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미 “그래, 흔들려보자”
선미가 풍선과 함께 흩날리며 말했다. “뿌리는 단단히 땅에 내리고 가지는 유연하게 흔들릴 거예요. 바람에 이파리가 날아가도 꽃을 피울지 모르죠.”
5월 2일 생일은 어찌 보냈나요?
집에 가니 동생들이 텔레토비 분장을 하고 맞이했어요.
다 큰 청년들이 귀엽군요.
뭔가 ‘특이한’ 것을 하고 싶었대요. 저까지 텔레토비로 갈아입혀서 함께 사진을 찍었어요(선미는 휴대폰을 꺼내 보라돌이, 뚜비로 분장한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활짝 웃었다). 그러고 보니 3년째 같은 사람들과 생일을 보냈군요. 동생들, 동생 여자 친구, 매니저까지.
감동받아서 울었어요?
빵 터져서 웃었죠. 저 잘 안 울어요. 자주 울 것 같죠?
하긴 선미는 외유내강이죠.
맞아요.(웃음)
또 축하할 일이 있군요. 지난해 10월 발매한 미니 앨범 이후 8개월 만에 싱글 ‘Balloon in Love’로 컴백했어요. 선미 컴백은 영화 개봉 같아요.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연기하듯 퍼포먼스를 보여주니까요. 누가 입혀준 것이 아니라 본인이 스토리텔링한 거라 어울리고요. 이번 앨범은 어떤 캐릭터예요?
‘STRANGER’ 뮤비에서 제가 괴짜 과학자였다면 이번엔 사랑에 빠진 순수한 여성이에요. 메이크업도 거의 안 하고 꽃무늬 민소매와 반바지만 단출하게 입고 나와요. 아, 상의를 탈의하고 꽃을 가득 안은 모습도 촬영했어요. 전혀 야해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설레면서도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여성을 표현하고 싶었죠. (선미는 다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준다. 그녀는 이해를 돕기 위해 사진을 찾아 보여주곤 했다.)
‘STRANGER’ 때와는 180도 다른 이미지군요.
맞아요. “왜 날 두고 가시나”라며 외치고, 이 빠진 우산 들고 춤춰봤어도 순수한 사랑 노래는 잘 안 했기에 저도 기대했죠.
왜 갑자기 이런 곡을 해보고 싶었어요?
우리 팬들은 알 텐데 ‘B-SIDE’라는 선미 음악의 카테고리가 있어요. 서정적이고 잔잔한 노래들이죠. 실제 내 정서는 그런 것들인데 대중이 기대하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놓칠 수 없잖아요. 어떻게 하면 ‘B-SIDE’의 감성을 가져오되 대중이 바라는 모습을 적절히 섞을까 고민하다 이번에 모험을 했죠. 초여름의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페스티벌에서 듣기 좋을 거예요.
이번 곡도 본인이 작사·작곡·프로듀싱했죠.
맞아요. 곡을 쓸 때마다 고민이 많아요. 선미 같지만 선미 같지 않은 음악이어야 할 거 같아서, 대중이 좋아해줄지 몰라서.
곡 작업할 때 취향보단 대중의 지분이 훨씬 큰가요?
그렇죠. 내 취향과 대중의 선호를 어떻게 융화할지 가장 먼저 고민해요. 대중성은 호불호에서 호가 더 많은 거잖아요. 최대한 호를 많이 끌어내도록 노력하죠.
어렵죠. 나 좋아하는 거 한다고 되지 않으니까요.
저뿐 아니라 예술이나 패션 일을 하는 분들도 공통된 고민일 거예요. 오늘 함께한 사진가, 스타일리스트도 마찬가지고요.
대중의 취향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불안하진 않아요? 저는 열광했던 영화가 망하고, 평론가와 대중이 입 모아 칭찬한 작품이 별로일 때 좀 무서워지거든요. 대중잡지를 만드는 입장에서 이래도 될까 하고.
취향은 모두 가졌지만 일관되지 않잖아요. 내 취향이 마이너하고 아웃사이더처럼 느껴져도 문제 될 건 없어요. 다만 저는 이걸 팔아야 하는 입장이잖아요. 대중이 소비하고 싶게 만들어야 하기에 이런 고민을 많이 하죠.
대중성을 중시하지만 선미만의 스타일이 있어요. 특유의 ‘병맛’이랄까. 일반적이지 않아요. 가사든, 뮤직비디오 설정이든 한 끗에 유머, 어둠, 톡 쏘는 뭔가를 넣어버리죠.
늘 바라는 지점이에요. 무겁고 심각한 분위기를 ‘병맛’이 중화할 수 있죠. 이번에 컴백할 땐 어디를 비틀었지? 아! 크로아티아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었는데 꽃을 물고 달려요.(웃음)
역시 본인 아이디어?
아니에요. 저는 뮤직비디오나 사진 촬영에선 고집을 버리고 함께 하는 창작자들, 감독들 의견을 경청해요.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연차가 쌓일수록 그러기 쉽지 않거든요. 고집도 취향도 깊어지니까. 아무리 헤아려봐도 나는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스태프들은 좋다고 할 때는 어떻게 해요?
그런 적이 딱 한 번 있었어요. 다들 이걸 오케이 했다고? 나는 진짜 아닌 거 같은데?
언제요?
‘Tell me’ 할 때요.(웃음) 10대에 뽀글뽀글 머리를 하고 사진을 찍는데 하기 싫어서 울었어요. 사실 박진영 PD님 말고는 다들 고개를 저었는데 소위 대박이 났죠.
‘Tell me’가 2007년 발매됐으니, 데뷔 17주년이군요. 축하 인사 받으면 기분이 어땠어요?
솔로로 활동한 지도 10년이 넘었어요.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가늠이 안 가요. 그저 아직도 무대에 있어서 다행이구나 싶었죠.
20주년 콘서트도 해야죠.
생각만 해도 기뻐요. 사실 아이돌이든 솔로 가수든 활동 기한이 무한하지 않잖아요. 오랜 기간 나를 사랑해주는 분들이 그저 고마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고.
워낙 어릴 때 데뷔해서 이제 서른둘이군요. ‘Tell me’ 부르다 울던 소녀는 이날을 조금이라도 상상했을까요?
당연히 안 했죠. 사실 그 시기는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기억이 거의 없어요. 얼마 전에 소희랑 문자 했는데 그 친구도 그렇대요.
정말 큰 사랑을 받았는데 못 누렸군요.
활동하느라 정신도 없었고, 자라면서도 장녀인 제가 가족을 돌보고 의연해야 한다고 여겼어요. 그러다 스무 살 때 ‘그래서 선미는 누구지?’ 싶더라고요. 나의 미래, 지금 하는 것들이 불확실하게 느껴졌고요.
늦은 사춘기가 왔죠.
이런 정서가 스물다섯까지 이어진 거 같아요. “그때로 다시 돌아갈래?”라고 물으면 싫다고 답할래요. 누구나 겪는 사춘기고 저는 늦게 왔을 뿐이지만 당시 몸도 많이 약해져 있어서 감당하기 어려웠나 봐요. 하지만 돌아가고 싶진 않더라도 그 시간들은 아주 소중해요. 돌아보면 인생은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인 것 같아요.
살면서 예상이 자주 빗나갔어요?
이제 삶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니 오히려 재미있어요. 일단 예상을 잘 안 해요. 예상은 기대라는 감정을 포함하잖아요. 기대가 꺾이면 무너지기 쉽더라고요. 주위를 봐도 그렇고요. 열심히 준비하되 예상이나 기대는 넣어둬요.
미래를 고민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자?
그렇게 바뀌었어요. 서른 살을 기점으로 꿈속에서 살던 애가 현실로 쏙 온 것 같아요. 그게 너무 좋아요.
안정감을 느끼나요?
너무요.
다행이다.
그렇다고 꿈에서 살던 친구가 어디 가진 않았어요. 창작할 때 나오죠.
유튜브 채널에서 “내 30대는 경험이 쌓이면서 음악적으로 할 이야기도 많아질 것 같아”라고 말하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어요.
아직까지는 행복해요. 너무 사랑하는 일이거든요. 앞으로도 현실이란 땅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가지와 이파리만 바람에 유연하게 흔들리고 싶어요. 삶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으니,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도 탈 줄 알아야겠죠. 이번엔 이쪽 방향이구나, 그래, 흔들려보자, 이파리들이 꺾일 수 있지만 꽃이 필 수도 있으니. 말은 이렇게 하지만 늘 다음에 무엇을 할지 고민해요.(웃음)
지난 솔로 활동을 보면 공백이 없어요. 2017년 ‘가시나’ 이후로 매년 미니 앨범과 싱글을 번갈아가며 평균 두 번씩 발매하면서 컴백했어요. 앨범마다 컨셉은 각양각색이고요.
그러고 보니 ‘열일’했어요. 너무 뻔한 얘기 같지만 팬들 덕분이에요. 기다려주는 팬들이 없으면 나올 이유가 없죠. 두 번의 월드 투어를 하면서 여러 나라에 날 기다려주는 팬들도 있음을 알았고요. 오래 기다리면 지치니까 자주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어요. 그들의 행복하고 슬픈 순간에 함께하길 바라면서요. 아, 그리고 제가 활동 반경이 좁아서 일할 수밖에 없어요.(웃음) 집, 작업실, 회사가 전부예요.
다른 취미는 없어요?
음··· 고양이들이랑 집에 있어요(선미는 귀여워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ㅅ’ 자 모양으로 만들며 고양이 사진을 보여줬다). 약속이 거의 없어요. 가장 친한 친구 소희와도 자주 연락하지 않아요. 하지만 언제 만나도 아주 편한 사이죠.
인간관계에 대한 요즘 고민은?
카톡 ‘읽씹’이 나을지 ‘안읽씹’이 나을지.(웃음) 제가 연락을 잘 못해요.
선미를 아는 친구라면 ‘1’이 있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을 거예요. 고양이 보니까 생각났는데, 가장 애착이 가는 자작곡으로 ‘꼬리(TAIL)’를 꼽았어요. 솔로 가수 선미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요. ‘꼬리’는 예민한 빌런 고양이 같은 곡인데, 이렇게 세 보이고 싶어요?
‘꼬리’를 공연하면 ‘와!’ 함성보단 ‘엇!’에 가깝게 멍하니 보세요. 그 정도로 좀 이상하거든요.(웃음) 안무가 선생님께도 ‘꼬리’의 안무는 1차원적이고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동작으로 구성되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애초에 곡의 발상이 꼬리로 감정을 표현하는 고양이에서 왔거든요. 무엇보다 이 곡은 저의 자신감 장착 버튼이에요. 가수 선미의 스위치가 탁 켜진 것처럼 다른 사람이 돼요. 일상의 선미는 ‘꼬리’를 부르는 선미와는 정반대거든요.
순한 선미와 정반대의 캐릭터라 무대에서 후련한가 보군요.
“세상을 가진 것마냥 이기적이게 그냥”이라는 가사가 있는데 일상의 저는 절대 못할 말이죠.
유튜브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모습을 보면, 주인공은 본인인데 호스트를 띄워주느라 늘 애쓰더라고요.
눈치챘나요?(웃음)
아티스트는 본능적으로 스포트라이트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이건 정말 선미의 성정이다 싶었어요.
그게 고민이긴 해요. 하지만 좋지 않은 습관은 아니니까 괜찮아요.
‘꼬리’를 부르면서 풀면 되죠.
맞아요! 저는 무대에서 풀어요.
집에서 <해리 포터>나 <인셉션>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본다죠. “난 익숙한 게 좋아”라고 말하는 선미가 컴백할 때마다 캐릭터가 크게 바뀌어서 원동력이 궁금했는데, 이제 이해했어요. 일상의 평정심이 본업을 더 폭발시키는 거죠. 본인이 프로듀싱한 지난 앨범 보면 일기장을 본 것 같나요?
예를 들어 20대 초반에 쓴 곡엔 불안한 감정이 담겨 있어요. 나의 힘들었던 얘기를 풀어냈거든요. 치유되기 시작한 20대 중반에도 그 과정이 노래에 담겼고요. 지금 그 시절에 만든 노래를 부르면 실리는 감정이 달라요. 어릴 때는 ‘나 정말 불안해요’였다면 지금은 ‘이제 단단해졌어요’ 같달까요.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나와 비슷한 시절을 보내는 친구들에게 위로와 치유로 가닿기를 바라죠.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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