를 빌었다. 그제야 나는 시에나에 그림을 보러 온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홀로 애도하러, 새로운 지형을 살피며 여기서부터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 알아내러 온 것이었다.”(93쪽) 그 순간, 나도 알 것 같았다. <시에나에서의 한 달>은 히샴 마타르조차 정확히 간파하지 못한 채, 비밀스러운 생이 이끄는 곳으로, 전혀 다른 방식과 우회로 써 내려간 애도 일기, 피정(避靜)의 시간이었음을. 나는 다 읽은 책을 천천히 덮으며 처음으로 시에나를 떠올린다. 시에나의 전망 안쪽으로 들어서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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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es24,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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