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시 캐드월라더가 개척하는 뮈글러라는 세계
케이시 캐드월라더는 뮈글러라는 드넓은 대지에 새 시대를 개척하고 있다.
지난 2월 런던에서 열린 영화 <듄: 파트 2> 시사회의 젠데이아, 2023년 ‘르네상스 월드 투어’ 무대 위 비욘세, 2019년 멧 갈라 레드 카펫에 등장한 킴 카다시안. 이들은 모두 뮈글러(Mugler)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SF 영화 주인공에게 어울리는 미래적인 갑옷과 오토바이 핸들로 완성한 뷔스티에, 수백 개의 물방울이 맺힌 라텍스 드레스는 1973년 뮈글러 하우스를 창립한 티에리 뮈글러(Thierry Mugler)의 작품이다. 미래주의와 과장된 실루엣을 기본으로 오토바이와 자동차, 뱀파이어와 수중 세계를 넘나들며 패션의 한계에 도전했던 디자이너는 2022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남긴 방대한 유산과 도전 정신은 케이시 캐드월라더(Casey Cadwallader)가 이어받았다. 창립자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몸을 찬양하는 미학을 추구하는 동시에 그 비전을 지금의 순간에 어울리도록 재창조하고 있다. 지난 2018년부터 뮈글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그가 지난봄 서울을 찾았다. 창백한 피부, 꾹 다문 입술의 미국 남자에게 뮈글러 하우스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물었다.
패션 디자인이 아니라 건축을 전공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자동차나 주얼리 디자인을 꿈꾸기도 했다. 건축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했지만, 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패션을 사랑했다. 그러다 마침내 깨달았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일이라는 걸.
건축을 전공한 것이 당신의 디자인에 미치는 영향이 궁금하다.
건축을 통해 기능적으로 디자인하는 법을 배웠다. 프로젝트와 디자인에 따라 올바르게 설계하는 법, 마땅한 재료를 선택하는 법, 디테일과 기술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태도를 습득했다. 건축에서 배운 것들이 나의 디자인을 좀 더 특별하게 한다.
닮고 싶은 건축가가 있나?
디자인을 하기 위해 영감이 될 만한 것들을 모을 때 정말 많은 것을 본다. 그리고 그것들을 혼합하려고 한다. 애정하는 몇몇 건축물이 있지만, 전체적인 무드를 볼 뿐 특정한 형태나 컬러를 수집하진 않는다.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와 이탈리아 건축가 카를로 몰리노(Carlo Mollino)를 특히 좋아한다. 카를로 몰리노는 소재를 통해 관능적인 느낌을 표현하고, 아름다운 곡선과 물성을 보여준다.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 역시 나에게 큰 자극이 된다. 그는 주로 석조를 활용해 작업하지만 비율과 각도를 중점적으로 보여준다. 늘 회화 작품이나 예술 작품, 장식적인 세라믹과 은세공품 등 많은 것들을 보며 힌트를 얻으려고 한다.
2018년부터 뮈글러를 이끌고 있다. 당신이 지향하는 뮈글러는 시즌을 거듭하며 점점 더 또렷해지는 것 같다. 지금까지 가장 큰 변화는?
큰 변화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늘 똑같다. 컬렉션의 방향은 항상 동일하다. 나는 테일러링을 통해 몸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구조적인 형태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재료와 기술이 컬렉션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다. 뮈글러 하우스의 유산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굳이 가장 큰 변화를 꼽는다면 내가 성장했다는 것이다. 뮈글러에 온 뒤 수년 동안 하우스를 공부했다. 처음엔 뮈글러의 언어로 유창하게 표현할 줄 몰랐지만 점차 익숙해졌고 자신감이 생겼다. 그로 인해 더 큰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다.
반면에 절대 변치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훌륭한 디렉터가 된다는 것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이다. 하지만 정말로 재미있고, 반드시 재밌어야 한다고 여긴다.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많이 돌보고 있다. “실수해도 괜찮아. 나는 의사도 아니잖아. 아무도 죽지 않아. 그저 사람들이 잘못된 컬러의 옷을 입는 것뿐이야”라고 다독인다.(웃음) 내가 재밌어야 뮈글러를 보는 대중도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지난가을 파리에서 지켜본 뮈글러 2024 S/S 컬렉션에선 철저하게 계산됐다는 인상을 받았다.
매우 특별했다. 개인적인 테마를 처음 부여했기 때문이다. 컬렉션의 테마는 내가 좋아하는 해파리, 문어 등 수중 생물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수중 세계를 비롯해 자연 세계에 대한 영상을 보는 취미가 있다. 그 속에서 볼 수 있는 색감과 반짝임이 매력적이다. 빛나는 해파리를 보면 첨단 기술을 보는 것처럼 경이롭기까지 하다. 수중 생물의 색감과 형태, 움직임에 뮈글러의 유산인 코르셋과 란제리, 테일러링 등을 결합했다. 수중 생물이 헤엄치는 모습을 실감 나게 구현하고 싶었지만 쇼장을 물로 채울 순 없지 않나.(웃음) 그래서 바람을 떠올린 거다. 내가 바람을 쓰겠다고 했을 때 모두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강풍기를 디자인 스튜디오에 설치해달라고 요청했고, 내 아이디어를 시험해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충분히 큰 강풍기를 가져왔지만 나는 더 크고 강력한 강풍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침내 비행기 엔진 크기만 한 강풍기를 구할 수 있었고, 그걸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우리는 바람 속에서 날아다녔다. 아주 황홀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런웨이에 이것을 활용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드레스를 입은 모델이 해파리처럼 보이도록 수정에 수정을 거쳤다. 쇼 당일 이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지만 결국 잘됐다. 헤드스카프가 강한 바람과 함께 쇼장 구석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니 신이 났다. 뮈글러 하우스의 유산을 존중하고 보존함과 동시에 자신을 투영한 결과여서 더 짜릿했다.
필름 디렉터 토르소(Torso), 코레오그래퍼 에릭 크리스티슨(Eric Christison)과 말릭 르 노스트(Malik Le Nost) 등 재능 있는 크리에이터들과 작업을 해왔다.
본능적으로 재능 있는 사람들을 찾는다. 창의적인 사람이 친절하고 열려 있고 똑똑하기까지 하다면 그들은 엄청난 것을 만들어낼 수 있고, 이게 바로 내가 그들을 선택한 이유다. 아이디어를 가지고 그들을 찾아가면 결국 무언가 함께 만들어내게 된다. 정확하게 어디로 가야 할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결국 원하는 곳에 이르는 것이 협업의 마법이다.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때 토르소는 패션 필름을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점이 모두에게 위험 요소였다. 하지만 우리는 패션 필름을 재정의하기로 결심했다. 더 재미있고 놀라움을 줄 수 있는 패션 필름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크리에이터의 작업물이 마음에 들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얘기한다. “이번 쇼를 위해 당신과 함께 작업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함께 할 수 있는지 묻고 방향성을 논의한다. 진가를 알아보고 그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해낼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내 의무다.
그들에게 늘 당부하는 것이 있다면?
단 한 가지다. “내가 당신을 골랐고, 나는 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한다면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그들이 스스로 뿌듯하게 여기는 작업물을 만들어내길 바란다. 그래서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편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한다. 나는 사람들이 너무 공손하려고 애쓰는 게 싫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기 위해선 ‘좋아, 좋아, 좋아’라고 외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그들과 동등할 뿐 더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미친’ 아이디어가 실현되도록 매진하는 사람일 뿐이고, 혼자서는 절대 해낼 수 없다.
어느 인터뷰에서 디자이너가 해야 할 일은 “브랜드라는 렌즈를 통해 스스로를 번역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뮈글러를 위해 일할 때는 오직 뮈글러만 염두에 둔다. 일반적인 모습도 있지만 그건 뮈글러를 위한 모습과는 다소 다르다. 일을 할 때 스스로에게 ‘뮈글러다운가?’ 하고 물어본다. 때때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도 뮈글러답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럼 자신에게 이렇게 답한다. ‘잠시 착각했다. 이건 뮈글러를 위한 게 아니야.’ 이런 게 바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역할이 주는 재미다. 나는 지금 뮈글러를 위해 움직인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자유를 찾는다. 뮈글러의 아카이브를 계속 재해석하며 되살리기도 하고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받기도 한다. 그 후엔 나만의 것을 새롭게 만들려고 한다. 시즌마다 뮈글러의 유산을 꼼꼼히 살핀다. 완전히 다른 걸 만들고 싶기도 하지만 아직은 뮈글러라는 바닷속을 열심히 헤엄치고 있다. 2024 S/S 컬렉션은 케이시 캐드월라더다웠다. 하지만 티에리 뮈글러 역시 수중을 테마로 한 컬렉션을 많이 진행했다. 나는 항상 낯선 소재를 탐닉한다. 미스터 뮈글러 또한 생경한 소재로 개성을 표현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여러 면에서 그와 긴밀하게 연결된 부분이 많다. 그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늘 내가 뮈글러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있다.
2024 프리폴 컬렉션에서 남성복을 공식적으로 선보이며 뮈글러의 외연을 확장했다.
여성 컬렉션을 만들 때 남성복 실루엣을 가져와서 여성복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을 주로 활용했다. 여성이 입고 다니는 많은 재킷은 결국 남성복 재킷의 디자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형태든 누구에게나 어울릴 수 있다. 공식적으로 남성 컬렉션을 시작할 때, 여성복에서 가져와 남성복에 녹여낼 많은 요소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리고 성별은 남성과 여성,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는 게 아니다. 세상에는 남성스러운 여성이 있을 수 있고, 매우 여성스러운 남성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케이시 캐드월라더의 뮈글러는 이것을 모두 아우르려 한다. 남성 컬렉션을 굳이 여성 컬렉션과 분리해 보여주고 싶지 않다. 우리는 하나의 세상에 살고 있고 모두 같은 인간이니까. 매장 디스플레이 역시 여성복과 남성복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연출할 계획이다. 누구나 성별의 경계 없이 마음에 드는 걸 얻길 원한다. 뮈글러는 당신이 무엇이 되고 싶든, 누구든 상관없이 늘 환영한다.
당신 인생을 뒤흔든 것들이 궁금하다.
남편과 강아지, 강한 두 여성, 엄마와 누나다. 찰리 XCX(Charli XCX), 샤이걸(Shygirl), 비욘세(Beyoncé)의 음악을 듣거나 콘서트에 가서 그들에게 많은 에너지를 받기도 한다. 음악은 나에게 큰 힘을 주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존재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때론 과거의 물건이 나를 자극할 때도 있다. 빈티지 가구와 빈티지 테이블웨어, 역사가 담긴 산업 디자인과 주얼리 디자인 등에서 영감을 얻는다. 가족과 동료, 예술, 디자인, 문화 모두가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내가 가장 원하는 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긍정이 가장 중요하다. 아름다운 것을 만들기 위해선 아름다운 것을 봐야 하고 그것이 결국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멋진 옷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입은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하고 싶다.
공식적으로 세 번째 서울 방문이다.
한국과 단단한 연결 고리가 있다. 스무 살 때 건축 학교에서 만난 가장 친한 친구 두 명이 한국인이다. 그들은 나를 데리고 한식을 먹으러 다니고, 군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웃음) 그렇게 한국을 조금씩 알게 되었고, 그들과 여전히 친하게 지내고 있다. 나는 한식을 정말 좋아한다. 심지어 파리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한식을 먹는다. 서울에 처음 방문할 때부터 사랑에 빠졌다. 서울은 푸르른 자연이 가득하면서도 매우 현대적인 곳이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음식도 무척 맛있다. 건축물 역시 진보적이면서도 유서 깊고 아름답다. 서울이 지닌 밀도 높은 에너지가 참 좋다.
서울 방문 목적이 궁금하다.
10 꼬르소 꼬모에서 열리는 뮈글러 팝업을 위해 왔다. 팝업을 위해 아주 특별한 로우 에지 프린지 데님을 준비했다. 10 꼬르소 꼬모는 서울에서 뮈글러 남성 컬렉션을 처음 선보이는 매장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뮈글러의 여성 컬렉션과 남성 컬렉션을 함께 보여줄 수 있어 행복하다. 팝업 행사가 끝난 후에는 한남동 미니 바(Mini Bar)에 저녁을 먹으러 갈 거다. 예전에 갔을 때 정말 즐거운 밤을 보냈다. 서울을 떠나기 전엔 리움미술관에 들를 것이다. 한국의 오래된 도자기를 보고 싶다. 전 세계 도자기를 수집하고 있는데 한국 도자기는 없다. 꼭 하나 찾아서 돌아갈 생각이다.(웃음)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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